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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령의 결투, 피어나는 빙천(氷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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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령(白骨嶺)의 밤바람은 칼날보다 매서웠다.


깎아지른 돌산 고개 사방으로 이름 모를 사파 무인들과 들짐승들의 백골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풍화되어 있었다. 웅웅거리는 바람 소리가 골짜기 틈새를 때릴 때마다, 마치 억울하게 죽어간 원혼들이 울부짖는 듯한 기괴한 파공음이 백골령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하아…… 하아……”


설하(Seol Ha)는 한빙철검(寒氷鐵劍)을 쥔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엽락소축 화재 속에서 스승을 구출하고 신기자를 처단하느라 그녀의 단전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왼쪽 소매가 불길에 타들어 가 가냘픈 맨살이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고, 손 끝은 태음신맥의 한기가 역류해 푸르스름한 동상 멍으로 가득했다. 설상가상으로 그녀가 쥔 한빙철검의 검신 표면에는 팽극의 철퇴를 박살 낼 때 가해진 충격으로 인해 미세한 균열이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단 한 번만 적의 묵직한 병기와 정면으로 충돌해도, 이 유품 검은 그대로 유리 조각처럼 박살 날 터였다.


그녀의 등 뒤, 황량한 바위 더미 위에 제갈휘(Jegal Hwi)가 청죽장(靑竹杖)을 짚은 채 묵묵히 서 있었다. 하얀 붕대로 단단히 가려진 그의 두 눈가와 귀밑으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다시 한번 흘러내렸다. 청혈단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에서 청혈심공 2단계(淸血心功)를 무리하게 운용해 사방의 기류를 읽어내느라, 그의 머릿속은 수만 개의 바늘이 뇌맥을 찌르는 듯한 극통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지독한 이명이 왼쪽 귀를 사정없이 때렸으나, 눈먼 사서의 평정심만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그들의 앞을 가로막은 자는 해진 도포에 깊은 삿갓을 눌러쓴 사내였다.


무정검사(Mujeong Geomsa).


돈이 되는 일이라면 정사(正邪)를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두르는 일류 낭인 검객. 놈은 손때 묻은 명검의 자루를 쥔 채, 살기조차 흘리지 않는 고요한 자세로 설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대도법의 투박한 철사방 무사들과는 격이 다른, 실전 생사결로만 단련된 일류 고수의 정교함이 놈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철사방이 네 목에 건 현상금이 백은 오천 냥이더군.”


삿갓 아래로 무정검사의 메마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먼 사서와 경맥이 뒤틀린 계집년치고는 과분한 목값이다. 원한은 없다. 그저 밥줄을 따를 뿐.”


“원한이 없어도 칼을 뽑는 자를 강호에서는 도적이라 부른다.”


설하가 차갑게 쏘아붙이며 빙천보(氷天步)의 구결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미끄러운 백골령의 돌바닥 위에서 균열이 간 검으로 일류 고수의 검을 상대해야 한다. 정면 충돌은 파멸이었다.


스윽.


무정검사의 신형이 안개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온다!’


설하의 청각이 적의 기척을 감지하기도 전에, 차가운 바람의 결이 그녀의 왼쪽 어깨를 스쳤다.


쉬이익!


무정검사의 검은 화려한 초식이 없었다. 오직 최단 거리로 상대의 급소를 꿰뚫는 잔혹하고 군더더기 없는 무정검법(無情劍法)의 참격이었다. 설하는 급히 한빙철검을 세워 비스듬히 흘려내려 했으나, 놈의 검 끝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검면을 타고 미끄러지며 그녀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스각!


“아윽!”


설하의 옆구리 마의가 찢어지며 붉은 피가 허공에 흩날렸다. 얇지만 깊은 검상이 새겨졌다. 설하는 고통을 참으며 빙천보를 전개해 뒤로 몸을 날렸으나, 무정검사는 이미 그녀의 도주 경로를 예측했다는 듯 한 발 먼저 움직여 퇴로를 차단했다.


검 끝이 다시 한번 번개처럼 쇄도했다. 이번에는 오른쪽 허벅지였다.


파학!


“하아아!”


허벅지에서 흘러내린 피가 백골령의 하얀 바위를 붉게 물들였다. 무정검사의 검술은 빠르지 않았으나, 설하의 모든 움직임과 보법의 디딤발을 완벽하게 읽고 있었다. 설하가 속도로 맞서려 할 때마다, 놈은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신법을 사용해 오히려 그녀의 보법 사각지대로 파고들어 역습을 가했다.


쩌적, 쩌적.


한빙철검이 무정검사의 검면과 비스듬히 부딪칠 때마다, 검신에 새겨진 미세한 균열들이 비명을 지르며 벌어졌다. 이대로 세 번만 더 맞부딪치면 가문의 마지막 유품은 형체도 없이 부서질 것이 분명했다. 설하는 막다른 바위 절벽 끝으로 몰렸다. 무정검사의 눈빛에 냉혹한 승기가 어렸다. 놈이 검을 뒤로 빼며 설하의 목덜미를 단숨에 꿰뚫을 최후의 참격을 준비했다.


그때였다.


제갈휘의 청죽장이 백골령의 돌바닥을 가볍게 툭, 두드렸다.


이명이 몰아치는 뇌 속에서, 제갈휘의 청혈심공 2단계가 폭발적으로 기동했다. 바람의 흐름, 무정검사의 가죽 장화가 미끄러운 돌바닥을 딛는 마찰음, 그리고 놈이 검을 뒤로 뺄 때 짚은 왼쪽 어깨 근육의 미세한 수축 소리가 머릿속 총명기(聰明記)의 가상 서고 위에서 입체적인 궤적으로 해체되기 시작했다.


‘놈의 검술은 완벽해 보이나, 실전에서의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오른쪽 무게중심에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다. 검 끝이 떨리는 찰나, 왼쪽 어깨 근육이 미세하게 수축하며 하체의 디딤발이 평지보다 반 치 들린다. 저것이 약점이다.’


제갈휘는 피 묻은 입술을 열어 오직 설하의 고막에만 들리는 미세한 음파를 보냈다.


(설하야, 물러서지 마라. 피하려 하면 검기가 네 목을 먼저 벨 것이다. 놈의 검은 무정하나, 그 무정함 배후에는 오른쪽 어깨의 회전력에만 의존하는 치명적인 균열이 존재한다. 놈이 찌르는 순간, 정면으로 파고들어 검 끝을 땅에 꽂아라.)


설하의 푸른 눈동자가 번뜩였다. 단전에서 역류하는 한기의 고통이 전신을 찢어발겼으나, 그녀는 스승의 목소리를 신앙처럼 믿었다.


(경맥의 파열을 두려워하지 마라. 네 단전 내부의 태음신맥(太陰神脈) 한기를 한빙철검 끝에 완벽히 집중시켜 폭발시켜라. 피어내라, 빙천(氷天)의 영역을!)


“죽어라.”


무정검사의 나직한 선언과 함께, 명검의 검 끝이 설하의 목덜미를 향해 무성(無聲)의 궤적으로 쏘아져 들어왔.


설하는 눈을 감았다. 그녀는 스승의 지시대로 회피하는 대신, 오히려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놈의 검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검풍이 그녀의 어깨 가죽을 찢고 지나갔으나, 설하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전신의 모든 진기, 단전 속에 웅크리고 있던 태음신맥의 극음 한기를 한빙철검의 검신으로 폭발적으로 밀어 올렸다.


“빙천영역(氷天領域)!”


설하가 한빙철검 끝을 백골령의 단단한 돌바닥에 강하게 내리꽂았다.


콰아아아앙—!


순식간에 설하를 중심으로 사방 오 척 범위의 대지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단순한 서리가 아니었다. 지독한 극음의 한기가 대지를 타고 파도처럼 뻗어 나가며, 주변의 공기마저 급격히 냉각시켜 하얀 서리 장막을 형성했다. 백골령의 굳은 바위들이 쩌적 소리를 내며 얼어붙었고, 무정검사의 가죽 장화 역시 순식간에 빙판에 들러붙어 기동력을 완벽히 상실했다.


“이, 이 한기는……!”


무정검사의 두 눈이 삿갓 아래에서 경악으로 크게 찢어졌다. 전신의 관절이 급격한 냉기로 인해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놈이 억지로 내력을 운용해 발을 떼려 했으나, 이미 설하는 얼음 위를 소리 없이 미끄러지는 보법, 빙천보(氷天步)를 전개해 놈의 사각지대로 파고든 뒤였다.


스스슥.


설하의 신형이 유령처럼 무정검사의 우측 옆구리로 밀려들었다. 그녀는 한빙철검을 비스듬히 세워 무정검사의 명검 검면을 강하게 때렸다. 극음의 한기에 노출되어 순간적으로 수축하고 취약해져 있던 명검의 강철은, 설하의 묵직한 참격을 견디지 못했다.


깡—! 콰직!


무정검사의 명검이 비명 같은 쇠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부러진 검날 조각들이 얼어붙은 백골령 바닥에 떨어져 쨍그랑거렸다. 설하의 한빙철검 끝은 정확히 무정검사의 목덜미 일 푼 앞에 멈춰 서 있었다. 검 끝에서 피어오른 서리 한기가 놈의 목 가죽을 하얗게 얼려가고 있었다.


완벽한 패배였다.


무정검사는 부러진 검자루를 쥔 채 멍하니 설하를 바라보았다. 놈의 삿갓 위로 하얀 서리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한해빙천검(寒海氷天劍)…… 사라진 고대 빙가의 신검이 어째서 여기에……”


무정검사는 목덜미의 서늘한 감각을 느끼며 천천히 검자루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놈은 제갈휘를 향해 깊은 경외심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내가 졌다. 목값은 포기하지. 하지만 경고하마. 너희가 쓴 그 검술의 흔적은…… 강남 무정도문(無情刀門)의 탐욕을 자극할 것이다. 그들의 도법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안다면, 조만간 더 큰 괴물들이 움직이겠지.”


무정검사는 그 말을 남긴 채, 부러진 검 조각들을 뒤로하고 안개 속으로 쓸쓸히 신형을 감추었다. 훗날 강남에서 다시 마주할 인연의 씨앗이 백골령의 서리 속에 조용히 심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아…… 하아……”


설하는 한빙철검을 거두며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단전의 내력이 완전히 고갈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었다. 검신 표면의 균열은 이제 검을 조금만 세게 쥐어도 바스러질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제갈휘가 청죽장을 짚고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차분하게 전음했다.


(잘했다, 설하야. 일류 고수의 검을 상대로 네 스스로 한계를 깨뜨리고 빙천영역을 피워냈구나.)


“스승님…… 제가 해냈습니다.”


설하가 입가의 핏자국을 닦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안도의 순간은 지극히 짧았다.


부스럭, 콰직.


백골령 초입의 안개 낀 소나무 숲 너머로, 둔탁하고 웅장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횃불이 일제히 일렁이기 시작했다. 피비린내 나는 살기와 함께, 쇠사슬이 거친 청석 바닥을 긁으며 끌려오는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백골령 전체를 뒤흔들었다.


“흐흐흐…… 하하하하!”


광기 어린 폭소가 안개를 찢고 터져 나왔다.


철사방주 조광렬(Jo Gwang-ryeol)이었다. 검붉은 사파 장포를 걸친 놈의 거구 뒤로, 철사방의 정예 철갑 무사들이 삼엄한 진형을 갖춘 채 백골령의 출구를 완전히 포위하고 들어섰다.


하지만 설하의 시선을 강탈한 것은 조광렬의 거대한 신형이 아니었다.


조광렬의 굵은 왼손에 쥐어진 쇠사슬 끝에, 엽락소축의 살림꾼 소년 칠성이(Chil-seong)와 설하의 유일한 친구 삼월이(Sam-wol)가 목덜미를 옥죄인 채 개처럼 끌려오고 있었다. 삼월이의 붉은 저고리는 이미 피투성이로 찢겨 있었고, 칠성이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신음하고 있었다.


“설하야! 이 장님 놈의 노비 계집년아!”


조광렬이 쇠사슬을 강하게 잡아당기며, 삼월이의 목덜미에 톱날 모양의 거대한 강철대도를 들이댔다.


“네년이 내 해결사들을 죽이고 내 대장간을 부수었더군! 아주 영악한 쥐새끼들이었어! 자, 무릎을 꿇고 장님 놈의 머리를 바쳐라! 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들의 목을 이 자리에서 차례로 썰어버리겠다!”


삼월이의 목줄기에서 붉은 피가 가늘게 흘러내리는 순간, 설하의 눈동자가 분노로 푸르게 뒤틀리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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