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서고의 그림자 자객
어둠은 빛의 부재가 아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눈을 가진 자에게 있어 무수한 소리와 미세한 공기의 흐름이 얽혀 드는 가장 투명한 도화지였다.
엽락소축의 방바닥 아래 숨겨진 지하서고는 매캐한 흙먼지와 오래된 종이 냄새, 그리고 환진림에서 타오른 불길의 잔향이 뒤섞여 지독하게 무거운 공기를 품고 있었다. 서고 구석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제갈휘의 이마에서는 연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하얀 붕대 아래로 검붉은 피가 배어나와 그의 창백한 볼을 타고 흘렀다. 귀와 코에서 흘러내린 피는 이미 회색 마의의 깃을 검붉게 물들인 지 오래였다.
“하아…… 하아……”
청혈단이 완전히 고갈된 상태에서 수백 명의 철사방 대군을 파멸시키기 위해 ‘팔진도해’의 수리적 연산을 실시간으로 제어한 대가는 참혹했다. 그의 머릿속은 수만 개의 송곳이 뇌맥을 사정없이 난도질하는 듯한 극통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왼쪽 귀에서는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는 듯한 이명이 끊임없이 고막을 뒤흔들어, 주변의 소리를 왜곡시키려 들었다.
제갈휘는 떨리는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며 호흡을 가늘게 늘였다. 도가의 비전 호흡법이자 내력 소모를 극한으로 줄이는 귀식토납법(龜息吐納法)이었다. 지금 그가 평정심을 잃고 뇌맥의 폭주를 방치한다면, 전신의 경맥이 영구히 파괴되어 즉사할 것이 분명했다. 그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오직 백노인에게 배운 청혈심공 2단계(淸血心功)의 극의와 타고난 청풍감각(淸風感覺)뿐이었다.
스릉.
그의 정면 삼 보 밖에서 미세한 쇠 소리가 울렸다. 설하가 한빙철검(寒氷鐵劍)을 쥔 채 스승의 앞을 지키고 서 있는 소리였다. 그녀 역시 등 뒤의 화상 상흔과 연이은 생사결로 인해 단전의 내력이 일 할 미만으로 고갈된 상태였다. 대검의 검신 표면에 새겨진 무수한 미세 균열들이 그녀가 숨을 쉴 때마다 위태로운 파공음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설하야, 검을 거두고 숨을 죽이거라. 네 단전의 진기는 이미 바닥을 드러냈다. 무리하게 한기를 운용하면 검이 먼저 부서질 것이다.)
제갈휘는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은 채 설하의 귓가로만 미세한 음파를 보냈다. 전음입밀(傳音入密)이었다.
(하지만 스승님, 숲속을 뚫고 들어온 자객의 기척이…….)
(알고 있다. 이미 이 지하서고 안까지 들어와 있구나.)
제갈휘의 전음에 설하의 신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서고를 밝히는 희미한 촛불 아래에는 오직 흙먼지만이 부유할 뿐 아무런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무림맹 최고의 잠입첩보원 신기자가 펼치는 귀식은신술(龜息隱身術)의 위력이었다. 놈은 숨소리뿐만 아니라 심장의 고동, 체온, 심지어 살기마저 완벽하게 지워내어 일반적인 일류 고수조차 정면에서 감지할 수 없는 무형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신기자는 한 가지를 알지 못했다. 눈이 먼 제갈휘의 감각은 단순히 살기나 호흡 소리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서고 바닥 한구석에는 제갈휘가 매일 아침 마당을 쓸 때 사용하던 낡은 대나무 빗자루가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빗자루 끝의 얇은 대나무 살들에는 육안으로는 절대 보이지 않는 미세한 거미줄 같은 명주실들이 연결되어 바닥판 전체에 격자 모양으로 낮게 깔려 있었다. 이것은 제갈휘가 만일의 기습에 대비해 지하서고 전체에 설계해 둔 미세 실 진동 감지 장치였다.
스스스.
서고 천장의 낡은 목조 들보 틈새에서 먼지 한 톨이 소리 없이 떨어졌다.
일반적인 인간의 귀로는 결코 들을 수 없는 지극히 미세한 공기의 파동. 그러나 제갈휘의 머릿속 총명기(聰明記)는 그 찰나의 기압 변화를 기하학적인 수치로 환산해 냈다.
‘천장 중앙 들보 우측 삼 척. 놈이 내려온다.’
스슥.
신기자가 천장에서 나비처럼 가볍게 몸을 날려 바닥에 착지했다. 발끝이 먼지 쌓인 판자에 닿는 순간, 바닥에 깔려 있던 미세한 명주실의 장력이 0.1푼 미세하게 끊어졌다. 그 진동은 즉시 대나무 빗자루의 대를 타고 제갈휘가 짚고 있는 청죽장(靑竹杖)의 끝으로 전도되었다.
‘착지 방위는 내 등 뒤 일 장. 놈의 몸무게는 일 백 삼십 근 내외. 보법의 궤적으로 보아 단검을 사용하는 자다.’
신기자는 제갈휘가 자신을 감지했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놈의 눈에는 그저 코와 귀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눈먼 폐인 서생과, 내공이 고갈되어 숨을 헐떡이는 어린 계집년만이 보일 뿐이었다. 신기자의 입가에 비열한 미소가 걸렸다. 놈은 소매 속에서 빛을 반사하지 않는 특수 흑철 단검(黑鐵 單劍)을 소리 없이 미끄러뜨렸다.
쉬익!
신기자가 귀식은신술의 기세를 유지한 채, 제갈휘의 목덜미를 향해 단검을 찔러왔다. 바람 소리조차 나지 않는, 오직 살상만을 위해 단련된 완벽한 무성(無聲)의 참격이었다.
그러나 그 단검이 제갈휘의 목덜미를 꿰뚫기 직전, 제갈휘의 청풍감각이 단검 날이 가르는 미세한 공기 압력의 변화를 읽어냈다.
‘상단 찌르기. 각도는 좌측 십오 도.’
스윽.
제갈휘는 내력이 전혀 없는 육체였으나, 오직 역학적 계산에 따라 목을 우측으로 반 치 미세하게 비틀었다.
스각!
검은 단검 날이 제갈휘의 왼쪽 귀밑을 스쳐 지나가며 붕대의 끝자락을 잘라냈다. 신기자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자신의 완벽한 기습을 눈먼 장님이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한 것이다.
“뭣이……!”
신기자가 경악하며 단검을 회수하려던 찰나, 제갈휘의 오른손이 이미 품속에 쥐고 있던 청죽장(靑竹杖)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딸깍.
제갈휘가 청죽장 손잡이 내부의 숨겨진 장치를 시계 방향으로 강하게 비틀었다. 청죽장 독무 분사기(靑竹杖 毒霧 噴射器)가 작동하는 소리였다.
퓌우웅—!
지팡이 끝의 보이지 않는 미세한 홈에서 매캐한 대나무 연기와 함께, 독고염에게서 압수했던 마비 가루와 고농도의 석회 가루가 뒤섞인 백색 독무가 전방 삼 척 이내로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
“크아아아악—!”
눈앞에서 터진 석회와 독무가 신기자의 두 눈과 호흡기로 사정없이 침투했다. 아무리 귀식은신술의 대가라 할지라도 갑작스럽게 눈을 멀게 만들고 폐부를 찢는 듯한 고열의 석회 가루 앞에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신기자는 단검을 놓치고 두 눈을 움켜쥔 채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섰다.
(설하야, 지금이다! 적의 심장, 우측 사 도 각도로 검을 밀어 넣어라!)
제갈휘의 전음이 설하의 뇌리를 강타했다.
설하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고갈된 단전의 마지막 진기를 쥐어짜 한빙철검을 치켜들었다. 검신에 새겨진 미세한 균열들이 검붉은 살기를 머금으며 푸른 서리 기운을 내뿜었다.
스스슥!
설하의 신형이 미끄러지듯 빙천보(氷天步)를 전개해 신기자의 사각지대로 파고들었다.
“한설지풍(寒雪之風)!”
설하의 한빙철검이 안개를 찢으며 대각선으로 뻗어나갔다. 검 끝에 서린 시린 푸른빛의 검풍이 신기자의 가슴팍을 향해 번개처럼 쇄도했다.
푸학!
“컥……!”
정확한 찌르기였다. 한빙철검의 칼날이 신기자의 가슴뼈를 관통하여 심장을 그대로 꿰뚫었다. 검 끝에서 뿜어져 나온 극음의 한기가 신기자의 체내 경맥을 순식간에 동결시키며, 혈관 속의 피를 하얗게 얼려버렸다.
쩌적, 쩌적.
신기자의 전신이 푸른 서리로 뒤덮이며 동결되는 소리가 지독한 정적 속에 울려 퍼졌다. 놈은 단 한 번의 반격도 하지 못한 채, 눈이 먼 상태로 가슴에 검이 꽂힌 채 얼어붙은 석상처럼 바닥으로 쓰러졌다.
“하아…… 하아……”
설하는 검을 뽑아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한빙철검의 검신 표면에 새겨진 균열들이 방금 전의 충격으로 인해 한층 더 깊어지며 섬뜩한 전율을 흘려보냈다. 당장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운 무기의 상태가 그녀의 떨리는 손끝을 통해 전해졌다.
제갈휘는 청죽장에 몸을 의지한 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귀맥의 과부하로 인한 극심한 이명이 그를 괴롭혔으나, 그는 침착하게 신기자의 시신을 향해 다가갔다.
바스락.
제갈휘는 청죽장 끝으로 신기자의 가슴팍을 가볍게 건드린 뒤, 허리를 굽혀 놈의 품속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그의 예리한 손가락 끝에 거칠고 두꺼운 황실 전용 제지소의 한지 질감이 잡혔다. 일반적인 무인들이 지니고 다닐 리 없는, 고도로 보안 처리된 극비 문서의 촉감이었다.
제갈휘가 그 문서를 꺼내어 붉은 밀랍으로 봉인된 표면을 손끝으로 쓸어내렸다. 손끝의 초감각이 밀랍 위에 찍힌 인장의 문양을 머릿속 총명기의 가상 서고에 보관된 인장 데이터와 실시간으로 대조했다.
그 인장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제갈휘의 하얀 붕대 아래 먼 눈동자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미세하게 크게 떨렸다.
그것은 단순한 추격령이 아니었다.
무림맹의 정점, 맹주 천우진(Cheon Woo-jin)의 사적 인장이 선명하게 찍힌 극비 수색령 문서였다. 문서의 내용에는 만황곡에 숨어 있는 장서각 생존자를 발견 즉시 참수하고, 그가 기억하고 있는 모든 비급 목록을 회수하라는 천우진의 친필 지령이 적혀 있었다.
‘천우진…… 네놈이 결국 내 생존을 확신하고 움직였구나.’
제갈휘의 심장에 맹렬한 복수의 불꽃과 함께 서늘한 공포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무림맹의 최고 정예 추격대인 사공운의 본대가 이미 자신들의 위치를 완벽하게 파악했음을 증명하는 피의 증거였다.
그때였다.
지하서고 입구의 낡은 나무 계단이 쿵쾅거리며 거칠게 울렸다.
“스, 스승님! 큰일 났습니다요!”
청죽장 관리인 소년 최동이(Choe Dong-i)가 숨을 헐떡이며 지하서고 내부로 들이닥쳤다. 소년의 바가지머리는 땀과 흙먼지로 엉망이 되어 있었고, 손에 쥔 동백기름병은 공포로 인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동이야, 무슨 일이냐?”
제갈휘가 나직하게 물었다.
“무, 무림맹의 은색 깃발을 든 군사들이…… 사공운의 본대가 이미 엽락소축 외곽 숲을 겹겹이 포위하고 이쪽으로 좁혀오고 있습니다요! 입구의 목책들이 순식간에 부서지고 있어요!”
동이의 절박한 비명 소리가 서고 벽을 타고 무겁게 메아리쳤다.
지하서고 천장 틈새로, 숲속에서 들려오는 수백 마리 군마들의 거친 말발굽 소리와 무림맹 무사들의 예리한 검이 풀숲을 가르는 소리가 제갈휘의 청각을 사정없이 조여오기 시작했다. 포위망이 완전히 완성되기 직전의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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