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소나무 숲의 거울 미로
숲을 뒤흔드는 수백 개의 발자국 소리가 축축한 안개 속으로 젖어 들었다. 만황곡 입구의 빽빽한 소나무 숲, 환진림(幻陣林)의 통제소 역할을 하는 거대한 바위 뒤에 제갈휘는 조용히 주저앉아 있었다. 그의 손에는 어제 엽락소축의 화재 속에서 설하가 목숨을 걸고 구해낸 청죽장(靑竹杖)이 굳게 쥐여 있었다.
그을음이 닦여나간 대나무 표면의 미세한 각인들이 그의 초감각적인 손끝을 타고 뇌맥으로 흘러들어왔다. 머릿속 장서각 서고가 거칠게 요동치며 고대 진법인 팔진도해(八陣圖解)의 구결들을 실시간으로 복원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대가는 참혹했다. 백노인 특제 청혈단이 완전히 고갈된 탓에, 전신의 감각을 극대화할 때마다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이 도졌고, 왼쪽 귀에서는 끊임없이 웅웅거리는 이명이 울렸다. 제갈휘는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어둠 속을 향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진입했다. 설하야, 호흡을 가다듬어라.”
제갈휘의 나직하고도 고요한 전음입밀(傳音入密)이 설하의 고막을 맑게 울렸다.
철사방주 조광렬과 부방주 마태환, 그리고 책사 갈우영이 이끄는 철사방(鐵沙방)의 대군 수백 명이 붉은 횃불을 밝힌 채 환진림 내부로 진입하고 있었다. 횃불의 뜨거운 열기가 안개와 부딪치며 숲 전체를 매캐한 수증기로 가득 채웠다. 적들은 사냥꾼들의 단순한 덫을 경계하며 촘촘한 대형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적들이 진법의 중심인 분지 지형의 초입, 즉 제갈휘가 설계한 거울 장치들의 교차점에 도달한 찰나였다. 제갈휘는 청죽장 끝으로 바닥의 흙더미를 가볍게 툭 쳤다. 그 진동 신호를 포착한 구덕만과 사냥꾼들이 숲속 곳곳에 숨겨진 비밀 밧줄을 동시에 잡아당겼다.
서서서석!
소나무 가지 사이에 매달려 있던 수십 개의 낡은 구리 거울과 놋그릇 파편들이 일제히 각도를 바꾸며 활성화되었다. 정오의 흐릿한 햇빛과 횃불의 불빛이 안개 속에서 기괴하게 굴절되기 시작했다.
“어, 어라? 저기 소나무가…… 소나무가 움직인다!”
“으아악! 나무가 나를 향해 덮쳐온다!”
착시의 미로가 가동되는 순간, 적들의 시야에 서 있는 소나무들이 수십 배로 팽창하며 자신들을 향해 쓰러지는 듯한 거대한 환각이 연출되었다. 빽빽한 나무 장막이 끝없이 회전하는 거울 미로 속에서, 철사방 무사들은 방향 감각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 바보 놈들! 제자리에 서라! 이것은 단순한 안개다!”
부방주 마태환이 고함을 질렀으나, 이미 극도의 공포에 휩싸인 철갑대원들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환각 속에서 나무의 습격을 피하려던 무사들이 무기를 마구잡이로 휘둘렀고, 쇠사슬과 대도가 아군의 몸을 가르는 아비규환의 참상이 시작되었다. 마태환이 이끄는 철갑대원들이 환각에 빠져 아군을 적으로 오인해 무자비하게 참수하는 동요가 일어났다. 사방에서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비명이 숲을 가득 메웠다.
설하는 안개 속에서 귀식토납법(龜息吐納法)으로 기척을 완전히 지운 채 대기하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 화상 상흔이 옷자락에 쓸려 뼛속까지 아려왔지만, 검을 쥔 손만큼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단전 내력은 겨우 3할 수준. 게다가 한빙철검(寒氷鐵劍)은 미세한 균열이 심해 정면 대결 시 박살 날 위험이 컸다.
스스슥.
설하는 미끄러지듯 빙천보(氷天步)를 밟으며 혼란에 빠진 철갑대원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가장 거구인 철갑대장의 전면 철갑을 직접 베려 검을 내뻗었다.
깡!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손목에 찌릿한 반탄력이 밀려왔다. 철사방 정예 철갑의 두꺼운 판금은 설하의 불완전한 참격을 가볍게 튕겨냈다. 검신에 새겨진 미세한 균열이 미세하게 떨리며 파손의 위험을 알렸다.
(설하야, 정면 충돌은 금물이다. 놈들의 갑옷은 단단하나 관절 틈새는 비어 있다. 검을 직접 부딪치지 말고, 극음의 한기를 틈새로 침투시켜 관절을 동결시켜라.)
제갈휘의 차가운 전음이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 설하는 즉시 전술을 선회했다. 그녀는 검날을 비틀어 철갑랑의 무릎과 팔꿈치 관절 틈새를 스치듯 타격하며 한해빙천검의 한기를 주입했다.
“끄아악! 내, 내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차가운 극음의 서리가 갑옷 내부의 관절을 순식간에 동결시켰다. 철갑랑들은 검 한 번 제대로 휘두르지 못한 채 얼어붙은 석상처럼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설하는 기세를 몰아 검을 허공을 향해 수차례 번개처럼 찔렀다.
“만천빙우(滿天氷雨)!”
검풍에 실려 동결된 수십 개의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비처럼 전방을 향해 흩뿌려졌다. 안개 속에서 상황을 파악하려던 적의 연락책들과 보초들이 소리도 없이 목덜미를 관통당하며 차례로 침묵했다. 철사방의 전령망이 완전히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철사방의 수석책사 갈우영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주판을 튕기며 주변 소나무의 그림자 각도와 안개의 밀도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있었다.
“당황하지 마라! 이것은 고대 진법의 일종이다! 거울의 반사 각도와 그림자의 길이를 계산하면 진안(陣眼)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
갈우영의 쥐새끼 같은 눈이 번뜩였다. 그는 지면의 진동과 그림자 각도를 역산하여, 제갈휘가 있는 통제소와 진안 거울의 대략적인 방위를 찾아냈다.
“저기다! 동북방 삼십 보 지점의 늙은 소나무 뒤에 진의 핵이 숨겨져 있다! 화포 무사들은 저곳을 향해 불화살과 화염탄을 쏘아라! 거울들을 모조리 깨부수어라!”
갈우영의 단호한 명령에, 화포 무사들이 불타오르는 화염탄을 발사 장치에 장착하기 시작했다. 진법의 중심 거울이 파괴되면 환진림 전체가 무너지고 매복한 사냥꾼들과 설하의 위치가 고스란히 노출될 판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바위 뒤에 앉아 있던 제갈휘의 뇌맥이 끊어질 듯한 통증으로 진동했다. 청혈단이 없는 상태에서 뇌의 연산 속도를 한계까지 올리자, 그의 코끝에서 붉은 피가 한 방울 뚝 떨어졌다. 하지만 그의 심안은 멈추지 않았다.
(설하야, 동풍이 불어오는 찰나다. 서남방 이십이 보 지점의 거울 손잡이를 우측으로 정확히 반 푼만 돌려라. 진법의 회전 각도를 바꾸어 적들의 시야를 왜곡해야 한다.)
설하는 전음을 받자마자 몸을 날려 거울의 각도를 비틀었다.
그 순간, 갈우영이 바라보던 진안의 소나무 상(像)이 기묘하게 굴절되며 우측의 천 길 낭떠러지 방향으로 이동해 둔갑했다.
“발사하라!”
갈우영이 검은 가죽 부채를 내리치며 외쳤.
콰아아앙! 콰앙!
수십 발의 화염탄과 불화살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쏘아 올려졌다. 그러나 화염탄들이 작렬한 곳은 진짜 진안이 아닌, 착시로 유도된 엉뚱한 절벽 바위벽이었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절벽이 무너지며 돌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무, 무슨……! 분명 저곳이 중심이었거늘!”
갈우영이 자신의 계산이 완벽히 빗나갔음을 깨닫고 경악하여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진법 외곽의 거울 몇 개가 불길에 휩쓸려 파손되면서 진법의 범위가 일시적으로 축소되었으나, 여전히 주도권은 제갈휘에게 있었다.
자신이 설계한 화포 부대가 엉뚱한 곳을 타격했음을 깨달은 갈우영의 전신이 분노와 공포로 부르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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