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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를 깨부수는 일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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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앙! 콰직!


엽락소축의 얇은 대나무 벽이 불길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염정의 방화대원들이 던진 맹화유 항아리가 벽에 부딪쳐 터지는 순간, 설하는 본능적으로 제갈휘를 감싸 안았다. 끈적하고 뜨거운 기름이 사방으로 비산하며 대나무 방 전체를 거대한 불지옥의 구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타오르는 대나무의 매캐한 냄새와 점성 강한 기름이 타들어 가는 지독한 탄내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스승님! 정신 차리십시오! 스승님!”


설하가 비명을 지르며 제갈휘의 가냘픈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제갈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의 하얀 붕대 아래 먼 눈동자는 허공을 향한 채 잘게 떨리고 있었고, 입술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의 귓가에는 이미 현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대신 5년 전 황실 장서각을 집어삼켰던 그 잔혹한 화마의 기억이, 무너져 내리는 웅장한 기둥들과 부친 제갈무진의 피투성이 비명 소리가 그의 뇌맥을 난폭하게 뒤흔들고 있었다.


“쿨럭! 컥……!”


제갈휘의 입에서 검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귀밑과 코에서도 붉은 피가 방울져 흘러내렸다. 경맥 폐색(經脈 閉塞)의 제약 속에서 무리하게 운용되던 청혈심공의 내력이 트라우마의 공포에 부딪쳐 역류한 탓이었다. 제갈휘는 극심한 공황 상태에 빠진 채 단 한 마디의 전음도 내뱉지 못하는 완벽한 실어증 상태로 바닥을 긁었다.


그가 쥐고 있던 청죽장마저 불타는 방바닥 위로 굴러떨어졌다. 대나무 지팡이 표면에 새겨진 미세한 비급의 각인들이 불길에 그을려 영구히 소실될 위기였다.


“안 돼……!”


설하는 눈물을 흘리며 바닥을 휩쓸었다. 불길이 닿기 직전, 그녀는 제갈휘의 청죽장을 필사적으로 낚아채 제 품속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혼절 직전의 제갈휘를 제 등 뒤로 끌어올려 단단히 업었다. 내력이 고갈되어 가냘픈 그녀의 어깨에 스승의 무게가 얹어지자 무릎이 삐걱거렸으나, 설하는 독종처럼 이를 악물었다.


“스승님, 제가 반드시 구하겠습니다. 절대로 5년 전처럼 스승님을 혼자 두지 않을 것입니다.”


설하가 제갈휘를 업고 불타는 문을 향해 신형을 날리려던 찰나, 차가운 파공음이 불길을 찢고 날아왔다.


피융! 피융!


어둠 속, 소나무 꼭대기에 은신한 냉혈궁수 하진원의 독화살이었다. 보이지 않는 궤적으로 날아온 화살들이 설하의 전면을 가로막았다. 설하는 황급히 한빙철검(寒氷鐵劍)을 뽑아 들어 화살을 쳐냈다.


깡! 깡!


맑은 쇠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그러나 팽극과의 격투로 인해 이미 표면에 수많은 미세 균열이 가 있던 한빙철검은 화살의 묵직한 반탄력을 견디지 못하고 섬뜩한 전율을 울렸다. 검신이 당장이라도 박살 날 것처럼 위태롭게 흔들렸다.


“크하하하! 장님 놈과 계집년이 아직 살아있었구나! 더 타올라라! 한 줌의 재가 되어라!”


마당 외곽에서 방화대장 염정이 등 뒤에 매달린 가죽 기름 항아리를 흔들며 비열하게 웃어댔다. 염정의 주변에는 방화대원들이 횃불을 든 채 엽락소축의 유일한 도주로를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설하는 불길을 뚫고 염정에게 직접 접근하려 했으나, 놈이 주위에 뿌려놓은 맹화유의 열기와 하진원의 정교한 저격망 때문에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쩌적! 콰아앙!


그때, 불타오르던 대나무 집의 들보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제갈휘와 설하의 머리 위로 무너져 내렸다. 설하는 대피할 공간이 없음을 깨닫고, 억지로 몸을 돌려 무너지는 붉은 기둥을 제 등으로 받아냈다.


“아아악!”


불길이 설하의 마의를 태우고 등 가죽을 지지는 극통이 밀려왔다. 차가운 한기로 가득 차 있던 그녀의 단전이 뜨거운 열기에 노출되자 기혈이 뒤틀리며 각혈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설하는 제 등 뒤에 업힌 제갈휘가 다칠세라 온몸으로 기둥의 무게를 버텨내며 울부짖었다.


“스승님……! 제발 정신을 차려주십시오! 제발…… 저를 혼자 두지 마십시오!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설하의 뜨거운 눈물이 제갈휘의 창백한 뺨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 순간, 제갈휘의 감겨 있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제자의 뜨거운 눈물과 살이 타들어 가는 비명 소리가, 그의 영혼을 옥죄던 5년 전의 장서각 환각지를 거칠게 찢어발겼다.


‘내가…… 또다시 잃을 순 없다.’


머릿속에서 부친의 비명 소리가 사라지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불길을 막아서고 있는 어린 제자의 처절한 얼굴이 심안에 들어왔. 제갈휘는 피가 흐르는 입술을 깨물며 이성을 강제로 끌어올렸다. 그는 품속에서 백노인 특제 청혈단을 더듬거려 입안에 밀어 넣었다. 뇌맥을 찌르던 극통이 일시적으로 정화되는 느낌과 함께, 굳어 있던 그의 단전이 맑게 깨어났다.


제갈휘는 청혈심공 1단계(淸血心功)를 가동했다. 사방을 뒤덮은 불길의 굉음과 연기 속에서, 그의 초감각이 다시 한번 예리하게 쪼개지며 소리의 파동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하진원의 흑철궁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 염정의 거친 호흡 소리, 그리고…… 염정의 등 뒤에서 찰랑거리는 가죽 기름 항아리의 미세한 액체 소리!


제갈휘는 목구멍을 막고 있던 피를 삼키며, 설하의 귓가에 오직 그녀만이 들을 수 있는 맑고 차가운 소리의 파동을 보냈다.


(설하야, 고개를 숙여라.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스승의 전음이 뇌리에 꽂히는 순간, 설하의 푸른 눈동자에 구원의 빛이 서렸다.


“스, 스승님……!”


(더 이상 놈에게 직접 접근하려 하지 마라. 불길 속에서는 산소가 부족해 움직임이 둔해질 뿐이다. 정면 십오 보 거리, 불길 너머에 염정이 서 있다. 놈의 등 뒤에 매달린 가죽 항아리 세 개가 바람을 타고 찰랑이는 소리가 들리는구나. 한빙철검의 한기를 쪼개어 날려라. 만천빙우(滿天氷雨)의 파편을 놈의 등 뒤 항아리에 정확히 저격하거라!)


설하는 대답 대신 한빙철검을 허공을 향해 고속으로 찔러댔다. 단전에 남아 있던 마지막 내력이 검신을 타고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만천빙우(滿天氷雨)!”


검풍에 실려 얼어붙은 수십 개의 날카로운 은빛 얼음 조각들이 불길을 뚫고 번개처럼 날아갔다. 화염 장막 너머에서 승리를 확신하며 웃고 있던 염정은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날카로운 얼음 조각들이 그의 등 뒤에 매달린 가죽 기름 항아리들을 정확히 꿰뚫었다.


파아아앙!


항아리가 터지며 내부에 가득 차 있던 맹화유가 염정의 전신으로 쏟아졌다. 횃불의 불꽃이 기름에 닿는 순간, 거대한 폭발과 함께 염정의 신형이 거대한 인간 불기둥으로 변했다.


“으아아아악! 뜨겁다! 살려다오!”


염정은 비명을 지르며 스스로가 지른 불길 속에서 타들어가다, 이내 대지 위로 쓰러져 움직임을 멈췄다. 방화대장이 순식간에 폭사하자 방화대원들은 겁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졌고, 소나무 위에서 저격 기회를 엿보던 하진원 역시 전세가 역전되었음을 직감하고 숲속 어둠 속으로 신속히 퇴각했다.


“가자, 설하야. 동쪽 수로를 통해 빙화동으로 대피해야 한다.”


제갈휘의 전음에 따라 설하는 무너지는 엽락소축의 잔해를 뚫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불타는 약초촌의 매연을 피해 골짜기 깊은 곳으로 향하던 중, 그들은 주민들의 대피로를 온몸으로 막아서고 있던 전직 사파 무사 조남기와 합류했다.


조남기는 이미 철사방 무사들의 대도와 하진원의 독화살에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제갈휘 일행과 남은 주민들을 만황곡 최심부의 지하 빙화동(氷化洞) 내부로 안전하게 인도했다.


차가운 만년 서리가 내려앉은 빙화동 지하 깊은 곳.


불길을 피해 살아남은 송영감과 돌쇠, 그리고 주민들이 차가운 바닥에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백노인과 백아란이 다급하게 부상당한 주민들의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마을을 지키기 위해 가장 후방에서 사투를 벌였던 조남기는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그의 가슴과 어깨에는 독기가 퍼져 검게 변한 하진원의 독화살 세 발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제갈…… 선생…… 주민들을…… 부탁하오……”


조남기는 피 묻은 손으로 제갈휘의 청죽장 끝을 잡으려 애쓰다, 이내 힘없이 손을 떨구며 하얗게 먼 두 눈을 감았다. 개과천선하여 평화롭게 살고자 했던 전직 사파 무사의 마지막 숨결이 차가운 빙화동의 서리 안개 속으로 쓸쓸하게 흩어졌다. 주민들의 비장하고 처절한 통곡 소리가 동굴 내부를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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