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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밤, 불타는 만황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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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약고가 폭발하는 순간,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과 함께 대지가 비명을 질렀다.


철사방 병기창 후문 광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수백 개의 횃불이 폭풍 같은 충격파에 일시에 일렁이며 뒤로 자빠졌다. 무자비하게 솟구친 검은 연기와 화염의 장막이 순식간에 광장 전체를 집어삼켰다. 사방에서 무사들의 비명과 말들의 울부짖음이 뒤엉켰다. 이 아비규환의 한복판에서, 설하는 이춘삼을 등에 업은 채 한빙철검을 움켜쥐고 이를 악물었다. 자욱한 매연이 시야를 완벽히 차단하고 있었다.


(좌측 삼 보, 머리를 숙이고 빙천보를 밟아라. 바람의 결이 동쪽으로 흐르니, 연막을 뚫고 지나갈 틈은 오직 그곳뿐이다.)


귀를 맑게 울리는 제갈휘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얼음처럼 차가웠으나,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설하는 스승의 지시에 단 일 푼의 의심도 품지 않았다. 그녀는 다리에 내력을 실어 미끄러지듯 대지를 질주했다. 빙천보(氷天步)의 유려한 신형이 화염의 틈새를 유령처럼 통과했다. 혼란에 빠진 철사방 무사들이 허공에 칼질을 해대는 사이, 설하는 이춘삼을 업고 광장 외곽의 가시덤불 숲으로 신속하게 몸을 숨겼다. 그곳에는 이미 석두가 거대한 목제 수레를 대기시킨 채 어둠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석두야, 어르신을 모셔라!”


설하가 헐떡이며 이춘삼을 수레에 눕히자, 석두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레를 끌고 숲속 비밀 통로로 사라졌다. 설하 역시 마차 내부로 뛰어들었다. 마차 안에는 제갈휘가 청죽장을 무릎에 얹은 채 창백한 안색으로 앉아 있었다. 그의 귀밑으로는 청혈심공(淸血心功)의 과도한 운용으로 흘러내린 핏자국이 검붉게 굳어가고 있었다.


“스승님, 무사히 탈출했습니다.”


“고생했다. 마서방, 마차를 움직여라. 엽락소축으로 돌아간다.”


제갈휘의 나직한 명령과 함께 마차는 소리 없이 어둠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병기창이 불타오르는 붉은 불빛이 멀어지는 것을 보며, 제갈휘는 품속에 갈무리한 독고염의 비밀 서신을 매만졌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길한 예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철사방주 조광렬은 결코 이 패배를 묵과할 위인이 아니었다.


* * *


같은 시각, 연기가 피어오르는 병기창의 잔해를 바라보던 철사방주 조광렬은 광포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대장간의 그 장님 새끼와 부엌데기 년이 내 병기창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 말이냐! 팽극마저 이빨 빠진 개처럼 쓰러지다니!”


그가 휘두른 강철대도가 타다 남은 목조 기둥을 단숨에 두 동강 냈다. 붉은 도기가 허공을 가르며 매캐한 불꽃을 튀겼다. 그의 주변에 선 무사들은 감히 숨조차 쉬지 못한 채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때, 철사방의 수석책사 갈우영이 염소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슬그머니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쥐새끼 같은 눈빛에는 음험한 계책이 일렁이고 있었다.


“방주님, 이성을 잃으시면 적들의 계책에 놀아날 뿐입니다. 병기창의 폭사와 철검삼랑의 전멸, 그리고 팽극의 패배까지…… 이것은 단순한 삼류 무사들의 반란이 아닙니다. 배후에 황실 장서각의 생존자이거나, 혹은 강호의 판세를 꿰뚫어 보는 무서운 지략가가 숨어 있음이 틀림없습니다.”


“지략가? 그 장님 새끼를 말하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만황곡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해 우리 수색대를 고사시키려는 심산이겠지요. 하지만 굳이 놈들이 설계한 진법과 덫 속으로 우리 무사들을 밀어 넣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갈우영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제갈휘의 은신처가 있는 계곡 방향을 가리켰다.


“놈들은 만황곡의 약초꾼들과 피난민들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합니다. 만황곡 약초촌 전체를 불태워 버리십시오. 숲과 마을을 한 줌의 재로 만들면, 숨어 있던 쥐새끼들은 연기와 불길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기어 나와 우리 칼끝에 목을 들이밀 것입니다.”


조광렬의 입가가 거칠게 뒤틀렸다. 광기 어린 희열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렀다.


“크하하하! 맞다! 온 골짜기를 불바다로 만들면 그 지략가라는 놈의 머리통도 결국 타들어 가겠지! 염정! 하진원! 지금 당장 방화대와 궁수들을 이끌고 만황곡으로 진격하라! 단 한 가구의 초가집도, 단 한 명의 인간도 살려두지 말고 산 채로 구워버려라!”


방화대장 염정이 횃불을 치켜들며 음산하게 웃었다. 그의 등 뒤에 매달린 가죽 기름 항아리들이 찰랑이는 불길한 소리를 냈다. 냉혈궁수 하진원 역시 묵묵히 흑철궁을 다잡으며 어둠 속으로 신형을 날렸다. 만황곡을 향해 잔혹한 파멸의 그림자가 몰려가기 시작했다.


* * *


깊은 밤, 만황곡 약초촌은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주민들은 대장간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에 불안에 떨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송영감은 낡은 대나무 파이프 담뱃대를 쥔 채 마을 어귀를 서성이고 있었다.


휘이이익—!


갑작스럽게 어둠을 가르는 기괴한 파공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하늘을 올려다본 송영감의 눈동자가 공포로 크게 확장되었다.


붉은 불꽃을 뿜어내며 날아오는 둥근 물체들. 그것은 철사방의 방화대원들이 투척기 조각으로 날려 보낸 맹화유(猛火油) 항아리들이었다.


콰아아앙! 콰직!


항아리들이 약초촌 중앙의 초가집 지붕들에 부딪쳐 깨지는 순간, 점성 강한 기름이 사방으로 튀며 무시무시한 화염 폭풍이 일어났다. 한 번 붙으면 물로도 꺼지지 않는 사파의 특수 화약이었다. 순식간에 서너 채의 초가집이 거대한 불기둥으로 변했다.


“으아악! 불이다! 철사방 놈들이 불을 질렀다!”


“물러서라!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라!”


비명 소리가 만황곡의 밤하늘을 찢었다. 잠에서 깬 아녀자들과 노인들이 불타는 가옥에서 뛰어나왔다. 하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자비 없는 죽음의 화살이었다.


피융! 피융!


어둠 속, 거대한 소나무 꼭대기에 은신해 있던 냉혈궁수 하진원의 흑철궁이 울부짖었다. 백보 밖에서도 소리 없이 날아간 독화살들이 도망치던 청년들과 아녀자들의 등 뒤를 정확히 꿰뚫었다. 화살에 맞은 이들이 피를 토하며 불타는 대지 위로 쓰러졌다.


“송 영감님! 어서 피하십시오!”


돌쇠가 울부짖으며 달려왔으나, 송영감의 뒤편에서 떨어진 기름 항아리가 폭발하며 그의 다리를 덮쳤다.


“아아악! 내 다리! 다리가……!”


송영감이 불길에 휩싸여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돌쇠가 온몸에 화상을 입어가며 송영감을 끌어안고 뒤로 후퇴하려 했으나, 사방은 이미 거대한 화염 장막으로 막혀 있었다. 철사방의 무자비한 대방화(大放火)는 만황곡 전체를 산 채로 굽는 거대한 아궁이로 만들고 있었다.


* * *


엽락소축의 대나무 방 안.


밀려오는 매캐한 탄내와 열기가 창문 틈새로 스며드는 순간, 제갈휘의 신형이 굳어버렸다.


스스스슥…… 탁.


그가 쥐고 있던 청죽장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처음에는 그저 가벼운 기침이었다. 하지만 연기의 농도가 짙어질수록, 제갈휘의 호흡은 급격하게 가빠졌다. 그의 머릿속에서 거대한 이명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이이이잉—!


눈먼 눈앞으로 붉은 불꽃의 환영이 어른거렸다. 그것은 5년 전, 황실 장서각을 집어삼켰던 그 잔혹한 화마(火魔)의 기억이었다.


‘아버님……! 아버님, 어디 계십니까!’


불타는 책들이 내뿜는 매캐한 연기. 무너져 내리는 장서각의 웅장한 기둥들. 불길 속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온몸으로 자객들의 칼날을 막아서던 부친 제갈무진의 피투성이 얼굴과 비명 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허억…… 흑……!”


제갈휘는 가슴을 움켜쥐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의 호흡은 이미 통제력을 잃고 요동치고 있었다. 전신에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고, 하얀 붕대 아래 먼 눈동자가 공포로 잘게 떨렸다.


과도하게 운용되던 청혈심공(淸血心功)의 내력이 트라우마의 충격으로 역류하기 시작했다. 단전의 기맥이 검게 타들어 가는 듯한 극통이 뇌맥을 강타했다.


“쿨럭! 컥……!”


제갈휘의 입에서 붉은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귀밑과 코에서도 붉은 피가 방울져 흘러내렸다. 감각을 극대화하여 심안을 유지하던 그의 초감각들이 화재의 열기와 연기 속에서 완벽하게 파괴되고 있었다. 사방의 소리가 기괴하게 왜곡되어 들렸고, 공기의 흐름을 읽던 후각은 탄내에 마비되었다.


(설하야…… 설하…… 어서……)


그는 전음입밀을 전개하려 필사적으로 내력을 쪼개려 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단전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목구멍 속에서 피와 함께 가라앉았다. 정신적 붕괴가 초래한 완벽한 실어(失語) 상태였다. 지략가로서의 뇌맥이 차단된 제갈휘는, 이제 단 한 마디의 지시도 내릴 수 없는 초라한 장님 폐인에 불과했다.


“스승님! 스승님!”


방문을 부수고 들어온 설하가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눈에 비친 제갈휘의 모습은 처참했다. 하얀 붕대는 이미 코와 귀에서 흘러내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고, 전신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호흡을 제대로 짓지 못하고 있었다.


“스승님, 정신 차리십시오! 밖이…… 밖이 온통 불바다입니다! 철사방 놈들이 마을을 다 태우고 이곳까지 밀려오고 있습니다!”


설하가 제갈휘의 어깨를 흔들었으나, 제갈휘는 그저 붕대 뒤의 눈을 허공에 둔 채 거친 숨만 몰아쉴 뿐이었다. 그의 마음속은 여전히 5년 전 불타는 장서각의 환각지(幻覺地)에 갇혀 있었다.


설하는 눈물을 삼키며 제갈휘를 업으려 했다. 그러나 엽락소축의 대나무 기둥들이 불길에 휩싸여 쩌적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출구는 이미 거대한 불길의 장막으로 막혀 있었다. 설하가 검풍으로 불길을 끄려 했으나, 기름이 섞인 맹화유의 불길은 바람을 타고 오히려 더 거세게 번져나갈 뿐이었다.


그때였다.


“크하하하! 저기 장님 책벌레 놈의 둥지가 있구나!”


엽락소축의 앞마당 너머에서 횃불을 든 염정과 방화대원들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기름 항아리를 던져라! 흔적도 없이 태워버려라!”


쉬이익! 쾅!


가죽 기름 주머니와 기름 항아리들이 엽락소축의 지붕과 벽면을 사정없이 강타했다. 끈적한 기름이 사방으로 번지며, 제갈휘와 설하가 갇힌 대나무 집 전체가 거대한 불지옥의 구덩이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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