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사방의 발악, 납치된 망치
귀영협의 피비린내 나는 혈투가 끝난 직후, 만황곡의 차가운 안개 속에서 새로운 폭풍이 태동하고 있었다.
새벽녘의 차가운 안개가 만황곡 깊은 곳에 자리한 비밀 동굴 내부로 스며들었다. 동굴 안쪽, 낡은 평상 위에는 설하가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철검삼랑과의 처절한 사투 끝에 전신의 내력을 극한으로 소모한 그녀는, 태음신맥의 한기가 기맥을 역류한 여파로 지독한 고열과 오한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녀의 이마에는 하얗게 서리가 돋아나 있었고, 검을 쥐었던 손끝은 푸르스름한 동상 멍 자국으로 가득했다.
제갈휘는 평상 곁에 묵묵히 앉아 있었다. 하얀 붕대로 단단히 가려진 그의 두 눈 아래로, 어젯밤 청혈심공 2단계를 무리하게 운용하느라 흘러내렸던 피가 검붉게 굳어 있었다. 관자놀이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과 왼쪽 귀에서 삐이익- 하고 끊임없이 울려 퍼지는 이명이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으나, 눈먼 사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가냘픈 손은 무릎 위에 놓인 청죽장(靑竹杖)의 차가운 대나무 표면을 가만히 쓸어내릴 뿐이었다.
“제갈 선생, 아이의 맥박이 겨우 진정되었네.”
침상 옆에서 은침을 거두던 백노인이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피로와 함께 제갈휘를 향한 은밀한 경외심이 섞여 있었다. 어젯밤, 제갈휘가 전음입밀로 지시한 정교한 기맥오행침법의 좌표가 아니었다면 설하의 단전은 이미 스스로 뿜어낸 한기에 얼어붙어 파멸했을 터였다.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네. 단전의 역맥 흐름을 침술로 묶어두는 것도 사흘이 한계야. 뒤틀린 음기를 제어하려면 점례 아주머니가 달여주는 음양조화탕을 주기적으로 복용해야 하네. 그리고 무엇보다……”
백노인의 시선이 평상 옆에 놓인 설하의 한빙철검(寒氷鐵劍)으로 향했다.
철검삼랑의 쇠사슬 채찍을 얼려 부수는 과정에서 가해진 극단적인 한기 부하 탓에, 푸른빛이 돌던 대검의 표면에는 육안으로도 선명할 만큼 수많은 미세 균열이 가 있었다. 검신을 살짝 두드리기만 해도 당장 유리처럼 박살 날 것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저 검을 고치지 못하면, 아이는 다시는 한해빙천검을 펼칠 수 없네. 만황곡에서 저 만년한철과 묵철의 합금을 다룰 수 있는 대장장이는 오직 한 사람뿐인데……”
제갈휘는 대답 대신 청죽장을 가볍게 쥐었다. 백노인의 말이 맞았다. 설하의 검이자 가문의 마지막 유품을 녹여 만든 한빙철검을 수리할 수 있는 이는, 황실 병기창 출신의 대장장이 이춘삼뿐이었다. 하지만 지금 대장간으로 향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했다. 철검삼랑의 전멸은 철사방주 조광렬을 완전히 미치게 만들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동굴 입구를 가려놓은 넝쿨이 거칠게 흔들리며, 흙먼지와 함께 두 명의 그림자가 다급하게 들이닥쳤다. 제갈휘의 청풍감각에 잡힌 발소리는 지극히 가볍고 날쌔었으나, 호흡이 턱끝까지 차올라 거칠게 요동치고 있었다. 정보원 봉팔이와 엽락소축의 살림꾼 소년 칠성이었다.
“제, 제갈 형님! 큰일 났습니다요!”
봉팔이가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헐떡였다. 그의 얼굴은 공포로 질려 있었다.
“철사방 놈들이…… 완전히 미쳐버렸습니다! 귀영협에서 삼형제가 시체로 발견되자마자, 방주 조광렬이 광기에 휩싸여 만황곡 전체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조팽이 군사들을 이끌고 약초촌 대장간으로 들이닥쳤습니다!”
칠성이가 제갈휘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눈물을 터뜨렸다.
“이춘삼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잡혀갔어요! 조팽 놈이 할아버지를 대장간 바닥에 꿇려놓고, 누굴 위해 이 특수한 무거운 철검을 만들었냐며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했습니다. 할아버지가 피를 흘리면서도 끝까지 입을 열지 않자, 결국 사슬로 묶어서 철사방 병기고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갔습니다요!”
그 순간, 동굴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하강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침상에 누워 있던 설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의식은 없었으나, 자신의 은인인 이춘삼의 위기를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처럼 그녀의 단전에서 차가운 진기가 미세하게 흘러나왔다.
“이런 비열한 사파 놈들이 있나!”
동굴 한구석에서 묵묵히 상황을 듣고 있던 거구의 사냥꾼 돌쇠가 무쇠 창을 쾅 내리치며 격분했다.
“형님!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당장 마을 청년들과 사냥꾼들을 모아 철사방 병기고를 기습하겠습니까요! 춘삼 어르신이 우리 때문에 고초를 겪고 계시는데, 여기서 숨어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멈추어라, 돌쇠야.”
제갈휘의 나직하고 차가운 목소리가 동굴 내부의 격앙된 공기를 단숨에 가라앉혔다. 그의 하얀 붕대 아래 먼 눈은 돌쇠의 방향을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정면 기습은 개죽음일 뿐이다. 조광렬이 미쳐 날뛰고 있는 지금, 병기고는 철사방의 정예 무사들과 두꺼운 철갑을 두른 무인들로 겹겹이 포위되어 있다. 너희의 투박한 사냥용 무기로는 그들의 철갑에 흠집조차 내지 못할 것이다. 게다가……”
제갈휘는 청죽장 끝으로 바닥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 병기고 지하 감옥을 지키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아느냐?”
봉팔이가 마른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조광렬이 아끼는 괴력투사 팽극(彭棘)이라는 자입니다요. 신장이 팔 척에 달하는 거구로, 백오십 근 무게의 가시 박힌 철퇴를 가볍게 돌리는 외공의 괴물이라 들었습니다. 대장간을 부수고 이춘삼 어르신을 직접 납치한 것도 바로 그 자입니다.”
팽극.
하북 팽가에서 쫓겨난 후 사파의 외공 심법인 거인공을 익혀 전신의 피부를 강철처럼 단단하게 단련했다는 괴물 사내였다. 그의 무자비한 완력 앞에서는 어설픈 기습 따위는 그저 철퇴 아래 으스러질 고기방패가 될 뿐이었다. 돌쇠는 팽극의 이름이 나오자 분노로 이가 갈리면서도 무쇠 창을 쥔 손을 굳게 쥘 뿐, 선뜻 말을 잇지 못했다.
제갈휘는 품속에서 만황삼(萬荒蔘) 조각을 꺼내 봉팔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봉팔아, 이 영약을 장터의 첩보원들에게 자금으로 베풀어라. 그리고 병기고 외곽 순찰대의 정확한 교대 시간과 팽극의 움직임을 소리로 기록해 오너라. 칠성이 너는 대나무 새총 소리로 신호를 보낼 준비를 해라.”
“예, 형님! 목숨을 걸고 알아오겠습니다요!”
봉팔이가 영약을 품에 안고 신속하게 동굴 밖으로 사라졌다.
제갈휘는 천천히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설하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속에 엄격하면서도 애틋한 사제지간의 정이 소용돌이쳤다. 자신은 한 손가락도 쓸 수 없는 눈먼 폐인에 불과한데, 이 어린 제자에게 너무도 가혹한 복수와 생존의 짐을 지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그의 가슴을 짓눌렀다.
하지만 대피할 곳은 없었다. 도망치지 못하면 파멸뿐이었다. 이춘삼을 구출하고 한빙철검을 보수하는 것만이 그들이 만황곡에서 살아남아 강남으로 향할 유일한 길이었다.
제갈휘는 머릿속 가상의 도서관—제갈세가 총명기(聰明記)를 기동했다.
수만 권의 비급과 건축 설계도가 뇌리 속에서 실시간으로 시뮬레이션되기 시작했다. 황실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던 고대 군사 요새의 구조와 철사방 병기고의 건축 양식이 입체적인 선과 수치로 머릿속에 완벽하게 복원되었다.
‘병기고의 벽면은 묵철과 단단한 목재를 섞어 지어 외부 충격에는 강하나, 환기용 통로와 지하 수로가 연결되는 하단부 기둥은 습기에 취약하다. 정면 돌파가 아닌, 소리 없는 침투와 화약고 폭파를 통한 대혼란 유도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스승…… 님……”
그때, 침상 위에서 설하가 가느다랗게 눈을 뜨며 제갈휘의 청색 옷자락을 붙잡았다. 그녀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서리 기운에 얼어붙어 바스라졌다.
“이춘삼 어르신이…… 저 때문에…… 제가 가야 합니다. 저를 위해 검을 만들어 주신 분입니다……”
그녀는 떨리는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단전의 뒤틀린 한기가 기맥을 자극해 각혈을 하며 다시 쓰러졌다.
제갈휘는 따뜻하게 데워진 음양조화탕 찻잔을 그녀의 입가에 대어 주었다.
“음양조화탕을 마시고 기혈을 안정시키거라. 아직 네 몸은 한기를 완전히 다스리지 못해 무겁다. 하지만 춘삼 어르신의 의리를 저버릴 수는 없는 법. 정면 대결이 아닌, 내가 네 눈이 되어 병기고의 사각지대를 완전히 꿰뚫어 줄 터이니, 내 지시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따라야 한다.”
설하는 탕약을 단숨에 들이켜며 푸른 눈동자에 맹렬한 투지를 굳혔다. 스승의 목소리는 언제나 그녀에게 절대적인 신앙이었고, 벼랑 끝에서도 살아 돌아올 수 있는 유일한 생명선이었다. 그녀는 허리춤에 꽂힌 녹슨 빙가 철검의 자루를 움켜쥐며 복수를 다짐했다.
몇 시간 후, 동굴 밖 어둠이 짙어질 무렵 봉팔이가 숨가쁘게 돌아와 병기고의 상세한 보초 배치와 교대 시간을 보고했다.
제갈휘는 청죽장을 짚고 일어섰다. 그의 하얀 붕대 아래 먼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편두통의 통증이 뇌맥을 압박해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렸으나,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명징했다.
“시간이 되었다. 설하야, 침투 준비를 하거라.”
* * *
어둠이 짙게 깔린 만황곡 외곽 평원, 튼튼한 목책과 가죽 천막들로 둘러싸인 철사방 병기고의 외곽 숲속.
설하는 귀식토납법을 운용해 전신의 생명 기척을 완벽히 지운 채, 빽빽한 가시덤불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녀의 등 뒤에는 눈먼 스승 제갈휘가 조용히 서 있었고, 칠성이는 대나무 새총을 쥔 채 숨을 죽이고 있었다.
스스스스……
차가운 밤바람을 타고 병기고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지독한 쇠 냄새와 화약 향, 그리고…… 가죽 채찍이 살점을 찢는 섬뜩한 파열음이 제갈휘의 예리한 청각에 잡혔다.
제갈휘가 청죽장 끝을 바닥에 대고 미세한 진동을 읽어내는 순간, 숲속 어둠을 뚫고 날아온 칠복이의 나지막한 전음과 급보가 제갈휘의 귓전을 때렸다.
“형님, 칠복이입니다요! 지하 감옥 입구에 거구의 괴력투사 팽극이 직접 백근 철퇴를 쥔 채 문을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그리고…… 감옥 내부에서 이춘삼 어르신의 비명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철사방 병기고 지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둔탁한 타격음과 늙은 대장장이의 처절한 비명 소리. 설하의 눈동자가 분노로 푸르게 타오르는 순간, 제갈휘의 청죽장이 차가운 밤바람 속에서 미세하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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