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슬을 얼리는 극음의 한기
귀영협(鬼影峽)의 백색 안개는 이제 단순한 기화(氣化)된 수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설하가 뿜어낸 태음의 진기와 협곡의 음습한 한기가 뒤섞여 만들어진, 살을 에는 듯한 서리의 장막이었다.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백색의 어둠 속에서, 쇠사슬이 돌바닥을 쓸며 다가오는 기분 나쁜 마찰음만이 웅장하게 울려 퍼졌다.
사방에는 철검삼랑의 첫째 철일랑과 둘째 철이랑의 시신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형제들의 기척이 완전히 끊어진 것을 확인한 셋째, 철삼랑(Chul-sam-rang)의 호흡이 광기 어린 분노로 거칠어졌다.
“첫째 형님……! 둘째 형님……! 감히, 감히 이 쥐새끼 같은 년이!”
철삼랑의 절규가 협곡의 암벽에 부딪쳐 기괴한 메아리를 만들어냈다. 그의 전신에서 이류 고수 특유의 살기 어린 내력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허리에 감겨 있던 수십 미터의 쇠사슬 채찍이 스르륵 풀려나며, 사슬 끝에 달린 날카로운 칼날이 안개 속에서 은빛 궤적을 그리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것은 철사방이 자랑하는 기형병기이자, 한 번 옭아매면 뼈를 부러뜨리기 전에는 놓지 않는다는 철쇄박투(鐵鎖縛鬪)의 서막이었다.
설하는 좁은 바위 틈새에 등을 밀착한 채 숨을 몰아쉬었다. 독고염과의 사투에 이어 철검삼랑의 첫째와 둘째를 연속으로 처단하느라 그녀의 단전은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찢겨 나간 왼쪽 소매 사이로 드러난 가냘픈 팔은 차가운 강바람에 얼어붙어 덜덜 떨렸고, 동상으로 푸르게 죽은 손가락은 검자루를 쥘 때마다 뼈마디를 찌르는 통증을 유발했다. 한빙철검의 검신 표면에 새겨진 미세한 균열들이 그녀의 불안한 심상처럼 파르르 떨렸다.
쉭! 쉭! 쉭!
안개 장막을 찢으며 날카로운 사슬 소리가 사방에서 좁혀왔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변칙적인 파공음이었다.
(설하야, 흔들리지 마라. 적은 형제들의 죽음으로 이성을 잃었다. 분노에 찬 병기는 궤적이 크고 투박한 법. 귀식토납법을 유지하며 놈의 어깨 관절이 움직이는 소리에 집중하거라.)
바위 크레바스 안쪽 깊은 곳에 은신한 제갈휘의 전음입밀(傳音入密)이 설하의 고막을 맑게 울렸다. 제갈휘의 안색은 창백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청혈심공 2단계를 극한으로 운용하느라 귀밑으로 다시 한번 붉은 핏방울이 가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머리를 쪼개는 듯한 만성 편두통이 그의 뇌맥을 압박했지만, 눈먼 사서의 심안(心眼)은 안개 너머 철삼랑의 기맥 흐름을 기하학적인 선으로 완벽하게 해체하고 있었다.
“예, 스승님.”
설하는 전음으로 대답하며 한빙철검을 고쳐 잡았다.
하지만 일류 살수의 발악은 삼류의 경험을 가진 설하가 감당하기에 지나치게 변칙적이었다.
촤르르릉!
갑작스럽게 안개를 뚫고 날아온 쇠사슬 채찍이 설하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가는가 싶더니, 이내 뱀처럼 궤적을 꺾어 그녀의 디딤발을 향해 쇄도했다. 설하는 급히 빙천보(氷天步)를 전개해 미끄러지듯 신형을 뒤로 뺐으나, 협곡의 폭은 불과 두 자 반에 불과했다. 피할 공간이 없었다.
“잡았다, 이년!”
철삼랑의 비열한 포효와 함께, 날카로운 칼날이 달린 쇠사슬이 설하의 오른쪽 발목을 뱀처럼 감아쥐었다.
“아윽!”
차가운 무쇠의 감촉과 함께 쇠사슬이 살점을 파고드는 극통이 밀려왔다. 설하가 비명을 참으며 검을 휘둘러 사슬을 쳐내려 했으나, 철삼랑은 이미 승기를 잡았다는 듯 사슬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촤르르릉! 턱!
순식간에 회전하며 밀려든 쇠사슬이 설하의 양다리를 단단히 묶고, 이내 그녀의 손에 쥐어진 한빙철검의 검신까지 옭아매며 전신을 구속했다. 사슬 표면에 장착된 미세한 칼날들이 설하의 가냘픈 살을 파고들며 붉은 피를 토해내게 만들었다. 사슬이 조여들 때마다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좁은 협곡 사이에 울려 퍼졌다.
“흐흐흐, 가문의 원수들을 죽이고 현상금을 챙길 시간이다. 이 장님 놈과 함께 지옥으로 가거라!”
철삼랑이 무자비한 힘으로 사슬을 당겼다. 설하의 신형이 허공으로 붕 뜨며 철삼랑의 묵직한 대도 앞으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완벽한 기동 불능. 설하가 단전의 남은 내력을 쥐어짜 사슬을 풀려 발버둥 쳤으나, 백련정철로 다져진 묵직한 사슬은 삼류의 완력으로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슬이 살점을 더 깊숙이 파고들어 뼈에 닿는 극통만이 더해질 뿐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 철삼랑의 보조 단검이 설하의 목덜미를 향해 소리 없이 투척되는 순간이었다.
크레바스 속 어둠에 잠겨 있던 제갈휘의 먼 눈동자가 미세하게 회전했다. 그의 귀는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질 때 나는 무쇠의 미세한 공명음과, 그 사슬을 타고 전해지는 철삼랑의 내력 파동을 소리 없이 해체하고 있었다.
(설하야, 당기지 마라! 힘으로 맞서면 네 뼈가 먼저 부러질 것이다. 사슬은 무쇠다. 쇠는 천하에서 한기를 가장 정직하고 빠르게 전도하는 매개체지. 검을 놓지 마라. 오히려 검을 움켜쥐고 태음역행(太陰逆行)의 극의를 발휘하거라! 단전의 남은 모든 한기를 검신을 통해 쇠사슬 자체로 주입하는 것이다!)
제갈휘의 다급하면서도 명징한 전음이 설하의 뇌리를 강타했다.
쇠는 한기를 가장 잘 전도한다.
그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물리적 법칙이 설하의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설하는 끌려가는 와중에도 질끈 눈을 감았다. 살이 찢겨 나가는 통증 속에서, 그녀는 단전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태음신맥의 근원적인 냉기를 강제로 깨워 올렸다.
수련할 때마다 오장육부를 얼려버리던 그 저주받은 한기. 설하는 그 한기를 억누르지 않고, 역으로 기경팔맥의 우회 통로를 열어 한빙철검의 자루로 폭발적으로 밀어냈다.
쿠구구구궁!
설하의 전신에서 시린 푸른빛의 진기가 피어올랐다. 그녀의 피부 표면에 순식간에 하얀 서리 결정들이 돋아났고, 눈동자는 완전한 극음의 푸른빛으로 변했다. 한빙철검의 검신이 터질 듯한 청색 빛을 내뿜는 순간, 검신을 옭아매고 있던 쇠사슬을 타고 시린 푸른빛 한기가 번개처럼 철삼랑의 손을 향해 뻗어나갔다.
“이, 이게 무슨……!”
철삼랑이 이상함을 느끼고 사슬을 놓으려 했으나, 이미 늦어 있었다.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사슬을 타고 흐른 극음의 한기는 찰나의 순간에 철삼랑의 손바닥에 닿았다. 밤바람에 젖어 있던 철삼랑의 손바닥 수분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그의 가죽장갑과 살점이 쇠사슬 표면에 접착제처럼 단단히 얼어붙었다. 사슬을 놓고 싶어도 놓을 수 없는 절체절명의 구속이 역으로 적에게 가해진 것이다.
쩌어어억! 쩌적!
극음의 한기를 정면으로 받아들인 쇠사슬의 철 분자들이 극도로 수축하기 시작했다. 팽팽하게 당겨진 인장력과 급격한 동결로 인한 수축이 충돌하자, 백련정철로 만들어진 단단한 사슬이 파르르 떨리며 유리처럼 약해졌다.
(지금이다, 설하야! 단전의 한기를 일시에 폭발시켜 사슬을 튕겨내라!)
“하아아앗!”
설하가 단전에 남아 있던 마지막 9할의 진기를 폭발적으로 방출했다.
챙강! 콰아아앙!
맑고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설하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던 거대한 쇠사슬이 수만 개의 은빛 유리 파편이 되어 허공으로 산산조각 나 흩어졌다. 흩날리는 얼음 파편들이 달빛을 받아 눈부신 은하수처럼 협곡을 수놓았다.
“아아아악!”
동시에 협곡이 찢어질 듯한 철삼랑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쇠사슬이 산산조각 나며 사슬 표면에 얼어붙어 있던 철삼랑의 손바닥 가죽과 살점이 통째로 뜯겨 나간 것이다. 뼈가 하얗게 드러난 그의 양손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무기를 잃고 손이 파괴된 살수는 더 이상 일류의 고수가 아니었다.
설하는 사슬이 풀리자마자 지면을 차고 도약했다. 빙천보의 마지막 기운을 실어, 미끄러지듯 공중을 날아 철삼랑의 머리 위로 하강했다.
검 끝에 서린 시린 푸른빛 검풍이 대각선의 궤적을 그리며 밤하늘을 갈랐다.
한해빙천검의 기초 초식, 한설지풍(寒雪之風)이었다.
스사사사삭!
차가운 서리 검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단 한 방울의 피도 남지 않았다. 철삼랑의 목이 잘려 나가는 순간, 단면이 순식간에 하얗게 얼어붙으며 비명조차 동결되었다. 털썩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그의 머리와 신형이 귀영협의 차가운 돌바닥 위로 쓰러졌다. 주변의 안개는 그들의 시신 위로 서리를 내리며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하아…… 하아……”
철검삼랑 삼형제를 완벽하게 각개격파하고 전투를 승리로 이끈 설하는, 검을 쥔 채 무릎을 꿇었다. 전신의 내력을 극한으로 소모한 부작용으로 그녀의 오장육부가 얼어붙는 듯한 오한이 밀려왔다. 입가로 흘러내린 한 줌의 검은 피가 바닥에 닿자마자 얼음으로 변했다.
스르륵.
설하의 신형이 무너지듯 옆으로 쓰러지려 하자, 크레바스 속에서 기어 나온 제갈휘가 낡은 청죽장을 짚고 다가와 그녀의 가냘픈 어깨를 부축했다. 제갈휘의 귀밑에서도 붉은 피가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었으나, 그의 손길만큼은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잘 버텨냈다, 설하야. 네가 가문의 원수들을 향한 첫걸음을 훌륭하게 내디뎠구나.”
“스승…… 님…… 저, 제가 해냈습니다……”
설하는 제갈휘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의식을 잃어갔다.
제갈휘는 품에 안긴 제자의 차가운 이마를 쓸어내리며, 짙어지는 안개 너머 만황곡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철검삼랑의 몰락은 끝이 아니었다. 이 소식이 철사방 본타에 전해지는 순간, 광기에 휩싸인 방주 조광렬이 만황곡 전체를 학살하기 위해 본진을 이끌고 총진격해 올 터였다.
더 거대하고 잔혹한 파멸의 서막이, 귀영협의 차가운 안개 속에서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