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엽락소축의 눈먼 비장(掃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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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 사사각.


대나무 빗자루가 흙마당을 쓸어내리는 소리는 지극히 단조롭고도 고요했다. 만황곡(萬荒蔘)의 가장 깊고 음침한 골짜기, 바람조차 비껴가는 외딴 대나무 집인 엽락소축(葉落小築)의 가을밤은 유독 길었다.


스물여덟의 청년, 제갈휘(Jegal Hwi)는 허름한 회색 마의를 입은 채 묵묵히 비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때 절은 하얀 붕대로 단단히 가려져 있었고, 그의 손에는 마디가 반질반질하게 닳은 청죽장(靑竹杖)이 들려 있었다.


일반적인 장님이라면 어둠 속에서 발을 헛디디기 십상이었겠지만, 제갈휘의 걸음걸이는 기이할 정도로 거침이 없었다. 빗자루 끝이 마당의 미세한 돌멩이와 스칠 때마다 생기는 미세한 진동이 손끝을 타고 그의 뇌리로 전해졌다.


‘동쪽 서너 보 앞, 평평한 바위 밑에 낙엽이 세 장 더 쌓였군. 북서쪽 대나무 울타리 근처는 이슬이 맺혀 흙이 조금 더 질척해졌어.’


눈먼 사서 제갈휘의 귓가로 미세한 바람의 흐름이 감돌았다. 청풍감각(淸風感覺). 눈을 잃은 대가로 얻은 초감각이 그의 머릿속에 마당의 고저차와 지형을 한 폭의 그림처럼 복원해 내고 있었다. 심장을 맑게 유지하는 청혈심공 1단계(淸血心功)의 운용 덕분이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제갈휘는 빗자루를 멈추고 씁쓸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가슴팍 안쪽, 기혈이 모여들어야 할 단전은 텅 빈 동굴처럼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경맥 폐색(經脈 閉塞).


3년 전, 황실 장서각을 집어삼켰던 그 참혹한 불길 속에서 제갈휘는 모든 무공을 잃었다. 사촌 형제 제갈우(Jegal Woo)의 배신으로 가문은 멸문당했고, 아버님 제갈무진(Jegal Mujin)은 불타는 서고 속에서 무림맹의 자객들을 막아서다 산화했다. 제갈휘 자신은 숙부의 희생으로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매캐한 독회 가루에 눈이 멀고 온몸의 기맥이 검게 타들어 가 폐인이 되었다.


‘복수라…….’


단 한 줌의 진기조차 제어할 수 없는 몸으로 복수를 꿈꾸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그러나 제갈휘는 절망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황실 장서각에 보관되어 있던 천하 모든 비급의 구결과 약점이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갈세가 특유의 비전 기억술, 제갈세가 총명기(聰明記) 덕분이었다.


그때였다.


스산하게 불던 밤바람의 결이 갑작스럽게 뒤틀렸다.


제갈휘의 귀밑 기맥이 파르르 떨렸다. 공기의 온도가 급격히 하강하고 있었다. 단순한 가을밤의 한기가 아니었다. 뼛속까지 시리게 만드는, 인위적이고도 폭력적인 극음(極陰)의 기운이었다.


터벅, 터버벅.


엽락소축의 대나무 울타리 너머로 거칠고 불안정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호흡은 이미 반쯤 끊어져 있었고, 폐부에서 차가운 가래가 끓는 소리가 심안(心眼)에 포착되었다.


쿵!


무거운 신형이 대나무 사리문을 밀치고 마당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이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차가운 한기가 지면의 흙먼지를 순식간에 하얗게 얼려버렸다. 서리가 spiderweb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소리가 제갈휘의 청풍감각에 잡혔다.


“누구냐?”


제갈휘는 청죽장을 가볍게 짚으며 다가갔다. 쓰러진 이는 만황곡 주민들의 허드렛일을 도우며 겨우 연명하던 부엌데기 소녀, 설하(Seol Ha)였다.


그녀의 전신은 오들오들 떨리고 있었고, 입술은 이미 검푸르게 변해 있었다. 가슴팍에서는 지독한 한기가 안개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제갈휘는 본능적으로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오른손 손가락을 뻗어 목덜미의 맥을 짚으려 했다.


지직!


“읏……!”


손가락이 그녀의 살결에 닿기도 전에, 칼날 같은 한기가 제갈휘의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내력이 전혀 없는 그의 육체는 극음의 진기를 견뎌내지 못했다. 오른손 끝이 순식간에 하얗게 동결되며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제갈휘는 급히 손을 뒤로 물리며 숨을 들이쉬었다. 오른손 끝에 가벼운 동상 상흔이 남았다.


‘내력이 전혀 없으니 맨손으로는 기맥을 짚을 수조차 없구나.’


뼈아픈 무력감이 가슴을 찔렀으나, 제갈휘는 이내 이성을 되찾았다. 그는 허리춤에서 마모된 대나무 빗자루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청죽장의 끝을 설하의 전중혈(膻中穴) 부근 옷자락 위에 가볍게 얹었다. 나무의 결을 통해 전해지는 진동을 느끼기 위함이었다.


두근, 두근, 쿠구구궁!


청죽장을 통해 전해지는 설하의 기맥 진동은 가히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와 같았다.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극음의 진기가 정상적인 경맥을 따르지 않고, 갈가리 찢어진 기경팔맥의 우회로를 타고 역류하고 있었다.


‘이 진동은……!’


제갈휘는 즉시 머릿속의 제갈세가 총명기(聰明記)를 기동했다. 가상의 거대한 서고가 그의 뇌리에서 펼쳐졌고, 수만 권의 비급 중 고대 빙가(氷家)의 유실된 전설, ‘한해빙천검(寒海氷天劍)’의 구결과 신체 기록이 담긴 두루마리가 0.1초 만에 인출되었다.


‘태음신맥(太陰神脈)의 폭주다.’


설하는 단순한 부엌데기가 아니었다. 멸망한 고대 빙가의 마지막 직계 핏줄이었던 것이다. 타고난 극음의 신맥을 품고 있었으나, 경맥이 뒤틀려 한기를 제어하지 못하고 체내에서 폭주하고 있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단전과 심장이 통째로 얼어붙어 반 시진도 되지 않아 즉사할 운명이었다.


‘내가 조금의 내력이라도 가질 수 있었다면…….’


제갈휘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기맥 폐색 상태인 자신은 그녀의 체내에 단 한 줌의 진기도 주입해 줄 수 없었다. 지식은 천하를 지배할 경지에 이르렀으나, 당장 눈앞에서 죽어가는 소녀 하나를 구하지 못하는 현실이 그를 옥죄었다.


하지만 제갈휘는 포기하지 않았다. 지략가란 힘이 없을 때 판을 짜는 자다.


‘내력이 없다면, 물리적인 격(擊)과 기류의 유도뿐이다.’


제갈휘는 대나무 빗자루를 양손으로 굳게 잡았다. 그리고 설하의 몸 주변을 빠른 속도로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서리가 내린 지면을 쓸어내며 마당의 기류를 바꾸었다. 대나무 빗자루 끝이 바닥을 긁을 때마다 미세한 마찰열과 공기의 와류가 발생했다.


그는 청풍감각으로 설하의 체온 변화를 실시간으로 추적하며, 한기가 사방으로 발산되는 경로를 강제로 비틀었다.


파아앗!


설하의 가슴팍에서 다시 한번 푸른 한기 서린 검풍이 발출되며 제갈휘를 덮쳐왔다. 제갈휘는 당황하지 않고 청죽장을 가볍게 회전시켰다. 고목수선장의 방어 기예를 응용한 청죽 선풍 흘리기였다. 지팡이 끝이 허공에서 부드러운 호를 그리며 날아오는 한기의 궤적을 옆 바위 쪽으로 비껴내었다. 쾅! 바위 표면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갈라졌다.


“설하야, 내 목소리를 들어라!”


제갈휘는 청죽장의 끝을 설하의 기해혈(氣海穴)에 대고, 그녀의 불규칙한 Respiratory 호흡 주기를 귀로 읽어내기 시작했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소리, 심장의 불규칙한 박동.


제갈휘는 지팡이 끝의 미세한 진동을 설하의 호흡 파동과 완벽히 일치시켰다. 기하학적인 주파수의 동조였다.


“들이쉬고, 세 마디를 참은 뒤, 역맥으로 뿜어내라!”


제갈휘는 청죽장 끝에 신체의 물리적 체중을 실어, 설하의 명문혈(命門穴)과 전중혈을 강하게 타격했다. 내력이 없는 타격이었으나, 정확한 맥점의 자극은 물리적인 충격만으로도 기맥의 흐름을 일시적으로 뒤흔들 수 있었다.


퍽, 퍽!


지팡이 끝이 그녀의 요처를 때릴 때마다, 설하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녀의 입에서 검붉은 얼음 파편 섞인 피가 뿜어져 나왔다. 동시에 전신을 옥죄던 서리 기운이 미세하게 흩어지며, 그녀의 단전에 갇혀 있던 한기가 기경팔맥의 우회 통로를 찾아 흐르기 시작했다.


“하아…… 흑!”


설하가 크게 숨을 들이쉬며 마침내 호흡의 평정을 찾기 시작했다. 전신을 뒤덮었던 하얀 서리가 조금씩 녹아내리며 가느다란 온기가 돌아왔다. 제갈휘의 기하학적 기맥 유도가 그녀의 즉사를 막아낸 것이다.


제갈휘는 청죽장을 거두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전신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고, 청혈심공을 과도하게 운용한 탓에 머리가 깨질 듯한 편두통이 밀려왔다. 관자놀이 부근의 기맥이 요동치며 이명이 귓가를 때렸다.


‘간신히 숨통만 틔워두었을 뿐이다. 본격적인 기맥의 복원을 위해서는 만황곡의 의원인 백노인(Baek No-in)을 불러와야 한다.’


제갈휘가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아내는 찰나.


그의 청풍감각이 엽락소축 외곽 대나무 숲 너머에서 들려오는 불길한 소리를 포착했다.


두두두두!


수십 필의 군마가 흙바닥을 거칠게 내딛는 진동. 철제 등자와 안장이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 그리고 사파 무인 특유의 가볍고 잔인한 파공음들이 엽락소축을 향해 빠른 속도로 좁혀오고 있었다.


‘철사방(Chulsabang)의 순찰대다.’


무림맹의 하부 조직이자 만황곡의 포식자인 철사방의 무사들이 장서각 생존자의 흔적을 찾아 이 외딴 골짜기까지 수색의 그물을 좁혀오고 있었다. 야간 순찰의 횃불 타는 냄새가 밤바람을 타고 제갈휘의 코끝을 스쳤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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