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골목의 추격자
한나의 무기 개조점 문이 거친 기계음을 토해내며 닫히는 순간, 하은성은 품속으로 레벨-3 보안 카드를 깊숙이 밀어 넣었다. 손끝에 닿는 차가운 금속 카드의 촉감이 그의 심장을 무겁게 가라앉혔다. 오리온 성계의 심장부라 불리는 제국 군용 수송선 ‘타이탄 호’를 털어야 하는 자살행위와도 같은 도박. 하지만 관자놀이 소켓에서 느껴지는 만성적인 열기와 언제 꺼질지 모르는 12시간짜리 냉각제 수명은 그에게 다른 선택지를 허락하지 않았다.
가게 밖으로 발을 내딛자, 테네브리스 정거장 하부 구역 특유의 찌푸린 공기가 은성의 폐부를 찔렀다. 천장에 얽힌 에너지 배관에서 흘러내린 독성 응축수가 바닥의 오수 구덩이에 떨어지며 지독한 냄새를 풍겼고, 붉고 보라색의 네온 홀로그램들이 어두운 골목길을 비현실적인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주인님, 후방 50미터 지점에서 다수의 전자기 신호가 급격히 접근 중입니다. 주파수 대조 결과, 블랙독 현상금 사냥꾼 길드의 사설 스캔 신호입니다.”
옆에서 외발 바퀴를 굴리며 따라오던 낡은 범용 로봇 딩고가 다급하게 경고했다. 은성의 미간이 좁아졌다.
“쯧, 벌써 냄새를 맡았군. 한나의 가게에서 울린 징세관 경보 때문인가.”
은성이 가죽 코트 깃을 올리고 붉은 네온사인이 일렁이는 골목 모퉁이를 돌려던 그 순간, 머리 위 허공에서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스스스슥!
벽면의 파이프를 타고 무언가 거대한 그림자가 미끄러지듯 내려앉았다. 붉은색 광기의 눈동자를 번쩍이는 사내, 사냥꾼 슬래셔였다. 신체 개조 부작용으로 뇌가 망가진 살인귀인 그는 양팔에 이식된 날카로운 고주파 살상 칼날을 서로 부딪치며 기괴한 웃음을 흘렸다.
“크헤헤…… 찾았다, 10만 크레딧짜리 데이터 쥐새끼! 네 머리를 가르고 그 맛있는 뇌 신경 칩을 통째로 파내주마!”
동시에 골목 반대편에서 둔중한 유압 실린더 작동음과 함께 거대한 금속 보행음이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붉은빛의 위압적인 강화 외골격 슈트 ‘아레스-04’를 장착한 신예 사냥꾼 카이저가 골목의 유일한 퇴로를 완벽하게 가로막았다. 그의 슈트 어깨 부근에 장착된 대인 미사일 런처가 은성의 가슴을 정확히 조준하고 있었다.
“하은성, 순순히 뇌 소켓을 넘겨라. 저항하면 사지를 분쇄해서 가져가겠다.”
카이저의 헬멧 스피커를 통해 기계적으로 변조된 거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골목 양방향이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은성은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양쪽의 적들을 번갈아 응시했다.
은성은 품속에서 낡은 레이저 권총을 뽑아 들고 카이저의 강화 슈트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파지직!
하지만 탄환은 카이저의 슈트 전면에 전개된 청색 전자기 보호막에 허무하게 부딪쳐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물리적인 화력으로는 저 중장갑 슈트를 뚫을 수 없었다.
“그따위 장난감 총으로 내 아레스를 뚫을 수 있을 것 같으냐!”
카이저가 비웃으며 거대한 강철 주먹을 휘두르며 돌격해 왔다. 동시에 슬래셔 역시 벽을 차고 날아올라 은성의 목덜미를 향해 고주파 칼날을 내리쳤다.
“주인님, 위험합니다!”
딩고가 몸을 던졌다. 낡은 고철 로봇은 은성의 앞을 가로막으며 카이저의 강철 주먹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쾅—!
귀를 찢는 듯한 금속 파쇄음과 함께 딩고의 노란색 외장 장갑판이 처참하게 찌그러졌다. 불꽃을 뿜으며 딩고는 골목 구석의 쓰레기 더미로 처박혔고, 메인 센서의 불빛이 깜빡거리며 기능 정지 상태로 들어갔다.
“딩고!”
은성이 외쳤지만, 슬래셔의 칼날이 이미 그의 코앞까지 들이닥쳐 있었다. 은성은 본능적으로 상체를 뒤로 꺾었으나, 슬래셔의 날카로운 고주파 칼날이 은성의 오른쪽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서걱!
가죽 코트가 찢어지며 붉은 피가 허공으로 튀었다. 뜨거운 통증이 어깨를 타고 전신으로 번졌다. 벽으로 밀려난 은성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사방이 막힌 절체절명의 위기. 뇌 괴사율 경고음이 귓가에서 이명처럼 울려 퍼졌다.
‘여기서 끝인가…….’
은성의 이성이 절망으로 가라앉으려던 그 순간, 그의 관자놀이에 박힌 은색 소켓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뇌리 속 깊은 심연에서, 얼음처럼 차갑고 오만한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한심하구나, 꼬맹아. 고작 저따위 삼류 사냥꾼들의 고철 슈트와 미치광이의 칼날 앞에 목숨을 구걸할 셈이냐? 예란족의 천만 영혼을 품은 그릇이 이토록 나약하다니, 내 군사학적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군.]
뇌 속에 잠들어 있던 예란족 최고의 전략가이자 장군, 알라릭의 영혼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은성의 뇌 신경망 전체를 강제로 점거하듯 파동을 일으켰다.
[내 전술 기억을 네 뉴런에 동기화하겠다. 신체를 내게 맡겨라. 저 거대한 고철 슈트의 관절을 단 5초 안에 해체해 주마!]
우웅—!
은성이 미처 거부하기도 전에, 관자놀이 소켓 주변의 황금빛 신경망 흉터가 목과 쇄골을 타고 기계 문신처럼 번져나갔다. 동시에 그의 왼쪽 눈동자가 완전한 황금빛 양자 에너지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신경 가속(Neural Overdrive) 프로토콜 가동. 동기화율 12% 임계 돌파.]
순간, 은성의 시야를 지배하던 세상이 기이하게 변했다.
사방의 소음이 아스라이 멀어지며 주변의 모든 물리적 시간이 극도로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허공에 튀어 오른 핏방울들이 마치 투명한 유리 구슬처럼 허공에 정지해 있었고, 슬래셔의 비틀린 미소와 카이저의 돌격 궤적이 소수점 단위의 느린 프레임으로 쪼개져 보였다.
알라릭의 목소리가 은성의 운동 신경을 직접 지배하며 속삭였다.
[저 아레스 슈트의 관절 틈새를 봐라. 어깨 장갑판 아래 3센티미터 지점, 나노 동력선이 노출된 사각지대가 보이지? 그리고 저 미치광이의 무릎 관절 유압 실린더의 압력 밸브 위치도.]
은성은 가죽 코트 안감에서 고주파 진동 단검을 뽑아 들었다. 단검의 그립을 쥐는 순간, 초당 수만 번 진동하는 칼날의 미세한 맥동이 은성의 손바닥을 타고 흘렀다.
은성은 움직였다. 느려진 세계 속에서 그의 신체 반사신경은 평소의 500% 가속되어 있었다.
은성은 먼저 허공에서 느리게 하강하던 슬래셔의 품속으로 미끄러지듯 파고들었다. 슬래셔가 경악으로 눈을 크게 뜨는 순간, 은성의 진동 단검이 슬래셔의 무릎 유압 실린더 압력 밸브를 정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푸쉬이익!
압축 가스가 터져 나오며 슬래셔의 다리 기계 의체가 힘없이 꺾였다.
은성은 멈추지 않고 카이저의 거대한 강화 슈트 하부로 도약했다. 카이저가 느린 속도로 주먹을 내지르는 사각지대를 파고든 은성은, 아레스 슈트의 어깨와 가슴 장갑판 사이의 미세한 관절 틈새로 진동 단검을 사정없이 찔러 넣었다.
서걱! 파지직!
고주파 칼날이 슈트 내부의 나노 동력선을 정확히 절단했다. 은성은 그 자리에서 도약하여 카이저의 등 뒤로 회전 비행하며, 슈트의 주 동력 배터리 팩과 연결된 척추 관절 틈새를 포함해 총 5곳의 동력 노드를 연속으로 정밀 격타했다.
시간의 가속이 풀리는 순간, 폭발적인 에너지가 골목을 뒤흔들었다.
퍼어엉!
카이저의 아레스 슈트 내부 회로가 역류하며 기계 불꽃과 함께 폭발했다. 거대한 강화 슈트가 굉음을 내며 바닥으로 쓰러졌고, 슬래셔 역시 꺾인 기계 다리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단 5초 만에 정예 사냥꾼 두 명이 완벽하게 무력화된 것이다.
은성은 거친 숨을 내쉬며 진동 단검을 거두었다. 승리의 전율도 잠시, 그의 눈동자 가장자리에 서려 있던 황금빛 양자 에너지가 거칠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경고: 신경 가속 가동 시간 초과. 중추신경계의 뇌파 오버로드 발생. 좌반신 신경 전도율 급감.]
“아…… 윽!”
극심한 반동이 은성의 육체를 덮쳤다. 왼쪽 팔과 다리의 감각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가더니, 마치 거대한 돌덩이를 매단 것처럼 무거워졌다. 신경 가속 능력을 무리하게 사용한 혹독한 대가였다.
은성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쓰레기 더미로 기어가, 반파되어 스파크를 뿜어내는 딩고를 왼팔로 간신히 안아 들었다. 딩고의 머리 센서가 희미하게 깜빡였다.
“주…… 주인님…… 탈출…… 경로를…….”
“조용히 해, 딩고. 같이 간다.”
은성은 마비되어 가는 왼쪽 다리를 필사적으로 끌며 어두운 골목 끝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골목을 벗어나기도 전에, 그의 다리는 완전히 감각을 잃고 굳어버렸다.
쿵.
은성은 차갑고 축축한 오수로 가득한 슬럼가 바닥 위로 무참히 쓰러졌다.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절망적인 전신 마비 상태가 그를 덮쳤다.
어두운 슬럼가 골목 저편, 축축한 어둠 속에서 기괴한 기계음이 울려 퍼졌다.
철컥. 철컥. 철컥.
강철 발톱이 차가운 바닥을 긁는 소리. 제국 종교재판소가 자랑하는 기계 사냥개 ‘팽’의 붉은 광학 센서가 어둠 속에서 번뜩이며, 은성이 흘린 피와 소켓에서 나오는 양자 전류의 냄새를 맡고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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