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의 붉은 눈
어둠은 무거웠고, 숨결은 짧았다.
지하 사철광산의 가장 깊은 막장이 무너져 내린 폐허 속, 한강우는 수천 근의 사철 흙더미 아래 완전히 매몰되어 있었다. 사방을 에워싼 검은 흙과 무거운 바위 조각들은 그의 온몸을 짓눌렀고, 허파로 스며드는 공기는 일찌감치 고갈되어 가고 있었다. 평범한 무인이라면 이미 갈비뼈가 모두 부러진 채 질식사했을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강우는 눈을 감은 채 심안(心眼)을 유지했다. 그의 심장 주위에는 여전히 핏빛 맹세의 낙인이 붉게 요동치고 있었고, 오른쪽 손목에 감긴 연희의 가느다란 붉은 실은 살가죽을 팽팽하게 죄어오며 그의 정신을 붙잡아 매고 있었다.
‘아직은 죽을 수 없다.’
강우는 단전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차가운 진기를 아주 미세하게 끌어올렸다.
‘무진경(無震勁) 1성, 무진소식(無震소식).’
그는 자신의 기맥을 극도로 압축하여 외부로 흘러나가는 기척을 완벽히 차단했다. 동시에 단전의 진동을 체내 장기들로만 순환시켜, 아주 적은 산소만으로도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가사(假死) 상태와 유사한 경지를 만들어냈다.
이어서 강우는 왼손 손가락 끝을 흙더미 틈새에 살며시 대었다.
‘청철공명결(聽鐵共鳴訣).’
사방에 가득한 사철 원석들의 미세한 울림이 그의 손가락을 타고 심안으로 흘러들었다. 소리가 시각이 되어 머릿속에 어두운 지하의 구조가 입체적으로 그려졌다. 무너진 잔해 중 가장 얇은 지반의 틈새, 지상으로 이어지는 공기구멍의 위치가 청각적 공명을 통해 정확히 포착되었다.
강우는 부러질 듯 비명을 지르는 오른쪽 손목의 통증을 억누르며, 왼손 끝에 무진경의 미세한 침투 진동을 실었다.
스으으윽.
단단하게 엉겨 붙어 있던 사철 흙더미가 내경의 진동에 결속력을 잃고 모래알처럼 스르륵 흘러내렸다. 강우는 그 틈을 타 벌레처럼 기어오르며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대지의 무덤을 뚫고 위로 나아갔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사방이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긴 깊은 밤, 철공소 구석의 무너진 갱도 입구 흙더미가 미세하게 들썩이더니 먼지투성이가 된 사내가 소리 없이 기어 나왔다.
강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밤샘 노동의 매연과 쇳가루가 가득한 추풍 철공소의 공기는 여전히 무겁고 비릿했지만, 살아 돌아왔다는 실감이 그의 전신을 감쌌다. 그는 절뚝이는 다리를 이끌고 은밀히 자신의 오두막으로 향했다.
오두막 바닥의 흙구덩이는 다행히 지진의 여파 속에서도 크게 훼손되지 않은 채 짚단과 숯가루로 위장되어 있었다. 강우는 바닥을 살며시 파헤쳐, 두꺼운 삼베천과 쇠사슬에 감긴 신검 적소도(赤霄刀)가 그 자리에 안전하게 매립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찢어진 장포 자락을 뜯어내어 시퍼렇게 부어오른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단단히 동여맸다. 수천 근의 바위를 맨손으로 받쳐 낸 대가는 혹독했다. 뼈마디가 어긋나고 미세한 균열이 가 가벼운 움직임에도 골절의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단 한 마디의 신음도 내지 않았다. 타인 앞에서는 목소리를 내지 않는 벙어리 잡역부 ‘아광’의 가면을 철저히 유지해야만 복수의 칼날을 온전히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 * *
다음 날 아침, 추풍 철공소는 폭풍이 몰아친 듯한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갱도가 완전히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마동포와 소철, 칠성이를 비롯한 수십 명의 인부들이 상처 하나 없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사건은 대장간 내부를 발칵 뒤집어놓기에 충분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수천 근의 바위가 무너져 내렸는데, 놈들이 제 발로 걸어 나왔다고?”
가죽 안대를 찬 애꾸눈의 감독관 독안귀가 연무장 한가운데서 사병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그의 얼굴은 조필성의 진노를 사게 될 것이라는 극도의 공포로 잔뜩 뒤틀려 있었다.
“예, 예! 감독관님! 인부 놈들의 말로는…… 붕괴 직전 거대한 신장(神將) 같은 괴력을 지닌 자가 나타나 무너지는 바위를 맨손으로 받쳐 들고 길을 열어주었다고 합니다!”
“개소리 마라! 이 철공소 내부에 그딴 괴력을 지닌 절정 고수가 어디 있단 말이냐!”
독안귀가 헐떡이며 채찍을 바닥에 내리쳤다. 그때, 연무장 입구의 거대한 목조 성문이 쿵 하고 열리며 묵직한 발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비릿한 피비린내와 차가운 쇳가루 냄새가 연무장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사방에서 웅성거리던 사병들과 인부들이 일순간 숨을 죽였다.
성문을 통해 걸어 들어온 사내는 우람한 거구에 붉은 가죽 옷을 걸치고 있었고, 그의 오른쪽 어깨에는 사람 머리통 세 개 크기의 가시 돋친 검은 철퇴, 파천추(破天錘)가 쇠사슬에 묶인 채 얹혀 있었다. 조필성의 오른팔이자 철공소 내부의 모든 무력과 규율을 담당하는 심복 행동대장, 뇌풍(雷風)이었다.
뇌풍의 뺨에 무성하게 자란 검은 수염 사이로 흉포한 안광이 번뜩였다. 그는 무거운 파천추를 바닥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그 충격만으로도 연무장의 단단한 돌바닥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가며 둔탁한 진동이 퍼져 나갔.
“독안귀.”
뇌풍의 목소리는 쇠 긁는 소리처럼 낮고 거칠었다.
“소, 소장님! 어찌 이 비천한 곳까지 직접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독안귀가 허리를 급격히 굽히며 비굴한 미소를 지었다. 뇌풍은 독안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무너진 지하 광산 입구 쪽을 매서운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소주(조필성)께서 한철 병기 납품 지연을 크게 노여워하고 계신다. 그런데 광산이 무너진 와중에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지?”
“그, 그것이…… 인부 놈들이 헛것을 본 모양입니다. 대지진의 여파로 바위가 쪼개진 것을 두고 괴력을 지닌 고수가 구해주었다며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유언비어라고?”
뇌풍이 비웃음을 흘렸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 무너진 갱도 입구 앞에 굴러떨어져 있는 거대한 바위 파편 하나를 발로 툭 찼다.
그는 허리를 숙여 쪼개진 바위의 단면을 거친 손가락으로 쓸어내렸다. 단면은 칼로 벤 듯 예리하지 않았지만, 돌결을 따라 미세한 진동의 흔적이 파동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자연적인 지진이나 낙하로 깨진 단면이 아니었다. 강력한 내경(內勁)이 바위 내부 깊숙이 침투하여 안에서부터 결을 사정없이 뒤흔들어 터뜨린 흔적, 즉 무진경의 독특한 침투 내경 흔적이었다.
뇌풍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위 내부의 결이 완전히 바스러져 있군. 이건 단순한 지진의 흔적이 아니다. 겉가죽은 상하지 않게 하면서 내력을 내부로 관통시키는 극도로 정교한 침투 내경의 솜씨야. 이 철공소 내부에…… 십삼세가의 눈을 피해 숨어든 절정 고수가 있다.”
독안귀의 애꾸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 천한 노예 놈들 중에 그런 고수가 숨어 있다니요?”
“입 닥쳐라, 무능한 놈.”
뇌풍이 파천추의 쇠사슬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조태양 공자의 단전을 파괴한 놈도, 이 바위를 깨부수고 인부들을 탈출시킨 놈도 동일 인물임이 분명하다. 놈은 정체를 숨긴 채 이 안에서 쥐새끼처럼 쇠를 두드리고 있어.”
뇌풍이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 나와 우렁찬 목소리로 사병들에게 소리쳤다.
“당장 철공소 내의 모든 인부와 대장장이들을 연무장 마당으로 집합시켜라! 단 한 명이라도 빠지거나 도망치는 자가 있다면 그 자리에서 사지를 찢어 죽이겠다!”
* * *
태양은 매연 가득한 하늘 뒤로 숨어 핏빛처럼 붉은 빛을 연무장 마당에 뿌리고 있었다.
수백 명의 인부들과 대장장이들이 삼엄한 사병들의 창날에 둘러싸인 채 연무장 흙바닥에 늘어섰다. 마동포와 소철, 칠성이 역시 맨 앞줄에서 몸을 사르르 떨며 서 있었고, 강우는 그들의 뒤편에 벙어리 아광의 해진 회색 장포를 깊게 눌러쓴 채 묵묵히 서 있었다.
강우는 흐릿한 시야 너머로 뇌풍의 무시무시한 기세를 살폈다. 뇌풍이 뿜어내는 일류 무인의 기맥은 차가운 쇳소리와 거친 흙먼지를 동반하고 있었다.
‘의심을 품었군.’
강우는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무진경의 흔적을 단번에 알아챈 것을 보니, 뇌풍 역시 단순한 무력파가 아닌 실전 경험이 풍부한 강자였다. 만약 정체가 탄로 난다면, 아직 손목 부상이 완치되지 않았고 적소도를 뽑을 수도 없는 현재 상황에서 수백 명의 사병들과 일류 고수인 뇌풍을 정면으로 상대하는 것은 극도로 위험했다.
뇌풍이 천천히 인부들의 대열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붉은 진기가 서서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금부터 내 직접 너희 놈들의 기혈을 검사하겠다. 단전의 내력을 조금이라도 숨기거나, 내 기운에 저항하려는 기색이 보인다면 즉시 그 자리에서 단전을 파괴하고 광산 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뇌풍이 첫 번째 인부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거친 손으로 인부의 손목을 꽉 잡아채더니, 자신의 포악한 벽력 진기(霹靂眞氣)를 강제로 주입했다.
“으아아악!”
인부가 비명을 지르며 흙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내력이 없는 평범한 인부였기에, 강압적인 진기 주입의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기혈이 뒤틀려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었다. 뇌풍은 가차 없이 손을 놓고 다음 인부에게로 향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연무장 마당은 순식간에 인부들의 비명과 신음 소리로 가득 찼다. 독안귀는 그 옆에서 채찍을 만지작거리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인부들의 표정을 하나하나 감시하고 있었다.
마동포의 차례가 왔다. 뇌풍이 마동포의 두꺼운 손목을 움켜쥐었다. 마동포는 이 어금니를 깨물며 고통을 참아냈고, 뇌풍은 그의 맥을 짚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가벼운 외문 기공의 흔적뿐이군. 뼈만 굵은 돼지새끼에 불과해.”
뇌풍은 마동포를 거칠게 밀쳐내고, 마침내 그 뒤에 서 있던 벙어리 아광, 한강우의 앞에 멈춰 섰다.
주변의 공기가 일순간 얼어붙는 듯한 기묘한 침묵이 연무장에 흘렀다. 마동포와 소철은 마른침을 삼키며 강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고, 독안귀는 아광의 비정상적인 맷집을 기억해 내고는 뇌풍의 귀에 대고 나지막이 소곤거렸다.
“소장님, 저 벙어리 놈을 유심히 보십시오. 어제 제 채찍을 맨몸으로 받아내고도 뼈 하나 부러지지 않은 기이한 통뼈 놈입니다.”
뇌풍의 예리한 눈동자가 강우의 해진 장포 자락과 흙먼지 묻은 얼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강우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전신에 힘을 빼고 벙어리 천치 아광의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폭풍 같은 기맥 조율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진경 1성, 무진소식.’
그는 단전 깊은 곳에 존재하는 모든 진기를 가느다란 실타래처럼 압축하여 뼈 속 가장 깊은 골수 속에 숨겼다. 그리고 자신의 경맥 흐름을 강제로 뒤틀어, 마치 과거에 무공을 배우려다 기혈이 완전히 망가져 폐인이 된 일반 잡역부의 기형적인 맥박처럼 변조했다.
뇌풍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의 거대하고 단단한 손가락이 강우의 부어오른 오른쪽 손목을 꽉 잡아챘다.
앗-!
손목의 미세 균열 부위에 뇌풍의 엄청난 악력이 가해지자, 뼈가 깎여 나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강우의 뇌리를 강타했다. 전신에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심장 속 혈약의 낙인이 요동치려 했다. 무진경의 방어 본능이 작동해 반탄진기(反彈眞氣)를 방출하려는 찰나, 강우는 어금니가 부러질 정도로 깨물며 내력을 억지로 억눌렀. 여기서 조금이라도 내력의 반응을 보인다면 즉시 정체가 탄로 나고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터였다.
뇌풍은 강우의 손목을 움켜쥔 채, 자신의 포악하고 뜨거운 벽력 진기 한 줄기를 강우의 기맥 안으로 강제로 주입했다.
치이익!
마치 불에 달군 쇠꼬챙이가 경맥을 타고 파고드는 듯한 지독한 화독의 고통이 강우의 전신을 휘감았다. 강우는 비명을 지르는 대신, 벙어리 행세를 유지하며 입을 벌린 채 가쁜 숨만 헉헉 내쉬었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흐려졌고, 입가에서는 침과 함께 검은 핏방울이 한 방울 툭 떨어졌다.
뇌풍은 강우의 기맥 내부를 탐지하려 했으나, 흘러들어간 진기는 오직 꼬이고 뒤틀린 잡역부의 거친 맥박에 부딪쳐 사방으로 허무하게 흩어질 뿐이었다. 내력의 저항이나 고수의 반탄력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뇌풍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기혈이 완전히 뒤틀려 망가진 천치로군. 내공의 흔적은 전혀 없다.”
뇌풍이 손을 놓으려던 찰나였다.
그의 거친 손가락 끝에 강우의 손목 뼈 피부 아래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이질감이 걸렸다. 일반적인 잡역부의 거친 굳은살과는 다른, 뼈 내부에서 발생한 정교한 물리적 충격의 흔적—바로 수천 근의 바위를 받쳐 들며 뼈에 새겨진 미세한 균열의 흔적과 기형적인 부종이었다.
뇌풍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그는 강우의 오른쪽 손목을 다시 한번 강하게 잡아채며, 장포 소매를 거칠게 걷어 올렸다. 흙먼지와 땀으로 범벅이 된 강우의 손목 뼈가 드러났고, 그 주변은 시퍼렇게 피멍이 든 채 부어올라 있었다.
뇌풍의 매서운 눈동자가 붉게 충혈된 채 강우의 얼굴을 향해 천천히 올라왔다.
“이 손목의 부상은 무엇이냐?”
뇌풍의 낮고 위압적인 목소리가 강우의 귓전을 때렸다. 강우는 초점 없는 눈으로 뇌풍을 바라보며, 벙어리 아광의 멍청한 미소를 지은 채 그저 고개만 좌우로 흔들었다.
뇌풍의 의심이 서린 붉은 눈동자가 강우의 깊고 형형한 눈빛 속으로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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