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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어둠, 지하의 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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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푸르스름한 어둠이 추풍곡의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채 스며들기도 전에, 대지는 이미 매캐한 석탄 매연과 비린내 나는 쇳가루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장 대인의 약방에서 밤새 기혈을 진정시킨 한강우는 다시금 말수 적고 미천한 벙어리 잡역부 ‘아광’의 누더기를 걸친 채 철공소 한구석에 서 있었다. 소철의 기민한 길잡이 덕분에 조필성의 심복인 뇌풍의 이중 감시망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복귀한 것은 동틀 무렵이었다.


약방에서 장 대인이 시술한 백호침의 차가운 한기와 설산삼즙의 서늘한 약력이 여전히 단전 깊은 곳에 남아 폭주하던 심장의 열독을 단단히 억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오른손목의 미세한 균열은 곡괭이를 쥘 때마다 뼈가 시리는 통증을 유발했다. 강우는 조용히 소매를 걷어올려 제 손목을 바라보았다. 거친 삼베옷 아래, 연희가 밤새 제 눈물을 훔치며 묶어주었던 가느다란 붉은 실이 살갗에 선명하게 감겨 있었다. 복수가 끝난 후, 피비린내 나는 검을 버리고 반드시 평범한 대장장이로 돌아가겠다던 약속의 징표. 그 붉은 온기가 살갗을 스칠 때마다 강우의 가슴속 불타는 용광로 같은 복수심은 오히려 차갑고 단단한 강철로 제련되어 갔다.


“야! 거기 어리버리하게 서 있는 벙어리 새끼, 당장 움직이지 못해?”


귀를 찢는 듯한 호통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자욱한 대장간 마당으로 가죽 안대를 찬 애꾸눈의 감독관, 독안귀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독물이 시퍼렇게 발린 가시 채찍, 적사편이 뱀처럼 비틀거리며 들려 있었다. 어제 강우의 기지 넘치는 오수 투척 사건 때문에 아광을 그저 통뼈를 가진 미련한 노예일 뿐이라 치부했던 독안귀였지만, 조태양의 단전 파쇄 사건 이후 광산주 조필성의 광기 어린 불호령을 받아 그의 안색은 극도로 초조하고 흉포해져 있었다.


“오늘 무림맹에 바칠 사철(砂鐵) 제련 납품량이 모자라면 네놈들의 가죽을 벗겨 용광로의 불씨로 던져버리겠다고 소주께서 엄포를 놓으셨다! 밥벌레 같은 놈들, 꾀부릴 생각 말고 당장 지하 사철광산 막장으로 기어 들어가!”


독안귀의 매서운 채찍 끝이 허공을 가르며 파공음을 내자, 공포에 질린 인부들이 허리를 굽히고 지하 갱도를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강우 역시 묵묵히 흙먼지 묻은 곡괭이를 어깨에 메고 그들의 뒤를 따랐. 벙어리 아광의 위장을 유지하기 위해 침묵을 지키는 그의 눈빛은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하 사철광산은 추풍곡 대지 아래로 끝없이 뻗어 있는 지옥의 아가리와 같았다. 갱도 깊숙이 들어설수록 축축한 습기와 유독한 유황 가스가 폐부를 찔렀고, 천장에서는 끊임없이 검은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사방에 널린 검은 모래인 추풍 사철은 불순물이 많아 정제하기가 극도로 까다로웠지만, 조필성의 착취 아래 민초들은 발목에 쇠사슬을 찬 채 밤낮없이 곡괭이질을 해대고 있었다. 등불마저 희미하게 타오르는 어두운 막장 안은 쇳가루 안개로 가득 차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강우는 어두운 갱도 벽면에 거친 손바닥을 가만히 얹었다. 겉보기에는 가혹한 노동에 지쳐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 미천한 잡역부의 모습이었으나,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가문 비전의 심법이 은밀하게 구동되고 있었다.


‘청철공명결(聽鐵共鳴訣).’


눈을 감자, 사방의 소음이 일순간 소멸하고 대지 아래 흐르는 쇠붙이들의 미세한 울림이 강우의 손끝을 타고 심안(心眼)으로 흘러들었다. 바위틈 사이에 촘촘히 박힌 추풍 사철맥이 내뿜는 파동은 평소의 묵직한 울림이 아니었다. 쩍쩍 갈라지는 듯한 날카롭고 불안정한 진동, 그것은 거대한 바위들이 서로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짓눌리며 대지가 지르는 비명 소리였다. 수만 근의 낙석을 지탱하고 있는 지하 광산의 지반 기둥들이 이미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대지진의 전조였다. 조만간 이 거대한 지하 미로 전체가 주저앉아 인부들을 통째로 생매장할 터였다.


‘시간이 없다. 지반이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이 사람들을 대피시켜야 한다.’


강우는 곡괭이를 잡은 손가락에 강한 힘을 주었다. 벙어리 행세를 해야 하기에 소리 높여 경고할 수는 없었으나, 이대로 무고한 민초들이 조필성의 탐욕 때문에 개돼지처럼 깔려 죽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강우는 사철 정제 작업을 하던 우직한 장사 마동포와 소철의 곁으로 은밀히 다가갔다.


강우는 쇳가루가 잔뜩 묻은 손가락으로 마동포의 투박한 손바닥 위에 빠르게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


[지반 붕괴 임박. 대지진. 인부들을 데리고 은밀히 탈출로로 이동하라.]


마동포의 두 눈이 일순간 경악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는 어젯밤 조태양의 단전을 파괴했던 아광의 압도적인 무력을 목격했기에, 아광의 이 기이한 경고를 결코 허투루 들을 수 없었다. 마동포는 침을 꿀꺽 삼키며 강우를 향해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즉시 소철에게 눈빛을 보냈고, 눈치 빠른 고아 소년 소철은 인부들 사이를 민첩하게 누비며 은밀히 속삭였다.


“어이, 형씨들. 오늘 지하 기류가 심상치 않아. 저기 위쪽 벽면에서 흙가루가 계속 떨어지는 거 안 보여? 목숨 아까우면 서서히 연장 챙겨서 입구 쪽으로 슬슬 움직이자고.”


소철의 영악한 선동에 인부들이 동요하며 슬금슬금 곡괭이를 거두고 갱도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비정상적인 움직임은 갱도 위쪽 목조 발판 위에서 채찍을 만지작거리던 독안귀의 애꾸눈을 피할 수 없었다.


“이 개돼지 같은 노예 놈들이 지금 뭐 하는 짓거리냐!”


독안귀가 고함을 지르며 발판 아래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의 흉측한 얼굴이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소주님의 납품 명령이 떨어졌는데 감히 작업을 멈추고 도망치려 해? 이 천한 놈들이 배가 불러서 집단으로 태업이라도 모의하는 것이냐!”


독안귀는 가시 채찍 적사편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휙, 공기를 가르는 매서운 파공음과 함께 붉은 독기가 서린 채찍 끝이 인부들을 대피시키려 앞장서던 소철의 등덜미를 향해 내리쳤다. 그대로 맞으면 소년의 가냘픈 척추가 단숨에 부러질 일격이었다.


그 순간, 벙어리 아광의 신형이 바람처럼 움직였다. 강우는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척 몸을 던져 소철의 앞을 가로막았다.


찰싹-!


독안귀의 가시 채찍이 강우의 허벅지와 종아리를 사정없이 휘감았다. 가시 끝에 발린 화독이 바지를 찢고 살가죽을 파고들려 했다. 독안귀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채찍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삼류 사파 무인의 묵직한 인장력을 실어, 강우의 몸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다리뼈를 으스러뜨리려는 속셈이었다.


하지만 채찍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순간, 독안귀의 미소는 경악으로 굳어졌다.


‘천근추 강골법(千斤墜 強骨法).’


강우는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구결을 외우며 단전의 진기를 발끝으로 내리눌렀다. 그의 두 발이 사철 진흙바닥 깊숙이 박히며, 전신이 수천 근의 거대한 무쇠 기둥처럼 단단하게 고정되었다. 독안귀가 온 힘을 다해 채찍을 당겼음에도, 강우의 신형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제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오히려 강한 인장력의 반동으로 인해 독안귀의 몸이 앞으로 쏠리며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이, 이 벙어리 새끼가……?”


독안귀의 애꾸눈에 깊은 당혹감과 함께 서늘한 의심의 안광이 번뜩였다. 아무리 통뼈를 지닌 잡역부라 한들, 자신의 절정 내력이 실린 채찍 인장력을 맨몸으로 버텨내고 오히려 반동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어젯밤 조태양 공자의 단전을 파괴한 그 정체불명의 고수가 바로 이 벙어리 아광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독안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네놈, 정체가 뭐냐? 그 멍청한 얼굴 뒤에 어떤 무공을 숨기고 있는 거지?”


독안귀는 가시 채찍을 고쳐 쥐며 사병들을 향해 소리쳤다.


“사병들은 들어라! 이 기괴한 벙어리 놈이 인부들을 선동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당장 이놈을 제압해 지하 가장 깊은 막장 철창에 가두어라! 그리고 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막아 한 걸음도 나오지 못하게 해라!”


수십 명의 사병들이 쇠창을 겨누며 강우를 포위해 왔다. 강우는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과 쇠사슬에 묶인 적소도만으로는 이 좁은 공간에서 사병들을 살상하지 않고 제압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여기서 큰 싸움을 벌여 시간을 지체하면,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인부들의 탈출로가 완전히 차단될 터였다.


강우는 스스로 감금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반항하지 않고 비틀거리며 사병들의 손에 이끌려 어둡고 축축한 막장 철창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철창문이 쿵 소리를 내며 닫히고 거대한 자물쇠가 채워졌다. 독안귀는 사병들을 시켜 철창 입구에 수천 근에 달하는 사철 바위들을 겹겹이 쌓아 올려 퇴로를 완벽히 차단해 버렸다.


“거기서 굶어 죽어라, 이 수상한 벙어리 놈아.”


독안귀의 비열한 목소리가 멀어지고, 지하 광산의 가장 깊고 어두운 막장에는 오직 칠흑 같은 어둠과 강우의 고요한 호흡 소리만이 남았다.


그 순간이었다.


강우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뒤틀린 내력을 정비하려는 찰나, 막장 천장 너머 대지 깊은 곳에서부터 쿠구구구…… 하는 불길하고 거대한 노호 소리가 대기를 흔들기 시작했다. 천장을 지탱하던 거대한 암반이 쩍쩍 갈라지는 불길한 파열음이 귓가를 때렸고, 어둠 속에서 묵직한 검은 사철 먼지 비가 강우의 창백한 뺨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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