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경맥과 약방의 붉은 실
독안귀의 코가 강우가 적소도를 묻어둔 흙바닥에 닿기 직전이었다. 킁킁거리는 비틀린 콧구멍 사이로 흙먼지가 빨려 들어가고, 가죽 안대 너머의 애꾸눈이 흙바닥의 미세한 틈새를 뱀처럼 파고들었다. 바닥에 깔린 검은 숯가루와 짚단 아래, 쇠사슬이 머금은 비린 녹취(鏽臭)가 독안귀의 예민한 사파적 감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흙을 파헤친다면 삼베천에 칭칭 감긴 적소도의 도신과 스승의 호신 철패가 백일하에 드러날 터였다.
강우는 단전 깊은 곳의 진기를 순간적으로 뒤틀었다. 벙어리 아광의 무방비하고 어설픈 육체에 억지로 통증을 유발하는 자해에 가까운 기맥 조율이었다.
“끄, 끄으으……!”
강우는 목구멍 밖으로 찢어지는 듯한 신음 소리를 내며, 일부러 다리를 헛디뎌 앞으로 무참하게 쓰러졌다. 그가 쓰러지면서 침상 옆에 놓여 있던 낡은 나무 대야를 걷어찼다. 대야 안에 가득 담겨 있던, 석탄재와 시꺼먼 그을음이 뒤섞인 폐수가 독안귀의 머리와 어깨 위로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철퍼덕!
“커헉! 이, 이 더러운 벙어리 새끼가!”
독안귀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그의 얼굴과 가죽 안대, 옷자락이 시꺼먼 석탄 폐수로 엉망진창이 되었다.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가던 흙냄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사방에 지독한 석탄재의 매캐한 탄내와 구정물 냄새가 진동했다.
강우는 바닥을 뒹굴며 온몸에 흙과 오수를 묻힌 채, 이빨을 부르르 떨며 독안귀의 발밑을 기어 다니는 시늉을 했다. 머리를 땅에 찧으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또 비는 벙어리의 처절한 몸짓이었다. 침상 밑에 숨은 소철은 제 손가락을 깨물며 비명을 참아내고 있었다.
“에이, 퉤! 더러운 벙어리 놈 때문에 코를 버렸군!”
독안귀가 침을 뱉으며 얼굴을 소매로 닦아냈다. 탄내와 구정물 냄새가 온 방안을 뒤덮어 더 이상 미세한 무쇠의 냄새를 맡는 것은 불가능했다. 게다가 아광이라는 벙어리는 제 한 몸 가누지 못해 오수를 쏟아붓는 천치에 불과해 보였다. 독안귀는 강우의 엉덩이를 가죽 장화로 거칠게 걷어찼다.
“이딴 밥벌레 놈의 움막에 고수가 숨어있을 리가 없지. 야, 당장 나가서 도구 창고 쪽을 이중으로 포위해라! 진짜 쥐새끼는 그쪽에 있다!”
독안귀가 소리를 지르며 오두막을 빠져나갔다. 사병들의 거친 발소리가 멀어지고 마침내 오두막에 고요가 찾아왔을 때, 강우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입가에는 멍청한 미소 대신, 서늘하기 이를 데 없는 차가운 침묵이 서려 있었다.
“우욱……!”
갑자기 강우의 가슴이 크게 들썩이더니, 목구멍을 타고 검붉은 핏덩이가 쏟아져 나왔. 흙바닥에 떨어진 피는 맑지 않고 검게 응고되어 있었다.
어젯밤 조태양의 단전을 파괴할 때 도집을 타고 역류했던 강력한 벽력 진기, 그리고 원수를 눈앞에 두고도 검을 뽑지 못해 스스로 심장을 옭아매었던 ‘혈약의 제약’이 가져다준 혹독한 대가였다. 심장 주위의 기맥이 마치 불에 달군 쇠사슬로 묶인 듯 뒤틀리며 뼈 속 깊은 곳까지 타들어 가는 고통이 밀려왔다. 오른손목은 이미 시퍼렇게 부어올라 손가락 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었다.
침상 밑에서 소철이 기어 나왔다. 소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형, 형님! 피를…… 어떡해요, 의원에게 가야 해요!”
강우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소철의 어깨를 왼손으로 지긋이 눌렀.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벙어리 행세였기에, 그는 눈빛으로만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소철은 물러서지 않았다. 소년은 강우의 손목에 남은 시퍼런 균열의 흔적과 불타오르는 듯한 기혈의 폭주를 직감하고 있었다.
“내가 알아요. 추풍곡 동쪽 절벽 너머,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대나무 숲속에 장 의원님의 약방이 있어요. 감시자들의 교대 시간인 야간 순찰 틈새를 이용하면 은밀히 빠져나갈 수 있어요. 내가 길을 안내할게요.”
강우는 들이쉬는 숨마다 폐부가 찢어지는 고통을 느끼며 나지막이 눈을 감았다. 더 이상 내력을 억누르는 것만으로는 한계였다. 심장의 화독을 다스리지 못하면, 복수를 시작하기도 전에 경맥이 파열되어 고사할 터였다. 그는 침묵으로 소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 *
깊은 밤, 추풍곡의 경비망은 조태양의 부상으로 인해 평소보다 삼엄했으나, 평생을 잡역부로 살아온 소철의 눈치와 지형지물 이용력은 그 감시망을 비웃듯 정교했다. 소철은 야간 경비원 돌쇠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찰나를 정확히 포착하여 강우를 이끌고 협곡의 은밀한 배수로를 통과했다.
바람이 대나무 숲을 흔들며 서늘한 소리를 내는 협곡 외곽, 짙은 약초 향기가 흙바닥의 매연을 지워버리는 곳에 초라한 목조 가옥 한 채가 숨어 있었다. 장 의원의 약방이었다.
“장 의원님! 의원님! 문 좀 열어주세요!”
소철이 다급하게 사리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며 하얀 수염이 가슴까지 내려오는 인자한 인상의 노인, 장 대인이 등불을 든 채 나타났다. 그의 곁에는 약방의 침술 조수인 처자 가람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 있었다.
“소철이 너로구나. 이 밤중에 무슨 일…… 아니, 이 자는!”
장 대인의 시선이 소철의 어깨에 기대어 숨을 헐떡이는 강우에게 닿았다. 강우의 얼굴은 이미 핏기가 완전히 사라진 채 창백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입가에는 끊임없이 검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서 안으로 들여라! 가람아, 빙백신침(氷魄神針)과 빙한수를 준비해라!”
장 대인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강우는 약방 안쪽의 어두운 밀실 침상에 뉘어졌다. 장 대인은 즉시 강우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순간, 늙은 의원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이, 이건…… 단순한 주화입마가 아니다. 기혈이 스스로를 갉아먹고 있어! 심장 주위의 경맥이 불길에 달구어진 쇠사슬처럼 뒤틀려 기맥의 흐름을 완전히 막아서고 있구나. 대체 어떤 무공을 익혔기에 육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버틴 것이냐?”
강우는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그의 단전에서는 억눌린 붉은 진기가 역류하며 심장을 향해 불꽃처럼 치솟고 있었다. 혈약의 제약을 어기려 할 때마다 심장이 타들어 가는 통증이 육체를 극한으로 몰아세우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가람아, 백호침(白虎針)을 이리 내라!”
장 대인은 천년한철을 깎아 만든 극도로 차갑고 날카로운 은침, 백호침을 집어 들었다. 장씨 가문 비전의 ‘장씨 기맥 조율술’이 장 대인의 손끝에서 전개되었다.
스으윽!
장 대인의 손놀림은 전광석화 같았다. 차가운 한기를 머금은 백호침이 강우의 가슴 정중앙의 단중혈(膻中穴)과 심장 주위의 대혈들을 정밀하게 관통했다. 침이 혈도에 닿는 순간, 강우의 전신이 눈바람을 맞은 듯 부르르 떨렸다.
“끄아아아윽……!”
강우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극독의 열독이 끓어오르던 심장에 천년한철의 극음(極陰)의 한기가 침투해 들어오자, 체내에서 뜨거운 진기와 차가운 기운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뼈 속 깊은 곳까지 얼어붙는 듯한 고통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버텨야 한다! 이 고비를 넘기지 못하면 네놈의 심장은 스스로 파열될 것이다!”
장 대인은 이마에 땀방울을 흘리며 침을 더욱 깊숙이 밀어 넣었다. 가람은 다급히 달여온 차가운 성질의 비전 영약, 설산삼즙(雪山삼즙)을 그릇에 담아왔다.
“도련님, 약을 드셔야 합니다!”
장 대인이 강우의 턱을 벌리고 설산삼즙을 흘려 넣었다. 서촉 설산의 만년 적설 속에서 자라난 삼의 정수를 담은 약즙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자, 불타오르던 강우의 오장육부에 서늘한 봄비 같은 생명력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뒤틀렸던 기혈의 파동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으며, 폭주하던 심장의 화독이 눈 녹듯 가라앉았다.
반나절에 걸친 사투 끝에 강우의 거친 호흡이 마침내 안정을 찾았다. 장 대인은 침을 조심스럽게 뽑아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급한 불은 껐다만…… 이건 근본적인 치료가 아니다. 네놈의 심장에 걸린 그 보이지 않는 속박을 완전히 깨뜨리지 않는 한, 무공을 펼칠 때마다 이 고통은 더 무겁게 네 육체를 짓누를 것이다.”
강우는 흐릿해진 시야를 간신히 정리하며 장 대인을 바라보았다. 고마움의 뜻을 담아 고개를 가볍게 숙이려던 순간, 약방 밀실 깊은 곳에 가려져 있던 삼베 커튼이 조용히 걷히며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수한 삼베옷을 입고 있었으나, 물빛처럼 투명하고 수려한 미모를 지닌 처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가냘픈 손가락 곳곳에는 불꽃에 그을린 상흔과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여인의 시선이 강우의 등 뒤, 침상 옆에 놓인 삼베와 쇠사슬로 칭칭 감긴 거대한 도검에 닿았다. 여인의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흔들리며, 눈물 한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적소도(赤霄刀)…….”
여인은 떨리는 발걸음으로 강우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 강우의 등 뒤에 감긴 적소도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쇠사슬 너머로 전해지는 붉은 녹의 질감을 느끼는 그녀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도련님…… 정말 도련님이 맞으시군요. 한양 한씨세가의 마지막 후계자, 강우 도련님…….”
강우의 눈빛이 일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아는 자는 이 추풍곡에 존재하지 않아야 했다. 하지만 여인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강우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5년 전 불타오르던 가문의 폐허 속에서 자신을 지켜주던 충직한 대장장이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
“연…… 희?”
강우의 목구멍에서 쇳소리 섞인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벙어리 아광이 아닌, 한양 한씨세가의 후계자 한강우로서 내뱉은 최초의 진짜 목소리였다.
“예, 도련님. 가문의 대장장이였던 아버님의 뒤를 이어 살아남은 연희옵니다. 도련님이 이 척박한 추풍곡에 숨어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연희는 강우의 시퍼렇게 부어오른 오른쪽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손가락 끝으로 뼈의 미세한 균열을 짚어내던 그녀의 얼굴에 깊은 슬픔과 단호함이 교차했다.
“도집치기의 강력한 반동이 도련님의 뼈와 경맥을 스스로 파괴하고 있어요. 칼을 뽑지 못하는 제약 속에서 그 무거운 도검의 충격을 맨손으로 감당하는 것은 자살행위와 다름없습니다.”
연희는 강우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나지막하지만 뼈가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가문의 비전 기술로 이 무기를 온전히 다루고 도련님의 손목을 보호하려면…… 천년한철을 녹여 만든 특제 장갑, 현철 장갑(玄鐵掌匣)이 필요합니다. 제가 밤을 새워서라도 도련님을 위한 방패를 단조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그때까지는 더 이상 무리하게 힘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연희는 품속에서 붉은 실 한 가닥을 꺼내 강우의 상처 입은 손목에 조심스럽게 묶어주었다. 약방의 어두운 등불 아래, 붉은 실은 두 사람의 얽힌 운명처럼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강우는 손목에 묶인 붉은 실과 연희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복수심 뒤에 숨겨져 있던 따뜻한 온기가 미세하게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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