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혀지는 그물망
대보름날 밤의 핏빛 소동이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다음 날 아침, 추풍 철공소의 아침은 평소보다 훨씬 더 무겁고 싸늘한 침묵으로 시작되었다. 계곡 사이로 불어오는 이른 아침의 바람에는 어젯밤 대장간 마당을 가득 채웠던 유황 연기와 피비린내가 채 가시지 않은 채 맴돌고 있었다.
강우는 오두막의 낡은 판자 틈새로 스며드는 푸르스름한 새벽빛을 받으며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의 온 신경은 오른쪽 손목으로 쏠려 있었다. 어젯밤 조태양의 광포한 벽력 진기를 칼집째로 받아내며 생긴 손목 뼈의 미세한 균열이, 맥박이 뛸 때마다 욱신거리는 둔탁한 통증을 뿜어내고 있었다.
‘조태양의 단전이 깨졌으니, 조필성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강우는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가문의 원수를 향한 차가운 분노가 다시금 용솟음치려 했지만, 그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내력을 억눌렀.
‘무진경 1성(無震勁), 무진소식(無震消息).’
그가 마음속으로 심법의 구결을 읊조리자, 폭주하려던 단전의 진기가 골수 깊은 곳으로 스며들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맥박은 평범한 범인의 것처럼 느려졌고, 살기 가득하던 안광 역시 초점 없는 벙어리 잡역부 ‘아광’의 순박한 눈빛으로 되돌아갔다. 자신을 철저히 숨기지 않으면, 이 철공소에 갇힌 수백 명의 민초들이 먼저 피를 흘리게 될 터였다.
강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 밑의 흙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는 떨리는 오른손을 꾹 누르며, 왼손으로 바닥의 흙을 깊숙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차가운 흙을 한 자 한 자 파내자, 그 아래 숨겨두었던 낡은 가죽 자루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안에는 스승 풍간열이 남긴 유품인 ‘풍간열의 호신 철패’와 삼베천에 칭칭 감겨 쇠사슬로 단단히 묶인 ‘적소도’가 누워 있었다. 강우는 가슴 팍 안쪽에 품고 있던 호신 철패를 꺼내 만져보았다. 둥글고 묵직한 무쇠의 감촉이 스승의 투박한 손길처럼 차갑게 그의 손바닥을 위로했다.
“칼을 함부로 뽑지 않는 자가 천하를 벤다.”
스승의 나지막한 음성이 귓가를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강우는 호신 철패를 다시 자루에 넣고, 적소도와 함께 흙구덩이 가장 깊은 곳에 묻었다. 그리고 그 위를 흙으로 평평하게 덮은 뒤, 대장간에서 긁어모은 검은 숯가루와 마른 짚단을 흩뿌려 완벽하게 위장했다. 겉보기에는 그저 비바람에 허물어진 초라한 오두막 바닥에 불과했다. 모든 흔적을 지운 강우가 장포를 추스르는 순간, 오두막 밖에서 귀를 찢는 듯한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아악! 살려주십시오, 감독관님! 저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
강우는 몸을 웅크린 채 낡은 판자문 틈새로 밖을 내다보았다.
철공소 연무장 마당은 이미 지옥도로 변해 있었다. 가죽 안대를 찬 애꾸눈의 감독관 독안귀가 가시 돋친 채찍, 적사편을 사정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채찍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인부들의 살점이 튀었고, 차가운 돌바닥 위로 붉은 피가 번졌다. 독안귀의 얼굴은 광기와 공포로 잔뜩 뒤틀려 있었다. 조필성의 외아들이 폐인이 되었으니, culprit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자신의 목이 먼저 날아갈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개돼지 같은 놈들! 어젯밤 공자님을 해친 쥐새끼가 누구냐! 당장 말하지 않으면 오늘 이 자리에서 열 놈을 골라 목을 치겠다!”
독안귀의 표독스러운 외침에 인부들은 사르르 떨며 머리를 땅에 박았다. 마동포 역시 무릎을 꿇은 채 주먹을 꽉 쥐고 있었지만, 아광의 정체를 보호하기 위해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독안귀는 광기 어린 눈빛으로 사병들에게 소리쳤.
“모든 구역을 샅샅이 뒤져라! 인부 놈들의 오두막부터 쓰레기더미까지, 손가락만 한 쇠붙이 하나라도 나오면 즉시 끌어내라!”
사병들이 몽둥이와 장도를 들고 인부들의 막사로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그 무자비한 그물망이 점차 강우가 있는 오두막 구역으로 좁혀져 오고 있었다.
그때였다. 강우의 오두막 뒤편, 고철 폐기장더미 사이에서 작은 그림자가 기민하게 움직이는 것이 강우의 눈에 포착되었다.
소철이었다.
소년은 사병들의 수색망을 피해 아광 형의 오두막으로 숨어들려 하고 있었다. 어젯밤 사건의 전말을 유일하게 눈치챈 소철은 강우의 안위가 걱정되어 비밀 정보를 전하려 온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소년의 발걸음은 다급했고, 고철 더미 사이를 빠져나오던 중 낡은 무쇠 송곳 조각을 밟고 말았다.
찰강-!
작지만 예리한 금속음이 고요한 아침 공기를 깨뜨렸다. 연무장에서 인부들을 다그치던 독안귀의 고개가 귀신같이 그 방향으로 돌아갔다. 독안귀의 애꾸눈이 번뜩였다.
“거기 누구냐!”
독안귀가 채찍을 치켜들며 소철이 숨은 고철 더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빨라질 때마다 소철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이 오두막 안의 강우에게까지 들리는 듯했다. 소철은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소철이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하고, 결국 모든 비밀이 탄로 날 위기였다.
강우는 눈을 감았다. 지금 밖으로 나가 독안귀를 타격할 수는 없었다. 사방에 조필성의 사병들이 깔려 있었고, 아광의 신분으로 무공을 드러내는 순간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검을 뽑지 않고, 내력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놈의 시선을 돌려야 한다.’
강우는 심호흡을 하며 가슴속의 진기를 조율했다. 가문의 비전 심법이 그의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깨어났다.
‘청철공명결(淸鐵共鳴結).’
강우는 눈을 감은 채, 오두막 벽에 걸린 부러진 칼날들과 가마 구석에 쌓인 고철 조각들의 미세한 울림에 정신을 집중했다. 그의 손끝에서 무진경의 미세한 진기 파동이 실핏줄처럼 흘러나와 흙바닥을 타고 뻗어나갔다. 그 진기는 소리도 없고 진동도 없었기에 무림의 고수라도 알아채기 힘든 은밀한 기운이었다.
진기가 마당 반대편, 도구 창고에 쌓여 있는 무거운 쇠사슬과 부러진 철퇴 조각들에 도달했다.
강우는 손가락 끝을 미세하게 퉁겼다.
징-!
순간, 소철이 있는 고철 더미와 정반대 방향인 도구 창고 내부에서 거대한 쇳소리가 폭발하듯 울려 퍼졌다.
와장창! 콰르릉!
마치 누군가 창고의 철제 선반을 통째로 들이받아 수십 자루의 병기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듯한 파괴적인 소음이었다. 웅장한 금속음이 협곡 전체에 메아리치며 사병들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켰다.
“뭐, 뭐야! 저쪽이다!”
“창고 쪽에 쥐새끼가 숨어들었다!”
사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구 창고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소철의 덜미를 잡으려던 독안귀 역시 멈칫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애꾸눈에 의혹과 경계가 서렸다.
“도구 창고라고? 이쪽은 수색 대원들을 보내고, 나는 이 구석방부터 뒤지겠다!”
독안귀는 노련한 사파 무인이었다. 그는 소음이 난 반대편 구석인 강우의 오두막 방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그 짧은 시선 분산의 틈을 타, 소철은 날렵하게 몸을 날려 강우의 오두막 문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탁.
소철은 오두막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강우의 침상 밑 어두운 공간으로 소리 없이 기어 들어갔다. 소년의 온몸은 차가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고, 이빨을 마주치며 공포를 참아내고 있었다. 강우는 침상 옆에 묵묵히 서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멍청한 표정으로 문쪽을 바라보았다.
쿵-!
거친 발길질과 함께 오두막의 낡은 판자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독안귀가 어깨에 먼지를 털어내며 오두막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가시 채찍 적사편이 뱀처럼 바닥을 쓸며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독안귀의 애꾸눈이 오두막 내부의 좁고 초라한 풍경을 매섭게 훑었다. 지붕이 새어 들어온 빗물 자국, 썩어가는 판자 떼기, 그리고 구석에 멍청하게 서 있는 벙어리 아광.
독안귀는 강우에게 다가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유독한 약재 냄새와 피비린내가 좁은 오두막 안을 가득 채웠다.
“벙어리 아광…….”
독안귀가 읊조리며 강우의 얼굴을 바짝 들이댔다. 강우는 초점 없는 눈동자로 독안귀의 이마를 바라보며, 몸을 부르르 떠는 시늉을 했다. 겁에 질려 아무것도 모르는 천한 노예의 완벽한 위장이었다.
독안귀는 강우의 어깨를 거칠게 움켜잡았다. 그의 손끝에 내력이 실려 강우의 어깨뼈를 으스러뜨릴 듯 압박해 왔다. 본능적으로 반탄진기를 방출할 고수를 색출하려는 비열한 시험이었다.
강우는 단전의 진기를 뼈 속 깊은 골수까지 밀어 넣은 채, 그저 나약한 범인의 육체로 그 압박을 받아냈다. 어깨뼈가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얼굴에는 공포와 고통의 멍청한 미소만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내력의 반응이 전혀 없자, 독안귀는 쯧 하고 혀를 차며 손을 떼어냈다.
“천한 통뼈 놈 같으니라고. 맷집 하나는 쓸데없이 좋군.”
독안귀는 오두막 바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의 발걸음이 강우가 적소도와 호신 철패를 묻어둔 흙바닥 쪽으로 향했다. 독안귀는 흙바닥 위에 흩뿌려진 검은 숯가루와 짚단들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서늘한 긴장감이 오두막 내부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 팽팽해졌다. 침상 밑에 숨은 소철은 숨을 완전히 멈추었고, 강우의 등 뒤에서는 식은땀 한 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독안귀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의 코가 흙바닥에 가까워졌다. 독안귀는 바닥의 흙냄새를 맡으려는 듯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미세하게 섞여 있는 녹슨 무쇠의 냄새, 그리고 가문을 멸망시킨 원수들의 피를 갈망하는 적소도의 쇠사슬 냄새를 찾아내려는 듯 그의 눈동자가 흙바닥을 집요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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