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산의 검객 백연화와의 조우
휘이잉!
차가운 가을바람이 마차 지붕 위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머리 위를 뒤덮은 먹구름 사이로 수십 자루의 강철 화살이 빗방울처럼 쏟아져 내리는 찰나, 한강우의 왼손이 마침내 등 뒤에 메고 있던 ‘혈약의 녹슨 도 (적소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원수를 마주하지 않았기에 도신은 단 한 치도 칼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삼베천과 무거운 쇠사슬에 칭칭 감긴 적소도는 그저 둔탁한 쇳소리를 내며 칼집째로 울부짖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껍데기뿐인 도집만으로도 강우에게는 충분한 장벽이 되었다.
‘야철안 2성, 공명청음(共鳴聽音).’
강우가 마음속으로 심법을 읊조리자, 붉은 안개로 가득 차 흐릿하던 그의 세계가 오직 소리의 진동으로 이루어진 정교한 전장으로 변모했다. 허공을 찢으며 낙하하는 강철 화살들의 파공음, 절벽 위 집법 대원들의 거친 호흡, 그리고 활시위가 튕기는 미세한 마찰음까지 입체적인 선이 되어 그의 심안(心眼)에 그려졌다.
깡! 깡! 콰과광!
강우가 왼손에 쥔 도집을 번개처럼 회전시켰다. 연희가 천년한철 조각을 녹여 만들어 준 검푸른 ‘현철 장갑’이 도집을 타고 흐르는 충격 반동을 완벽히 흡수했다. 살을 깎는 듯한 강철 화살들이 도집의 무쇠 옆면에 부딪쳐 붉은 불꽃을 튕기며 사방으로 부러져 나갔다. 눈이 먼 상태에서 오직 소리의 공명만으로 화살 폭풍을 완벽히 요격하는 ‘도집차단’의 극의였다.
“이, 이 괴물 같은 놈이……!”
절벽 위에서 경악한 집법 대원의 비명이 들렸다. 그 틈을 타 마차를 몰던 곰보 삼수가 채찍을 사정없이 휘둘렀다.
“이랴! 고갯길만 넘으면 나루터로 향하는 산길이다!”
마차가 덜컹거리며 추살대의 포위망을 뚫고 거친 흙먼지 속으로 사라졌다. 강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차 지붕 아래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오른손목의 골절 부위에서 뼛속을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고, 입안에서는 비릿한 피비린내가 감돌았다. 그는 각혈을 억누르며 품속의 ‘독고성의 비밀 조서’와 ‘조필성의 밀매 장부’가 안전한지 왼손으로 가만히 확인했다. 아직은 쓰러질 때가 아니었다. 가문의 한을 풀고, 세뇌당해 무림맹의 꼭두각시로 살아가는 누이 한아란을 구하기 전까지는.
* * *
몇 시간의 거친 질주 끝에 마차는 강목 나루터로 향하는 깊은 산길목에 접어들었다. 침엽수림 사이로 차가운 서리바람이 불어와 강우의 흰 안대를 적셨다. 대장간을 탈출한 소철과 연희는 마차 내부에서 숨을 죽인 채 강우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스으읍.
강우가 코끝을 스치는 바람의 냄새를 맡았다. 축축한 흙내음과 서리 낀 대나무 향기 사이로, 지독하게 이질적인 냄새가 섞여 있었다.
비린 피비린내, 그리고 황보세가(黃寶世家) 특유의 금강진기(金剛眞氣)가 내뿜는 묵직한 쇠 냄새였다.
‘철기의 울림이 들린다. 열 자루가 넘는 장도들이 춤을 추고 있군.’
강우는 눈을 감은 채 미세하게 떨리는 귀를 기울였다. 저 앞쪽 숲속 공터에서 서슬 퍼런 쇳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파공음이 연달아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싸움이 아니었다. 한 명의 무인을 살상하기 위해 수십 명의 살수들이 그물을 좁혀가는 처절한 사투였다.
“도련님, 저 앞쪽에서 검기가 느껴집니다.”
연희가 나직하게 속삭이며 강우의 장포 자락을 잡았다. 강우는 말없이 왼손을 뻗어 그녀의 손등을 지긋이 눌렀다. ‘기다려라’라는 무언의 신호였다. 강우는 마차에서 내려 소리 없이 숲속의 그늘을 타고 격전지로 신형을 날렸다. 그의 발걸음은 낙엽 하나 밟는 소리조차 내지 않을 정도로 은밀했다.
공터 한가운데는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백색 무복을 입고 은장 보검을 찬 쳇바퀴 같은 신형의 여검객이 사방에서 들이치는 장도들을 필사적으로 막아내고 있었다. 설산파(雪山派)의 젊은 여검객, 백연화(白蓮花)였다. 그녀의 백색 무복은 이미 어깨와 옆구리가 찢어져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고, 그녀의 은장 보검인 ‘설화검(雪花劍)’ 끝에서는 차가운 눈바람 같은 은빛 검기가 위태롭게 일렁이고 있었다.
“하아, 하아……!”
백연화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설산파 비전의 ‘빙백검법(氷魄劍法)’을 전개했다. 칼날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서리 낀 은빛 궤적이 그려졌으나, 그녀를 포위한 황보세가의 살수들은 한 치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황보세가 장로 황보강(黃寶剛)이 보낸 정예 추적대였다. 조필성 사후 가문의 죄상이 폭로될까 두려워진 황보강이, 언니 설화의 복수를 돕기 위해 움직이던 백연화의 정체를 알아채고 몰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설산파의 잔당 년이 감히 장로님의 앞길을 가로막으려 드는구나. 오늘 네년의 목을 베어 나루터 강물에 던져주마!”
금장 장포를 입은 살수 조장이 잔인하게 조소하며 장도를 비껴 들었다. 그의 검 끝에 황보세가 특유의 묵직한 금강진기가 실려 황색 도광을 발했다.
쉬이익! 콰아앙!
살수 세 명이 동시에 백연화의 목과 허리, 다리를 향해 삼중의 쾌검 합격을 전개했다. 이미 내력이 고갈되고 외상을 입은 백연화의 방어벽이 처참하게 깨져 나갔다. 그녀의 설화검이 살수 조장의 묵직한 참격에 부딪쳐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갔고, 무방비 상태가 된 그녀의 가슴을 향해 또 다른 살수의 검날이 독사처럼 파고들었다.
‘지켜주지 못한 누이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군.’
그 순간, 강우의 심안 속에서 멸문지화의 날 밤 차가운 칼날에 쓰러져 가던 사촌 누이 한진희와, 세뇌당한 채 살아가는 누이 한아란의 슬픈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차가운 살기가 정심결(靜心決)의 빗장을 부수고 솟구쳤다.
스으윽!
강우의 신형이 바람을 타고 낙하했다. 그는 검을 뽑지 않았다. 뽑을 수도 없었다. 오직 왼손에 쥔 삼베천과 쇠사슬에 묶인 적소도의 도집을 사선으로 비스듬히 치켜세웠을 뿐이었다.
‘도집 받치기 (횡경막).’
끼이이이익-! 콰드득!
소름 끼치는 금속 마찰음이 숲속의 정적을 깨부수었다. 백연화의 가슴을 뚫으려던 살수의 날카로운 검날이 강우가 내민 무거운 도집의 옆면에 정면으로 부딪쳤다. 강우는 도집의 평평한 면을 사선으로 대어 적의 검세를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검에 실린 묵직한 금강진기가 도집을 타고 현철 장갑으로 전달되었으나, 천년한철의 단단함이 그 충격을 대지로 고스란히 소멸시켰다.
중심을 잃고 앞으로 쏠린 살수의 얼굴에 경악이 서리는 찰나, 강우의 도집 끝이 전광석화처럼 적의 명치를 강타했다.
퍽!
“끄어억!”
살수는 비명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내상을 입고 뒤로 십여 보를 날아가 나무둥치에 처박혔다. 단 한 번의 도집 타격으로 일류 살수를 무력화하는 압도적인 위력이었다.
“대체 어떤 놈이냐!”
살수 조장이 기겁하며 검세를 거두고 뒤로 물러섰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눈을 흰 천으로 단단히 가린 채, 삼베와 쇠사슬에 묶인 거대한 도검을 짊어진 기괴한 사내의 모습이었다. 강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벙어리 아광의 침묵은 여전히 유효했다.
“눈먼 장님 새끼가 감히 황보세가의 일에 끼어들다니! 여봐라, 저놈의 목과 다리를 함께 잘라라!”
살수 조장의 포효에 세 명의 정예 살수들이 동시에 강우를 향해 짓쳐들었다. 그들의 검날이 사방에서 붉은 검기를 뿜어내며 강우의 목과 허리를 가차 없이 노려왔다.
강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강골보 1성’의 보법을 전개해 흔들리는 흙바닥 위에 하체를 단단히 고정했다. 귀에서 미세한 혈류가 다시 흘러내렸지만, 그의 심안은 적들의 검초 궤적을 소리만으로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추풍삼보(秋風三步).’
강우의 신형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가볍게 움직였다. 살수들의 날카로운 검날들이 그의 어깨 장포 자락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 지나가며 허공을 갈랐. 눈이 먼 상태에서도 적들의 호흡을 읽어내어 완벽한 회피를 선보이는 기예였다.
그때, 뒤틀린 경맥에서 밀려오는 차가운 열독의 통증에 강우의 신형이 일시적으로 흔들렸다. 그 틈을 타 우측에서 파고든 살수의 검끝이 강우의 회색 장포를 찢으며 오른쪽 어깨에 가벼운 찰과상을 남겼다. 시뻘건 핏방울이 장포 위로 번져 나갔다.
“우욱……!”
강우는 각혈을 삼키며 왼손의 도집을 강하게 쥐었다. 현철 장갑 표면의 미세한 균열이 다시 일렁였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단전 깊은 곳에서 뿜어낸 무진경의 내력을 도집 끝에 집중시켰다.
‘도집파천격 1성, 기초 권태(基礎 權笞).’
깡! 깡! 쨍강!
강우가 도집을 휘두를 때마다, 살수들의 장검이 도집과 맞부딪치며 비명을 질렀다. 단순한 충돌이 아니었다. 강우는 ‘야철안’으로 상대방 무기의 미세한 결함과 이 빠진 틈새를 눈으로 보고 정확히 그곳만을 타격했다. 단 세 번의 둔탁한 타격음 끝에, 살수 두 명의 명검이 수십 개의 조각이 되어 허공으로 산산조각 나 비산했다.
“내, 내 검이……!”
무기를 잃고 당황한 살수들의 가슴 혈도를 향해 강우의 도집 끝이 번개처럼 짓쳐들었다. 둔탁한 파공음과 함께 도집 끝이 그들의 대혈을 강타하자, 살수들은 단숨에 기혈이 마비되어 연무장 바닥으로 쓰러졌다.
이제 남은 것은 살수 조장 한 명뿐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은 백연화와 자신의 정예 부하들이 단 한 명의 눈먼 도객에게 허무하게 제압당하는 모습을 보며 극도의 공포에 휩싸였다. 칼을 뽑지도 않은 채, 오직 쇠사슬에 묶인 도집만으로 명문 세가의 검법을 완벽히 무력화하는 무시무시한 괴물.
“이, 이 괴물 같은 장령 놈……!”
살수 조장은 강우가 다시 한 걸음 좁혀오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그는 이 눈먼 도객을 정면으로 상대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살수 조장은 품속으로 급히 손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황보세가의 비전 신호탄(신호탄)을 꺼내 들었다.
피이이이이익-!
살수 조장이 도화선 매듭을 당기자,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한 줄기 붉은 불꽃이 가을 하늘을 향해 빠른 속도로 쏘아 올려졌다.
하늘에서 살수들의 검은 신호탄이 폭음과 함께 붉은 섬광을 터뜨리며 가을 하늘을 피빛으로 물들이는 순간, 강우는 등 뒤에 메고 있던 삼베와 쇠사슬로 묶인 적소도의 손잡이를 왼손으로 꽉 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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