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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타고 양주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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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은 독고린의 핏빛 비명 소리 위로, 자색 관복을 입은 금의위 천호 육진이 차가운 보검을 비껴 차며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으나, 그가 디딜 때마다 연무장에 자욱하게 깔려 있던 쇳가루 먼지들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길을 열었다. 황실 비선 조직 금의위의 장엄한 위압감이 순식간에 추풍 철공소의 무거운 공기를 지배했다.


“천호 대인…… 어찌 황실의 사냥개들이 무림맹의 정당한 집법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오!”


단전이 폐쇄된 채 바닥을 기던 독고린이 부러진 적양검의 자루를 쥔 채 이빨을 갈았다.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핏방울이 연무장의 흙바닥을 붉게 적셨지만, 육진은 그를 내려다보며 차가운 비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정당한 집법이라? 무림맹의 감찰관이라는 자가 황실의 사철 광산에서 무고한 장인들과 민초들을 역적으로 몰아 학살하려 한 것이 정당하다는 말인가.”


육진이 품속에서 은빛으로 빛나는 금의위 밀패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 황실의 전권과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밀패가 햇살을 받아 서늘한 광채를 뿜어내자, 독고린의 집법 대원들은 일제히 숨을 죽이며 무기를 바닥으로 내렸다. 황실의 권위 앞에서는 천하의 무림맹이라 할지라도 사사로이 검을 휘두를 명분이 없었다.


“서 현감은 이미 조필성과 결탁하여 사철을 밀매하고 비자금을 세탁한 죄로 하옥되었다. 독고린, 네놈 역시 황실의 법도를 어기고 민란을 획책하려 했으니 당장 이 협곡에서 퇴출당하고 싶지 않다면 무기를 버리고 물러서라. 맹주 독고성에게 전해라. 황실의 눈이 더 이상 무림맹의 오만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육진의 준엄한 선언에 독고린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러나 단전이 완전히 봉인되어 기력을 잃은 그로서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집법 대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독고린 일파가 패배자처럼 비틀거리며 추풍곡의 좁은 입구를 향해 쫓겨나듯 떠나갔다. 그들의 무거운 발소리가 멀어지자, 연무장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수백 명의 관군들 역시 쇠뇌를 거두고 썰물처럼 물러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변방 추풍곡에 완전한 해방이 찾아온 순간이었다.


“우리가…… 우리가 살았다!”


“조필성이 죽고 무림맹이 물러갔다!”


쇠사슬에서 막 해방된 노예 장인들과 인부들이 서로를 껴안으며 오열 섞인 함성을 터뜨렸다. 대장간 수석 야장 장삼과 털보 곽씨는 연무장 한가운데 묵묵히 서 있는 강우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눈에는 뜨거운 눈물과 함께 깊은 경외감이 서려 있었다. 강우는 그들을 향해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끝내 한 마디의 목소리도 내지 않은 채 벙어리 아광의 침묵을 유지했다. 그의 오른손목은 여전히 붕대에 감겨 대투 속에 고정되어 있었고, 왼손에 쥔 적소도의 도집 끝만이 바닥을 짚은 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 * *


밤이 깊어지자, 추풍곡의 요란하던 축제 소리를 뒤로하고 강우는 조필성의 사저 지하 비밀 방에 홀로 앉았다. 등불 하나만이 어두운 방안을 쓸쓸하게 밝히고 있었다.


스으윽.


비밀 방의 문이 열리며 연희가 따뜻한 약초 향과 함께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강우의 곁에 가만히 앉아, 그의 소매를 걷어 올리고 오른손목의 붕대를 조심스럽게 풀었다. 연희의 고운 손길이 어긋난 뼈마디를 어루만질 때마다 강우는 뼛속을 찌르는 듯한 골절 통증을 느꼈지만, 묵묵히 참아냈다.


“도련님, 무진경의 무리한 격발로 인해 심장의 화독이 다시 요동치고 있습니다. 제발 무공을 당분간 가라앉히셔야 합니다.”


연희가 걱정스러운 듯 한철미침을 꺼내 강우의 심장 혈도에 정교하게 침을 놓았다. 이내 장 대인이 공수해 주었던 차가운 설산삼즙을 강우의 입술에 흘려 넣어 주었다. 얼음처럼 차가운 약즙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자, 폭주하던 심장의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흐려졌던 시야가 미세하게나마 회복되기 시작했다. 흰 천 너머로 연희의 수려하고 단아한 얼굴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강우는 왼손으로 조필성의 시신에서 확보했던 가죽 보따리를 풀었다. 그 안에는 조필성의 비밀 금고에서 건져낸 ‘조필성의 밀매 장부’와 무림맹주 독고성이 보낸 비밀 서신들이 들어 있었다. 강우는 흐릿한 눈으로 서신들의 필사본인 ‘독고성의 비밀 조서’를 한 장씩 넘기기 시작했다.


바스락, 서책을 넘기는 소리만이 어두운 지하실에 무겁게 울렸다. 그러던 중, 강우의 손끝이 어느 한 서신 위에서 뚝 멈춰 섰다. 맹주 독고성의 인장이 찍힌 빛바랜 밀서였다.


[한양 한씨가문의 제철 기술은 완벽히 회수하였다. 다만, 가주의 딸 한아란은 가문의 비전 가마를 여는 주파수를 기억하고 있으니 쓸모가 있어 살려둔다. 망정환심결(忘情幻心訣)로 가문의 기억과 감정을 완전히 지우고 내 침전의 시녀로 배치해 두었으니, 한양 한씨의 핏줄은 영원히 내 꼭두각시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


서신을 읽는 강우의 눈동자가 순간 검붉은 살기로 거칠게 물들었다. 등 뒤에 메고 있던 적소도가 칼집 내부에서 피울음 같은 둔탁한 진동을 일으켰고,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혈통의 낙인이 타들어 가는 극통을 유발했다.


누이 한아란이 살아 있었다.


멸문지화의 날 밤, 불타는 가마터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죽은 줄만 알았던 누이가, 만악의 근원인 무림맹주 독고성의 침전에서 기억을 잃은 채 꼭두각시 시녀로 부려지고 있다는 잔혹한 진실. 강우의 주먹이 바르르 떨리며 손목의 붕대가 다시 팽팽하게 조여들었다. 단순한 은원의 복수극이었던 그의 여정이, 이제 누이를 구출해 내야만 한다는 절박한 가문의 구원극으로 확장되는 순간이었다.


강우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정심결을 전개해 불타오르는 살기를 억눌렀다. 그리고 이내 옆에 놓인 ‘조필성의 밀매 장부’를 펼쳤다. 장부에는 조필성이 불법 주조한 한철 병기들의 유통 경로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남부의 대도시, 양주성(揚州城).’


그곳에서 수로 연맹과 소금 밀매 조직인 적사幫을 장악하고 십삼세가의 군자금을 모으는 수장, 8번째 원수 ‘팽만강(彭萬江)’. 조필성이 만든 무기들은 모두 팽만강과의 밀거래 장부를 통해 양주성의 소금 밀수선에 실려 무림맹의 비밀 호위대인 천영대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다음 복수의 표적은 명확했다. 양주성을 지배하는 팽만강의 숨통을 끊고, 가문의 제철 비기를 회수하여 무림맹의 자금줄을 완벽히 궤멸시키는 것.


강우는 조용히 책을 덮고 연희를 바라보았다. 연희는 강우의 눈빛 속에 담긴 결의를 읽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이 가시는 길이라면, 그곳이 지옥의 한가운데라 할지라도 대장장이의 딸로서 제련 도구를 들고 함께 가겠습니다.”


* * *


다음 날 이른 아침, 추풍곡 입구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


철공소의 곰보 삼수가 모는 고철 수송 마차가 안개 속에서 조용히 대기하고 있었다. 마차 밑바닥의 비밀 적재함에는 강우가 회수한 가문의 비급들과 비밀 조서가 안전하게 은닉되어 있었다.


“형님! 준비를 모두 마쳤습니다!”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소철이 앳된 얼굴로 씩씩하게 외치며 마차 지붕 위에 짐을 실었다. 철공소의 꼬마 잡역부였던 소년은 이제 강우의 뒤를 쫓아 가문의 야철술을 배울 첫 번째 제자이자 동반자로서 동행할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연무장 마당에는 장삼과 털보 곽씨를 비롯한 수십 명의 장인들과 인부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강우가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아쉬움과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길을 막아섰다.


“도련님, 남겨진 저희들은 이곳 추풍곡의 무너진 용광로를 다시 세우고, 한양 한씨세가의 참된 제철 기술을 보존하며 때를 기다리겠습니다.”


“부디 몸조리하시고, 가문의 혈원을 반드시 씻어주십시오!”


장삼이 강우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가문의 옛 세공 도구들을 바쳤다. 강우는 묵묵히 장삼의 거친 손을 어루만지며,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뜨거운 민초들의 연대를 느꼈다. 비록 말을 할 수 없었지만, 그의 단호한 안광은 장인들에게 반드시 살아 돌아와 가문을 재건하겠다는 무언의 약속을 전하고 있었다.


강우는 연희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 안으로 몸을 실었다. 곰보 삼수가 채찍을 휘두르자, 마차가 요란한 쇳소리를 내며 안개 낀 추풍곡의 험준한 가을 산길을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 강우는 창밖으로 멀어져 가는 추풍곡의 깎아지른 절벽들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변방의 착취당하던 협곡을 벗어나, 더 크고 화려한 전장인 양주성으로 향하는 비장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바로 그 순간, 강우의 귀가 미세하게 떨렸다.


사각, 사각. 대나무 잎사귀들이 부딪치는 소리 위로, 허공을 가르는 날카롭고 기괴한 날갯짓 소리가 청철공명결의 감각망에 포착되었다.


강우가 마차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멀리 하늘을 바라보았다.


자욱한 안개 구름을 뚫고, 저 멀리 태산의 방향에서 날아온 검은 날개의 맹수들이 추풍곡 상공을 불길하게 배회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매가 아니었다. 깃털 사이에 무림맹 특유의 은빛 철사슬 징표를 감은 채, 가문의 생존자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사냥하려는 무림맹주 독고성의 비밀 연락 매들이었다. 매들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가을 하늘을 찢으며 강우 일행이 탑승한 마차의 머리 위로 음산하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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