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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의 핏빛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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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의 달빛은 차갑고도 푸르스름했다. 추풍곡의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흘러든 달빛은 용광로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뻘건 불길과 뒤섞여, 대장간 마당을 기괴한 자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매캐한 유황 연기와 쇳가루 먼지가 허공에 자욱하게 깔린 밤이었다.


강우는 대장간 한구석에서 묵묵히 고철 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다. 가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 때문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지만, 그의 안광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벙어리 잡역부 ‘아광’의 탈을 쓴 채, 그는 낮 동안 겪었던 뼈가 시리는 손목 통증을 무진경 1성(無震勁)의 호흡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오늘이다.’


강우는 등 뒤에 메고 있는 거대한 형체를 의식했다. 두꺼운 삼베천으로 칭칭 감아 무거운 쇠사슬로 묶어둔 검, 적소도(赤霄刀). 가문을 멸망시킨 원수 조필성의 아들 조태양이 바로 오늘 밤 이곳을 찾는다. 소철이 목숨을 걸고 물어다 준 정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대장간 마당 한가운데에는 쇠사슬에 묶인 채 비틀거리는 인부들이 줄을 서 있었다. 하루 종일 지하 사철 광산에서 석탄과 사철을 나르느라 살가죽이 뼈에 달라붙은 몰골들이었다. 그들의 선두에는 우직한 장사 마동포가 서 있었다. 마동포의 구릿빛 어깨는 오랜 노역으로 피고름이 배어 나와 있었지만, 그는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분노를 삼키고 있었다.


콰아아앙!


철공소의 거대한 목조 정문이 거칠게 열리며, 화려한 횃불 무리가 마당으로 들이닥쳤. 조필성의 사병들이 채찍과 장도를 치켜들고 길을 열었고, 그 뒤로 비단 장포를 걸친 한 청년이 오만하게 걸어 들어왔다.


조태양(趙太陽)이었다.


그는 조필성의 외아들이자, 정파 명문 문파의 비전 제자로 입문한 소문난 천재였다. 그의 허리에는 황금색 자수가 놓인 칼집과 푸른 광채를 발하는 명검, 금린도(金鱗刀)가 빛나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가죽 안대를 찬 애꾸눈의 감독관 독안귀가 비굴한 미소를 지으며 보좌하고 있었다.


“공자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번에 제련된 한철 병기들입니다.”


독안귀가 손짓하자 사병들이 갓 주조된 장도 수십 자루를 단조대 위에 늘어놓았다. 조태양은 가소롭다는 듯 코방귀를 뀌며 걸어가 장도 한 자루를 대충 뽑아 들었다. 그의 날카롭고 수려한 눈매가 칼날을 훑었다.


스으윽.


조태양이 내력을 실어 칼날을 퉁기자, 둔탁하고 불협화음 섞인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야철안 1성을 지닌 강우의 눈에는 그 칼날 내부의 치명적인 기포와 균열이 선명하게 보였다. 조태양 역시 무학의 기초를 닦은 천재답게 칼의 조잡함을 단번에 알아챘다.


“이딴 쓰레기를 무림맹 납품용 병기라고 만든 것이냐?”


조태양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그는 들고 있던 장도를 바닥에 팽개쳤다. 강철 도검이 돌바닥에 부딪치며 허무하게 두 동강이 났다.


“공, 공자님! 추풍곡의 사철에 불순물이 많아 제련 온도를 맞추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독안귀가 무릎을 꿇으며 변명했다. 조태양의 눈에 잔혹한 살기가 서렸다.


“온도를 맞추지 못했다면, 인부 놈들이 태업을 한 것이겠지. 이 천한 개돼지 놈들이 배가 불러서 불을 제대로 지피지 않은 게 분명하다.”


조태양은 사병의 채찍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서 있던 늙은 인부의 얼굴을 향해 무자비하게 휘둘렀다.


짝-!


“으아악!”


늙은 인부가 뺨이 찢어진 채 바닥을 굴렀다. 조태양은 광기에 찬 미소를 지으며 채찍을 연속으로 휘둘렀다. 인부들의 비명 소리가 대보름의 밤공기를 찢었다.


“공자님! 멈춰 주십시오! 저희는 밤낮없이 불을 지폈습니다!”


참다못한 마동포가 앞으로 나서며 조태양의 채찍을 거대한 팔로 가로막았다. 채찍이 마동포의 팔뚝을 감으며 핏자국을 남겼지만, 마동포는 이빨을 악물며 버텨냈다.


조태양의 눈썹이 꿈틀했다. 천한 대장장이 놈이 감히 자신의 채찍을 막아섰다는 사실에 극도의 모욕감을 느낀 것이었다.


“천한 놈이 감히 손을 대?”


조태양이 채찍을 놔버리며 허리의 금린도를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푸른 검광이 대장간 마당을 밝혔다.


“그 무식한 다리로 다시는 걸어 다니지 못하게 만들어 주마. 다리 힘줄을 끊어라.”


조태양이 금린도를 비스듬히 세우며 벽력도법(霹靂刀法)의 기초 초식을 전개했다. 그의 검날이 마동포의 오른쪽 무릎 관절을 향해 전광석화처럼 쏘아져 나갔다. 마동포는 쇠사슬에 묶여 있어 피할 길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이를 지켜보던 강우의 심장이 터질 듯이 맥동했다. 가슴팍의 혈약 낙인이 핏빛으로 불타오르며 온몸의 경맥을 찢어발기는 듯한 고통을 선사했다.


‘원수가 아니다…… 저놈은 최종 원수 조필성이 아니다!’


혈약의 제약이 강우의 뇌리를 때렸다. 지금 검을 뽑으면 가문의 저주가 그의 단전을 폭파시킬 것이었다. 등 뒤의 적소도가 삼베천 속에서 피울음을 울며 격렬하게 요동쳤지만, 강우는 이성을 잃지 않았다.


‘검을 뽑지 못한다면, 칼집째로 부수겠다.’


강우는 삼베천과 쇠사슬로 단단히 감겨 있는 적소도를 칼집째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신형을 날려 어둠 속에서 마당 한가운데로 폭풍처럼 낙하했다.


스으으윽!


바람 소리조차 나지 않는 기민한 신법이었다.


조태양의 금린도가 마동포의 무릎에 닿기 직전, 묵직하고 거대한 쇠막대기 같은 형체가 허공을 가르며 끼어들었다.


깡-!


귀를 찢는 듯한 강렬한 금속음이 대장간을 흔들었다. 조태양의 예리한 검날이 강우가 내민 적소도의 두꺼운 쇠사슬 칼집 면에 부딪쳐 미끄러졌다.


‘도집 받치기 (횡경막).’


강우는 도집의 평평한 사선을 이용해 조태양의 검초에 실린 벽력 진기를 비스듬히 흘려보냈다. 엄청난 반동 진기가 강우의 손목을 타고 흘러들었지만, 그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하체를 단단히 고정했다.


“무엇이냐? 어떤 놈이 감히!”


조태양이 기겁하며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은 낡은 마의를 걸치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벙어리 잡역부 아광이었다. 하지만 그가 등 뒤에 짊어진, 삼베와 사슬로 감긴 거대한 무기는 예사롭지 않은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벙어리 아광? 네놈이 미쳤구나!”


독안귀가 소리쳤지만, 조태양은 직감적으로 눈앞의 사내가 평범한 잡역부가 아님을 깨달았다. 방금 자신의 검을 막아낸 기묘한 흘리기 기술은 명문가의 정묘한 방어 초식이었다.


“정체를 숨긴 쥐새끼였군. 감히 십삼세가의 검을 막아서고 무사할 줄 알았느냐!”


조태양이 붉은 벽력진기를 검신에 끌어올렸다. 그의 금린도가 대보름의 달빛 아래서 핏빛으로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벽력참(霹靂斬)!”


조태양이 신형을 날리며 쾌검의 극의를 담은 벽력도법 초식을 전개했다. 수십 자루의 푸른 검날 잔상이 강우의 전신을 찢어발길 듯 사방에서 쇄도했다.


강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야철안 1성으로 읽어낸 조태양의 검초는 화려하지만, 내력의 분배가 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강우는 검을 뽑지 않은 채, 오직 발끝에 진기를 집중했다.


스스스슥.


강우의 신형이 바람에 날리는 낙엽처럼 흐느적거리며 조태양의 검날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빠져나갔다. 추풍삼보의 보법이었다. 살을 스치는 서늘한 검기가 장포 자락을 미세하게 스쳤지만, 강우의 피부에는 단 한 줄기의 상처도 나지 않았다.


“이 쥐새끼가 피하기만 할 셈이냐!”


조태양이 초조해하며 검세를 더욱 넓혔다. 그의 무게중심이 앞으로 쏠리는 찰나, 강우의 발이 땅을 강하게 디뎠다.


쿵-!


강우가 오른발로 지면을 강하게 구르자, 대장간 마당의 흙바닥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요동치며 돌 파편들이 사방으로 솟구쳤.


‘진각 타격 (대지파편).’


지면의 강한 진동이 조태양의 하체를 흔들며 그의 무게중심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조태양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극도의 공포가 서렸다.


그 짧은 찰나의 빈틈을 강우는 놓치지 않았다. 강우는 삼베와 쇠사슬로 묶인 적소도의 뭉툭한 도집 끝부분을 쥐고, 조태양의 명치를 향해 전광석화처럼 내질렀다.


스으으윽- 콰직!


도집 끝이 조태양의 명치 정중앙에 정확히 박혔다. 겉 표면의 비단 옷자락은 찢어지지 않았지만, 강우가 주입한 무진경 1성(無震勁)의 침투 내경이 조태양의 장기를 우회하여 그의 단전 내부로 직접 흘러들었다.


콰드득!


조태양의 체내에서 무언가 기맥이 산산조각 나는 기괴한 파열음이 울렸다.


“꺼, 억……!”


조태양의 입에서 핏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눈동자가 흰자위를 드러내며 뒤로 뒤집혔다. 그의 단전 기해(氣海)가 완벽히 파괴되어 평생 쌓아온 무공이 허무하게 가루가 되어 사라진 것이었다.


스르륵.


조태양은 손에 쥐고 있던 금린도를 떨어뜨린 채, 대장간 마당의 차가운 흙바닥 위로 꺾인 인형처럼 쓰러졌다. 그의 입가에서 검붉은 피가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공자님! 공자님!”


독안귀와 사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조태양에게 달려갔다. 마당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저, 저 벙어리 놈을 잡아라! 당장 쳐죽여라!”


독안귀가 소리쳤지만, 솟구친 흙먼지와 자욱한 유황 연기 속에서 강우의 신형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강우는 흔적을 남기지 않은 채, 다시 저 멀리 어두운 고철 더미 뒤편으로 몸을 날려 소리 없이 몸을 숨겼다.


잠시 후, 흙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마당 구석에는 벙어리 아광이 공포에 질린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주저앉아 있는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독안귀와 사병들은 조태양을 부축해 비명을 지르며 관아로 달아나기 바빴고, 마동포를 비롯한 인부들은 경악 어린 눈빛으로 아광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대보름의 밤은 그렇게 비린 피비린내와 함께 깊어가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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