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칼날, 공명청음의 사투
눈앞의 세상은 오직 붉고 어두운 심연의 안개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연희의 따뜻한 손길이 뺨에서 떨어지는 순간, 한강우는 자신이 딛고 선 어둠이 이전보다 훨씬 깊고 선명해졌음을 깨달았다. 시각을 잃은 육신은 기이할 정도로 청각을 예리하게 벼려내고 있었다. 공방 천장을 스치는 미세한 밤바람의 흐름, 대나무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차가운 마찰음, 그리고 멀리 추풍 철공소 방향에서 들려오는 둔탁한 쇠망치 소리까지 귓가에 송곳처럼 날카롭게 꽂혔다.
“도련님, 정말 이 몸으로 가시려는 겁니까? 백호침의 한기가 아직 경맥을 옥죄고 있고, 오른손목의 뼈도 겨우 정렬되었을 뿐입니다. 눈마저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무림맹의 정예 무인들을 상대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연희의 목소리에는 절박한 울음이 섞여 있었다. 그녀는 강우의 왼손을 꽉 쥐었다. 그 손목에는 검푸른 빛을 뿜어내는 현철 장갑(玄鐵 掌甲)이 단단히 조여져 있었다. 천년한철 조각을 녹여 밤새 두드려 만든 특수 장갑. 도집치기의 살인적인 반동으로부터 강우의 부러진 손목 뼈를 보호해 줄 유일한 방패이자 보구였다. 강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잃은 벙어리 아광의 침묵은 그 어떤 웅변보다 단호했다. 그는 묵묵히 연희의 손등을 토닥인 뒤, 등 뒤에 짊어진 적소도(赤霄刀)의 무게를 느꼈.
가문을 멸망시킨 원수의 피를 마시기 전에는 절대로 칼집에서 뽑히지 않는 혈약의 녹슨 도. 두꺼운 삼베천과 묵직한 쇠사슬로 칭칭 감겨 봉인된 검은 쇠막대기가 그의 척추를 묵직하게 눌렀다. 강우는 왼손으로 도집의 중간 부분을 꽉 쥐었다. 오른손목은 쓸 수 없었으나, 현철 장갑을 낀 왼손이 있다면 도집치기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강골보(强骨步)의 묵직한 발디딤이 공방 지하실의 돌바닥을 단단하게 디뎠다.
“도련님... 제발 살아 돌아오셔야 합니다. 대장장이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잊지 마십시오.”
연희의 마지막 애원이 대나무 숲의 바람 소리 속으로 흩어졌다. 강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시야를 가린 흐릿한 붉은 안개 너머로, 소철의 비명 소리와 독고린의 오만한 목소리가 이정표가 되어 그의 청각을 인도하고 있었다.
* * *
추풍 철공소 앞마당 연무장은 비린 피비린내와 매연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오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지만, 연무장을 가득 메운 무림맹 집법당 대원들의 철갑 투구는 서늘한 살기만을 뿜어내고 있었다. 대장간 수석 야장 장삼과 인부들은 사슬에 묶인 채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쓰러져 있었고, 연무장 한가운데에는 땋은 머리칼이 엉망으로 헝클어진 소철이 매달려 있었다. 소년의 목덜미에는 무림맹 감찰관 독고린의 명검 적양검(赤陽劍)의 시퍼런 칼날이 닿아 있었다.
“정오가 다 되었다. 그 비겁한 벙어리 놈은 결국 제 목숨 하나 보존하겠다고 이 어린놈을 버린 모양이구나.”
독고린이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적양검을 치켜들었다. 칼끝에 묻은 소철의 핏방울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여봐라! 약속대로 이 꼬마 놈의 목을 베어라!”
“안 됩니다! 감찰관 대인! 제발 소철이만은...!”
장삼이 으스러진 손가락으로 땅을 기며 울부짖었으나, 집법 대원 한 명이 무자비하게 장삼의 등을 짓밟았다. 대원들이 소철의 목을 향해 장도를 치켜드는 바로 그 순간.
사각, 사각.
연무장 입구의 황량한 흙먼지를 헤치며,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을린 회색 마의를 걸치고, 등 뒤에는 삼베와 쇠사슬로 칭칭 감긴 거대한 녹슨 도를 짊어진 사내. 그의 눈은 흰 천으로 단단히 가려져 있었고, 왼손에는 검푸른 쇠가죽 장갑을 낀 채 무거운 칼집을 가만히 쥐고 있었다. 벙어리 잡역부 아광, 한강우였다.
“오호라, 결국 기어 나왔구나. 눈 먼 천치 벙어리 놈이 제 발로 무덤을 찾아왔어.”
독고린이 검을 거두며 비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을 둘러싼 집법 대원들 역시 일제히 조롱 섞인 웃음을 흘렸다. 눈이 먼 채로 쇠사슬에 묶인 칼을 메고 온 사내를 두려워할 무인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강우는 그들의 비웃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눈을 가린 흰 천 너머, 강우의 심안(心眼) 속에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야철안 2성(공명청음)의 경지.’
시각이 완벽히 차단되자, 가슴속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제철 혈통의 기예가 폭발하듯 개화했다. 공명감지 ‘청철술(靑鐵術)’이 발동하는 순간, 연무장 사방에 존재하는 모든 쇠붙이들의 미세한 울림이 주파수가 되어 강우의 뇌리에 선명한 지도로 그려졌다. 대원들이 쥐고 있는 장도들의 쇳소리, 그들의 철갑이 움직일 때마다 발생하는 미세한 마찰음, 심지어 독고린의 적양검이 내뿜는 흉포한 열기의 진동까지 1치 오차도 없이 감지되었다.
“여봐라! 저 건방진 눈먼 벙어리 놈의 사지를 잘라 맹주님께 바쳐라!”
독고린의 서슬 퍼런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집법 대원 세 명이 세 방향에서 강우를 향해 동시에 기습 쾌검을 찔러 왔다.
쉭, 쉭, 쉭!
날카로운 파공음이 공기를 찢으며 강우의 목과 허리, 그리고 심장을 향해 짓쳐들었다. 일반적인 절정 고수라도 세 방향의 동시 쾌검을 피하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지켜보던 장삼과 인부들이 절망의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강우의 안색은 빙판처럼 차가웠다.
강우는 눈을 완전히 감은 채, 세 자루의 장검이 공기를 가르며 내뿜는 고유의 금속 진동음을 정확히 청음했다.
‘좌측 검의 무게는 삼 근 육 냥, 우측 검은 사 근, 중앙은 조금 가볍군.’
‘도집파천격 3성, 도집차단(刀鞘遮斷).’
강우는 왼손의 현철 장갑에 내력을 주입하며 적소도의 묵직한 도집을 사선으로 크게 휘둘렀다.
깡-!
둔탁하고 장엄한 금속 파열음이 연무장을 뒤흔들었다. 강우는 도집의 평평한 옆면을 비스듬히 대어 좌측 대원의 검날을 받아낸 뒤, 그 반동의 힘을 역이용해 우측 대원의 검날을 향해 그대로 튕겨 보냈다. 두 대원의 장검이 공중에서 서로 맞부딪치며 예리한 불꽃을 튀겼다. 적들의 검세가 상호 충돌하여 스스로 무너지는 찰나였다.
그와 동시에 강우는 강골보의 보법을 전개하며 신형을 반 치 아래로 숙였다. 중앙에서 찔러 들어오던 매서운 검날이 강우의 뒷덜미 깃털 자락을 간발의 차로 스쳐 지나갔다. 기습적인 쾌검 합격(合擊)이 단 한 번의 도집 받치기와 미세한 회피 동작에 완벽하게 무력화된 것이다.
“이, 이놈이 눈이 먼 게 아니란 말이냐!”
적들이 경악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강우의 반격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강우는 현철 장갑을 낀 왼손을 번개처럼 뻗어,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우측 대원의 손목 관절을 정확히 격타했다.
콰드득!
천년한철의 단단함과 무진경(無震勁)의 침투 내경이 깃든 일격에 대원의 손목 뼈가 단숨에 바스러졌다. 대원은 비명과 함께 장도를 떨어뜨리며 바닥을 뒹굴었다.
남은 대원들이 기겁하며 다시 검을 고쳐 쥐었지만, 강우의 귀에는 그들의 무기가 내뿜는 미세한 결함의 소리가 이미 들리고 있었다. 장인들이 온도 조절법을 통해 제련해 둔 불량 장도들. 겉은 날카로우나 속은 기포로 가득 차 취성(脆性)이 극에 달한 병기들이었다.
강우는 도집 끝에 내력을 응축하여 남은 대원의 장검 측면을 가볍게 때렸다.
쨍강-!
명검이라 믿었던 무림맹의 장도가 유리창 깨지듯 허무하게 산산조각 나며 공중으로 비산했다. 단 세 번의 도집 타격 만에 정예 대원 다섯 명의 검이 부러지고 관절이 파괴되어 바닥에 쓰러졌다. 연무장은 일순간 물을 끼얹은 듯 괴괴한 침묵에 잠겼다.
시각을 대신해 청각과 진기 공명에 모든 내력을 집중한 대가는 혹독했다. 강우의 귓가에서 끈적한 암적색 혈류가 가늘게 흘러내려 뺨을 적셨고, 손목의 골절 부위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유발했다. 하지만 눈먼 도객의 기세는 오히려 태산처럼 거대해져 연무장을 압도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눈먼 벙어리 놈이 도집만으로 내 정예 무인들을...!”
지켜보던 감찰관 독고린의 얼굴이 경악과 수치심으로 일그러졌다. 오만하던 그의 안광에 처음으로 지독한 살기와 경계심이 서렸다. 독고린은 천천히 소철의 목덜미에서 검을 거두며, 자신의 허리에 차고 있던 맹주 친필의 명검 적양검을 완전히 뽑아 들었다.
화아악-!
적양검의 검신이 마침내 그 흉포한 모습을 드러내자, 붉은 독기와 화독 진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며 연무장의 공기를 뜨겁게 불태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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