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맹 감찰관 독고린의 강림
연희의 따뜻한 뺨을 만지는 강우의 손가락 끝이 가늘게 떨렸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무나 선명하건만, 눈앞의 세상은 오직 붉고 어두운 심연의 안개로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도련님,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아직 백호침의 냉기가 기맥에 남아 있어요.”
연희의 목소리에는 물기 어린 떨림이 배어 있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손길이 강우의 뺨을 타고 내려와, 어긋났다가 겨우 제자리를 찾은 그의 오른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싸 안았다. 손목 위에는 연희가 묶어준 붉은 실이 팽팽하게 옭아매어져 있었다. 복수가 끝난 후 평범한 대장장이로 돌아가겠다는, 피로 얼룩진 도객의 영혼에 채워진 유일한 약속의 쇠사슬이었다.
강우는 묵묵히 눈을 감았다. 눈꺼풀을 닫아도 시야를 가린 핏빛 안개는 사라지지 않았다. 최초의 발도가 가져다준 혈약의 가혹한 반동, 그리고 천뢰동 지하 용광로에서 들이마신 유독 가스는 그의 눈을 완전히 멀게 만들었다. 단전의 진기는 백호침의 지독한 한기 속에 꽁꽁 얼어붙어 한 줌도 끌어올릴 수 없었다. 지금의 그는 쇠사슬에 묶인 적소도처럼, 그저 껍데기만 남은 무력한 육신에 불과했다.
스으으윽.
그때, 대나무 숲을 뒤흔드는 서늘한 바람 소리 사이로 기묘한 진동이 강우의 귓가를 스쳤다.
눈이 멀자, 기이하게도 청각이 극한으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대나무 잎사귀들이 서로 부딪치며 내는 파동, 공방 지붕 위를 스쳐 지나가는 들쥐의 발소리까지 뇌리에 선명한 그림이 되어 그려졌다. 그리고 그 미세한 자연의 소음 너머로, 대지를 무겁게 짓누르며 다가오는 둔탁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최소 수십 필의 전마(戰馬)가 편자를 울리며 협곡 입구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 말발굽 소리는 정돈되어 있었고, 말들이 짊어진 강철 마구와 무인들의 철갑이 부딪치는 소리는 서늘한 금속음을 풍겼다.
‘무림맹(武林盟)의 군대다.’
강우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조필성이 참수당하고 천뢰동 용광로가 무너지며 한철 무기의 납품이 완전히 중단되자, 마침내 무림맹의 공권력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품속에 은밀히 숨겨진 야철유서 제1장과 독고성의 비밀 조서, 그리고 육진 천호가 건넨 금의위 밀패가 가슴팍을 무겁게 짓눌렀다.
“도련님, 왜 그러십니까? 몸이 다시 떨리고 있어요.”
연희가 걱정스러운 듯 강우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강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 벙어리 아광의 침묵은 여전히 유효했다. 하지만 그의 심안은 이미 대나무 숲 너머, 붉은 피비린내가 피어오르는 추풍 철공소로 향하고 있었다.
* * *
추풍 철공소 앞마당 연무장은 차가운 긴장감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탈탈 털린 대장간 화로에서는 매연 대신 회색 재바람만 날렸고, 채굴이 중단된 광산 입구는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그 적막을 깨뜨리며, 철갑을 두른 무림맹 집법당 추풍지부(武林盟 執法堂 秋風支部)의 정예 대원 수십 명이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그들의 중심에 화려한 금실 자수가 놓인 백색 무복을 입고, 허리에 감찰패를 찬 중년 무인이 서 있었다.
무림맹주 독고성의 친척이자, 오만하기로 악명이 자자한 감찰관 독고린(獨孤麟)이었다.
독고린은 매 같은 눈빛으로 황량한 철공소를 둘러보며 코방귀를 뀌었다. 그의 곁에는 조필성의 사병 무리를 이끌던 뇌풍(雷風)이 전신에 붕대를 감은 채 비굴하게 서 있었다.
“조필성이 죽고, 맹주님께 바칠 한철 무기 제련이 완전히 멈췄다라…….”
독고린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그는 품속에서 맹주의 친필이 새겨진 감찰패를 꺼내 흔들며, 연무장에 무릎 꿇려진 대장간 장인들을 내려다보았다. 수석 야장 장삼(張三)과 털보 곽씨를 비롯한 수십 명의 인부들이 사슬에 묶인 채 바닥에 이마를 박고 있었다. 그들의 대열 한가운데에는 쇳가루를 뒤집어쓴 쳇바퀴 같은 고아 소년, 소철(蘇鐵)이 겁에 질린 안색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천한 대장장이 놈들이 감히 조정과 무림맹의 신성한 무기 제조소를 불태우고, 소주 조필성을 살해해? 그것도 모자라 맹주님의 피붙이인 조태양 공자를 폐인으로 만들다니. 이는 명백한 마교(魔敎)의 역모다.”
독고린의 억지에 장삼이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고개를 들었다.
“감, 감찰관 대인! 저희는 역모를 꾀한 적이 없습니다! 조필성은 저희 민초들을 쇠사슬로 묶어 채찍질하며 착취하던 악마였습니다! 저희는 그저 살기 위해…….”
짝-!
장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독고린의 신형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그의 가죽 장화가 장삼의 뺨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장삼은 비명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고, 그의 찢어진 입술 사이로 붉은 선혈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천한 야장 놈이 감히 맹주의 명을 받드는 감찰관의 앞길에서 주둥이를 놀리는구나.”
독고린은 수건을 꺼내 장화에 묻은 먼지를 닦아내며 사납게 포효했다.
“여봐라! 저 늙은 놈의 손가락뼈를 하나씩 바스러뜨려라! 조필성을 살해하고 붉은 녹슨 도를 짊어진 채 도집치기라는 해괴한 기술을 쓰던 ‘벙어리 아광’의 진짜 정체와 은신처를 불 때까지 자비 없이 신문해라!”
“존명!”
집법 대원들이 달구어진 쇠집게와 가시 채찍을 들고 장인들에게 다가갔다. 비명 소리가 연무장의 차가운 하늘을 찢었다. 털보 곽씨의 등덜미가 채찍에 찢겨 나가고, 장삼의 손가락 뼈가 쇠집게에 눌려 으스러지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장삼은 이가 갈리는 고통 속에서도 어금니를 깨물었다. 자신들을 구원해 준 강우의 은혜를 배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겠다 이거지? 좋다. 늙은 놈들의 뼈는 단단해서 잘 부러지지 않으니, 어린놈부터 시작해라.”
독고린의 잔인한 시선이 구석에 웅크린 소철에게 멈췄.
“공방의 잔심부름을 하던 꼬마 놈이군. 저놈을 끌어내라.”
“안 됩니다! 소철이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장삼이 으스러진 손으로 땅바닥을 기며 울부짖었으나, 사병들은 소철의 땋은 머리칼을 거칠게 움켜잡아 연무장 한가운데로 끌어냈다. 소철은 공포에 질려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지만, 그의 매서운 눈빛만은 꺾이지 않고 독고린을 노려보았다.
“꼬마야, 네놈이 매일 밤 그 벙어리 놈의 뒤를 졸졸 따르며 숯을 날랐다고 들었다. 그놈이 지금 어디에 숨어 있느냐? 가문의 비급과 비밀 장부는 어디에 묻었지? 순순히 말하면 네 목숨만은 살려주마.”
독고린이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소철의 턱을 구두 끝으로 치켜올렸다.
소철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머릿속으로 강우가 고철 폐기장에서 건네주던 따뜻한 주먹밥, 그리고 무너지는 광산 속에서 자신을 구하기 위해 맨손으로 바위를 받쳐 들던 비장한 모습이 스쳐 지나갔. 강우는 소철에게 단순한 잡역부 형이 아니었다. 가문의 제철 기술과 무공을 전수해 준, 평생을 바쳐 따르고 싶은 유일한 스승이자 형님이었다.
“모, 모릅니다…….”
소철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단호했다.
“모른다고?”
독고린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의 손짓에 집법 대원이 가시 채찍을 높이 치켜들었다.
짝-! 짝-!
“으아악!”
소철의 왜소한 등판 위로 붉은 독기가 서린 채찍이 사정없이 내리쳤다. 얇은 마의가 찢어지며 앳된 살가죽이 터져 나갔고, 선혈이 연무장 돌바닥을 적셨다. 고통에 겨운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소철은 이를 악물고 땅바닥의 흙을 꽉 움켜쥐었다. 손톱이 뒤틀려 피가 흘러내렸지만, 소년은 입을 열지 않았다. 강우가 회복할 시간을 벌어주어야 한다는 생각 하나만으로, 소철은 지옥 같은 매질을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었다.
“이 악독한 꼬마 놈이 제법 맷집이 좋구나. 하지만 내 인내심도 여기까지다.”
독고린은 짜증스러운 듯 혀를 차며, 허리에 차고 있던 자신의 명검 적양검(赤陽劍)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시퍼런 검광이 아침 햇살을 받아 잔인하게 번뜩였다.
그는 소철의 앞으로 걸어가, 땋은 머리칼을 한 손으로 거칠게 움켜잡아 소년의 고개를 강제로 뒤로 꺾었다. 그리고 시퍼런 검날을 소철의 가느다란 목덜미에 바짝 들이댔다. 예리한 칼끝이 살결을 누르자, 가느다란 핏줄기가 소철의 앳된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뇌풍, 먹과 종이를 가져오너라.”
독고린은 적양검의 끝에 소철의 피를 묻혀, 철공소 벽면에 커다란 글씨를 서늘하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피비린내 나는 붉은 글씨가 나무 벽면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일까지 그 벙어리 놈이 나오지 않으면 이 아이의 목을 베겠다.]
선언문이 완성되자, 독고린은 소철의 목을 겨눈 채 연무장 사방을 향해 사납게 포효했다.
“벙어리 아광! 네놈이 살아있다면 똑똑히 들어라! 내일 정오까지 이 연무장으로 기어 나와 무릎을 꿇지 않는다면, 이 꼬마 놈의 목을 베어 추풍곡 계곡 아래로 던져버릴 것이다!”
그 서슬 퍼런 외침이 대나무 숲을 흔들며, 은밀히 숨어 있던 강우의 귓가에 핏빛 경보가 되어 날카롭게 꽂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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