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대가, 흐려지는 시력
서늘한 대나무 잎사귀들이 바람을 머금고 스산한 비명을 질렀다. 밤이 깊어갈수록 협곡의 어둠은 한층 묵직해졌고, 사방을 에워싼 대나무 숲은 마치 거대한 감옥의 창살처럼 하늘을 가로막고 있었다.
바스락, 콰드득.
"도련님, 조금만 참으십시오. 거의 다 왔습니다!"
대장간의 우직한 수석 야장 장삼(張三)은 숨을 헐떡이며 숲속의 어두운 길을 달렸다. 그의 넓은 어깨에는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의식을 잃은 한강우가 무겁게 업혀 있었다. 강우의 입술은 이미 푸르스름하게 질려 있었고, 가슴팍의 회색 마의는 천뢰동 지하 용광로에서 들이마신 독한 유황 가스와 최초의 발도로 인한 혈약(血約)의 반동으로 토해낸 검은 피로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강우의 오른손목은 시퍼렇게 부어올라 마치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위태롭게 흔들렸고, 그 고통스러운 부위 위에는 오직 연희가 묶어준 붉은 실만이 팽팽하게 감겨 있을 뿐이었다. 강우의 품속 깊은 곳에는 조필성의 비밀 금고에서 회수한 가죽 두루마리 '야철유서 제1장'과 무림맹주 독고성의 배후 음모가 적힌 비밀 조서, 그리고 금의위 천호 육진이 은밀히 쥐여준 은빛 금의위 밀패가 단단히 숨겨져 있었다.
장삼의 뒤를 따르던 소철(蘇鐵)이 가시덤불을 헤치며 길을 열었다. 마침내 빽빽한 대나무 숲 한가운데, 마치 주변 풍경과 동화된 듯 숨겨진 허름한 목조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멸문지화의 날 살아남은 한씨가문의 장인들이 은밀히 지은 비밀 대장간이자, 강우의 유일한 안식처인 '연희의 공방(延姬 工房)'이었다.
탁, 탁!
소철이 문을 급하게 두드리자마자 문이 열렸다. 문 뒤에 서 있던 연희(延姬)는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 있는 강우를 보자마자 들고 있던 등불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도련님...!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장삼 아저씨, 어서 안쪽 지하 밀실로 모셔요!"
연희의 안내에 따라 장삼은 강우를 지하 밀실의 차가운 석조 침상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 밀실 내부는 은은한 약초 향과 차가운 쇠 냄새가 뒤섞여 묘한 침묵을 자아내고 있었다.
이미 공방 내부에서 약재를 정비하며 대기하고 있던 늙은 의원 장 대인(張 大人)이 황급히 침상 앞으로 다가왔다. 그의 하얀 수염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장 대인은 강우의 부러진 손목과 가슴팍의 맥을 짚자마자 미간을 극도로 찌푸렸다.
"이 미련한 놈을 보았나! 원수를 베기 위해 그 가혹한 혈약의 낙인을 강제로 깨뜨리며 발도했으니, 온몸의 경맥이 성할 리가 있겠느냐! 단전의 진기는 완전히 고갈되었고, 심장 주위의 기맥은 불타는 쇠사슬로 조여드는 듯 역류하고 있구나!"
장 대인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안타까움이 동시에 서려 있었다.
"연희야! 당장 내 의원 가방에서 차가운 현철로 제련된 백호침(氷魄神針)을 꺼내라! 그리고 서촉 설산 지대에서 공수해 둔 설산삼즙(雪山蔘汁)을 준비해라! 한 치라도 지체하면 심장이 파열되어 죽는다!"
연희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침착하게 장 대인에게 백호침 세트를 건넸다. 장 대인은 엄숙한 표정으로 강우의 상의를 거칠게 찢어발겼다. 강우의 가슴팍에는 혈약의 낙인이 검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터질 듯이 맥동하고 있었다.
"장씨 기맥 조율술(張氏 氣脈 調律術)을 전개하겠다. 기혈의 흐름을 강제로 우회시켜 심장의 폭주를 막아야 한다. 도련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는 벙어리의 고통을 내 오늘 침 끝으로 덜어줄 터이니, 부디 견뎌내야 한다."
장 대인은 차가운 한기를 뿜어내는 백호침을 강우의 심장 주변 대혈들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치이익-!
침끝이 기맥에 닿는 순간, 마치 달구어진 철판에 얼음을 집어넣은 듯한 격렬한 진기의 마찰음이 밀실에 울려 퍼졌다. 백호침의 지독한 냉기가 강우의 타들어 가는 심장 혈도를 강제로 동결시키기 시작했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도 강우의 전신이 활처럼 팽팽하게 꺾이며 비정상적인 경련을 일으켰다. 부러진 오른손목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고, 전신의 근육이 뒤틀렸다. 하지만 강우는 입술을 깨물 뿐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벙어리 아광의 침묵은 사경을 헤매는 순간에도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었다. 그의 이마에는 주먹만 한 식은땀이 맺혔고, 손목의 붉은 실은 그의 떨림을 따라 미세하게 흔들렸다.
장 대인이 침술로 폭주하는 기혈을 간신히 묶어두자, 연희가 차갑게 식힌 설산삼즙 가죽 자루를 들고 다가왔다. 설산삼즙은 몸속의 뜨거운 화독을 가라앉히는 극상의 한성 약즙이었지만, 지독하게 쓰고 차가워 의식을 잃은 자가 삼키기에는 극도로 위험했다.
강우의 턱 관절은 고통으로 인해 단단히 맞물려 움직이지 않았다. 연희는 아픈 가슴을 억누르며,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아랫입술을 지긋이 눌렀.
"도련님, 제발 삼키셔야 합니다... 저와의 약속을 잊으신 것은 아니겠지요..."
연희는 설산삼즙을 자신의 입에 머금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숙여, 강우의 굳게 다문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개었다. 차갑고 쓴 약즙이 그녀의 입술을 타고 강우의 메마른 목구멍 안쪽으로 흘러 들어갔다. 연희의 뜨거운 눈물이 강우의 뺨 위로 떨어져 약즙과 함께 섞여 내렸다.
그녀는 밤새도록 강우의 곁을 지키며,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를 찬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냈다. 장 대인의 침술과 연희의 지극정성 어린 간호가 차가운 지하 밀실의 어둠 속에서 밤새도록 계속되었다.
반나절이 넘는 처절한 사투 끝에, 요동치던 강우의 맥박이 서서히 평정을 찾기 시작했다. 백호침이 얼려버린 심장의 기혈과 설산삼즙의 극성 한기가 체내의 불타는 화독을 완전히 잠재운 것이었다.
의식을 잃었던 강우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지독한 한기와 함께 서서히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것은 어두운 밀실의 목조 천장이 아니었다.
온통 시뻘겋고 흐릿하게 뭉개진 안개였다.
강우는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눈꺼풀을 움직일 때마다 눈 안쪽에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지만, 흐릿한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시야의 사방이 붉은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그 어떤 사물의 윤곽도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최초 발도의 대가와 천뢰동의 유독 가스가 그의 시력을 일시적으로 앗아간 것이다.
"도련님...? 정신이 드십니까?"
곁에서 들려오는 연희의 목소리는 너무나 선명하고 따뜻했다. 하지만 강우의 눈에 비친 연희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붉은 형체에 불과했다. 강우는 가만히 떨리는 왼손을 뻗어, 눈앞의 붉은 실루엣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연희의 차가운 뺨에 닿았다. 손가락을 타고 연희의 눈물이 흘러내리는 촉감이 전해졌으나, 강우의 눈앞에는 오직 차가운 붉은 안개만이 가득 차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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