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의위의 패, 황실의 개입
둥-! 둥-! 둥-!
추풍곡(秋風谷)의 깎아지른 절벽 사이로 대지를 뒤흔드는 장엄하고 무거운 북소리가 연무장을 덮쳤다. 그 울림은 단순한 가죽북의 소리가 아니었다. 황실의 군대만이 사용할 수 있는 거대한 전고(戰鼓)의 파동이었으며, 사방을 가로막은 암벽에 부딪쳐 메아리칠 때마다 관군들이 쥐고 있던 쇠뇌 끝이 일제히 흔들렸다.
“무, 무슨 소리냐? 이 북소리는 대체……!”
서 현감의 기름진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다. 사격 명령을 내리려 치켜들었던 그의 오른손이 허공에서 갈팡질팡 흔들렸다. 관군 포졸들 역시 동요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황실 조정의 군대가 움직일 때나 들을 수 있는 장중한 북소리가 이 외딴 변방의 협곡에 울려 퍼질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우는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도 공명청음(共鳴聽音)의 감각을 잃지 않았다. 그의 귀에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수백 발의 무거운 철갑 장화 소리가 걸려들었다. 흐트러짐 없는 군보(軍步), 그리고 예리하게 벼려진 황실 보검의 쇳소리. 그것은 무림맹의 사병들이나 지방 관아의 포졸들과는 격이 다른, 조정의 정예병들이 뿜어내는 위압감이었다.
협곡의 좁은 입구를 뚫고, 검은 비단 장포 위에 은빛 철갑을 덧댄 무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연무장으로 난입했다. 그들의 선두에는 황실 비선 조직인 금의위(錦衣衛)의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금의위다! 황실의 사냥개들이 왜 여기에……!”
관군 포졸 중 한 명이 비명을 지르듯 중얼거렸다. 황실의 직속 공권력이자 탐관오리들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 넘기기로 악명 높은 금의위의 등장에, 서 현감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해갔다.
철갑 무사들이 연무장을 포위하고 있던 관군들의 배후를 순식간에 포위하며 은빛 창날을 들이밀었다. 물러서지 않으면 즉각 참수하겠다는 침묵의 경고였다. 관군들은 겁에 질려 쇠뇌를 바닥으로 내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 삼엄한 대열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단정한 자색 관복을 입고 허리에 황실 보검을 찬 삼십대 후반의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날카로운 턱선과 깊고 서늘한 안광, 온몸에서 정치가의 냉혹함과 절정 고수의 기상을 동시에 뿜어내는 사내.
금의위 서부지부의 천호(千戶), 육진(陸進)이었다.
육진은 연무장 바닥에 흩어진 불량 장도들의 파편과 조필성의 사저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슬쩍 훑어본 뒤, 차가운 눈빛으로 서 현감을 응시했다.
“추풍 현감 서가(徐家)여. 관군을 동원해 황실의 사철 광산에서 무고한 민초들을 학살하려 하다니, 감히 조정의 법도를 우롱하려는 것이냐?”
육진의 목소리는 낮고 조용했으나, 내력이 실려 있어 연무장 전체를 서늘하게 얼려버렸다.
서 현감은 급히 가마에서 내려와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육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비만한 체구가 사시나무 떨듯 흔들렸지만, 그는 억지로 오만한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천, 천호 대인! 오해가 있으십니다! 이 무리들은 사사로이 난동을 부려 조필성 소주를 살해하고 철공소를 불태운 역적들입니다! 본 현감은 그저 역모의 무리를 소탕하려 했을 뿐입니다!”
“역모라?”
육진의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갔다. 비웃음이었다. 그는 품속에서 은빛 광채를 발하는 둥근 패를 천천히 꺼내 들었다. 패의 중앙에는 황실의 문장과 함께 ‘금의위(錦衣衛)’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황실의 전권과 절대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금의위 밀패(錦衣衛 密牌)였다.
“이 패가 보이는가, 서 현감? 이 패 앞에서는 조정의 일품 대신이라 할지라도 무릎을 꿇어야 한다. 네놈이 감히 황실의 권위 앞에서 거짓을 고하려 드는구나.”
서 현감은 밀패를 보는 순간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의 손가락에 박힌 황금 반지들이 흙바닥에 부딪쳐 둔탁한 소리를 냈다.
육진은 품속에서 가죽 장부 한 권을 꺼내 서 현감의 머리 위로 툭 던졌다. 그것은 강우가 조필성의 사저 지하 비밀 금고에서 확보해 두었던 비자금 거래 장부의 사본이자, 금의위가 그동안 암암리에 조사해 온 서 현감의 비리 명세였다.
“조필성과 결탁하여 사철을 불법 채굴하고, 무림맹주 독고성에게 바칠 불법 병기 주조를 비호해 준 대가로 황금 일만 냥과 백옥 백 쌍을 수수한 죄. 서 현감, 네놈이 조필성의 죄상을 덮어주기 위해 작성했던 수많은 상소문들의 초안이 이미 황실 금의위의 손에 들어와 있다.”
“그, 그것은……!”
“또한, 여기 모인 장인들과 민초들을 역적으로 몰아 멸구(滅口)함으로써 네놈의 추악한 비리를 영원히 은폐하려 한 죄. 이 모든 죄상이 명백히 드러났거늘, 감히 뉘 앞이라고 역모를 논하느냐!”
육진의 사자후에 서 현감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오열했다.
“살려주십시오, 천호 대인! 저는 그저 조필성의 협박에 못 이겨……!”
“시끄럽다. 여봐라! 저 탐관오리의 관인을 회수하고 즉각 관직을 박탈해라! 쇠사슬을 채워 한양의 금의위 지하 감옥으로 압송하라!”
“존명!”
철갑을 두른 금의위 무사들이 달려들어 서 현감의 관복을 찢어발기고 쇠사슬을 채웠다. 서 현감은 비참한 비명을 지르며 질질 끌려 나갔다. 그를 호위하던 관군 포졸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채 무기를 바닥에 던지고 무릎을 꿇었다. 추풍곡을 옥죄던 부패한 공권력의 장벽이 단 한 순간에 모래성처럼 허물어진 것이다.
연무장에 모인 수백 명의 민초들과 노예 장인들이 황실 군대의 장엄한 위용과 서 현감의 몰락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마동포와 구만수 역시 붉어진 눈으로 강우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대형을 향한 깊은 경외감과 감격이 서려 있었다.
육진은 포졸들을 해산시킨 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인부들의 방진 중앙에 서 있는 강우를 향해 다가왔.
마동포와 구만수가 본능적으로 긴장하며 무기를 꽉 쥐었으나, 강우는 가만히 손을 들어 그들을 만류했다. 강우는 여전히 말을 하지 않는 벙어리 ‘아광’의 구부정한 자세를 유지한 채 고개를 숙였다.
육진은 강우의 눈앞에 멈춰 섰다. 그의 매서운 안광이 강우의 전신을 샅샅이 훑었다. 먼지와 피비린내로 얼룩진 회색 마의, 뼈마디가 어긋나 시퍼렇게 부어오른 오른손목, 그리고 등 뒤에 삼베천과 쇠사슬로 칭칭 감겨 고정된 거대한 도검 적소도.
육진은 강우가 한양 한씨세가의 마지막 survivor이자, 어젯밤 조필성의 목을 벤 절정의 도객임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내색하지 않고, 오직 강우만이 들을 수 있는 미세한 전음(傳音)으로 나지막이 속삭였다.
‘한양 한씨의 마지막 핏줄이여. 네놈이 조필성의 목을 베어 가문의 첫 원한을 씻은 것은 황실의 이익과도 부합한다. 십삼세가와 무림맹의 비대해진 사병 세력을 흔드는 데 네 복수극만큼 유용한 칼날은 없으니까.’
강우는 눈을 감은 채 묵묵히 침묵을 지켰다. 육진의 전음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명심해라. 조필성의 시신에서 발견된 비밀 서신을 통해 네놈의 생존 소식이 무림맹 본산으로 전송되었다. 무림맹주 독고성의 친척이자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감찰관 독고린(獨孤麟)이 정예 집법 대원들을 거느리고 이미 추풍곡으로 향하고 있다. 그들의 칼날은 서 현감 따위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것이다.’
육진은 전음을 거두고, 슬쩍 몸을 돌려 강우의 곁을 지나쳐 걸어갔다. 스쳐 지나가는 찰나, 육진의 넓은 소매 자락이 강우의 부러진 오른손목 부근을 가볍게 스쳤다.
탁.
가벼운 마찰음과 함께, 강우의 부러진 손가락 끝에 둥글고 차가운 무쇠의 감촉이 닿았다. 육진이 은밀하게 강우의 품속으로 찔러 넣어준 은빛 패, 금의위 밀패였다.
‘이 패를 가지고 추풍곡을 탈출해 양주성(揚州城)으로 가라. 황실 관군들의 검문소는 이 패 하나로 무사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무림인들에게 발각되는 순간 네놈은 조정의 사냥개라는 오명을 쓰고 무림 전체의 공적이 될 터이니 신중히 사용해라.’
육진의 마지막 전음이 강우의 귀청을 때렸다. 육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들어 금의위 군대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금의위, 철수한다! 추풍곡의 사철 광산은 조정의 직속 관리 하에 두고, 착취당하던 인부들의 노역 사슬을 즉각 해제하라!”
“와아아아!”
인부들의 감격에 찬 함성이 협곡을 가득 메웠다. 은빛 철갑을 두른 금의위 대열이 장엄한 북소리와 함께 서서히 협곡 입구 너머로 사라져 갔다.
긴장이 풀리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두 번째 쇠뇌 사격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억지로 무진경의 진기를 쥐어짜 내어 공명청음을 구동했던 대가가 강우의 육체를 사정없이 덮쳤. 최초 발도 반동으로 찢겨 나갔던 심장 주위의 경맥들이 불타는 쇠사슬로 조여드는 듯한 혹독한 고통이 밀려왔다.
“크흑……!”
강우의 입술 사이로 참지 못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검고 응고된 피가 연무장의 거친 흙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그의 눈앞이 온통 흐릿한 붉은 안개로 뒤덮이며 몸이 앞으로 쓰러졌다.
“아광 대형! 정신 차리십시오!”
수석 장인 장삼(張三)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몸을 날려 강우의 구부정한 신형을 두 팔로 감싸 안았다. 강우는 장삼의 품에 안긴 채, 손끝에 쥐어진 차가운 은빛 밀패의 감촉만을 느끼며 깊은 암흑 속으로 의식을 잃고 침잠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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