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용광로, 천뢰동으로
뇌풍의 팔뚝이 단단하게 부풀어 올랐다. 시퍼런 진기가 백강도의 날카로운 도신을 타고 흐르며 차가운 안광을 뿜어냈다. 그가 검수하려 치켜든 장도는 어둠 속에서도 눈부신 은빛 궤적을 그리며, 대장간 중앙에 놓인 거대한 화강암 모루를 향해 수직으로 내리꽂히기 직전이었다. 단 한 번의 격돌이면 장삼과 털보 곽씨가 목숨을 걸고 감행한 ‘용광로 온도 조절법’의 기술적 태업이 완벽히 폭로될 터였다. 겉만 멀쩡하고 속은 유리처럼 깨지기 쉬운 취성(脆性) 상태의 장도가 화강암에 닿는 순간, 사방으로 산산조각이 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대장간 구석 흙바닥에 엎드려 석탄 조각을 줍는 척 위장하고 있던 한강우의 눈동자가 깊고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왼손 손가락이 거친 가죽 옷자락 아래 감춰진 검푸른 현철 장갑의 표면을 지긋이 눌렀다. 등 뒤에 쇠사슬과 삼베천으로 칭칭 감긴 적소도는 여전히 무거운 침묵을 지키고 있었으나, 강우의 심안(心眼)은 이미 뇌풍의 어깨 근육의 미세한 떨림과 검의 하강 궤적을 1치 오차도 없이 쫓고 있었다. 억지로 몸을 날려 뇌풍의 검을 막아야 하는가에 대한 냉철한 계산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찰나였다.
쿠우우웅-!
대장간의 무거운 지붕이 통째로 흔들릴 정도의 거대한 굉음이 협곡 전체를 뒤흔들었다.
뇌풍의 검날이 화강암 모루의 표면을 단 반 치 남겨둔 순간이었다. 굉음과 함께 대장간 밖 연무장 마당에서 수백 명의 민초들이 토해내는 분노와 살기 어린 함성이 폭발하듯 들이닥쳤다.
“조필성 개자식을 죽여라!”
“착취는 끝났다! 노예의 사슬을 끊어라!”
쿵! 쿵! 쿵!
육중한 무쇠 망치로 대장간 외벽 철문들을 때려 부수는 파괴적인 타격음이 연속으로 울려 퍼졌다. 마동포와 구만수가 이끄는 ‘추풍곡 민란군’이 마침내 봉기의 횃불을 들어 올린 것이었다. 예정보다 이른 봉기였으나, 일촉즉발의 파국 직전 대장간 내부의 모든 긴장감을 단숨에 날려버리는 구원의 소리였다.
“이, 이 개돼지 같은 노예 놈들이 감히……!”
뇌풍의 얼굴이 경악과 분노로 뒤틀렸다. 그는 모루를 내리치려던 검을 멈추고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장간 밖은 이미 수십 개의 횃불 불꽃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옥도로 변해가고 있었다. 뇌풍은 검수하던 장도를 단조대 위에 팽개치며 사병들에게 사납게 포효했다.
“무기 검수는 끝이다! 당장 무기고에 쌓인 신형 장도 오십 자루를 사병들에게 지급해라! 반항하는 광부 놈들의 대가리를 모조리 쪼개어 용광로의 불씨로 던져버려라!”
“존명!”
대장간을 지키던 십여 명의 사병들이 단조대 위로 달려들어 겉만 푸르고 예리하게 빛나는 불량 장도들을 한 자루씩 움켜잡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손에 쥔 무기가 가벼운 충격에도 유리창처럼 깨져나갈 시한폭탄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장간 문밖으로 뛰어나갔다.
강우는 바닥에 엎드린 채 벙어리 아광의 천치 같은 몸짓으로 머리를 조아리는 척하며,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의 뒤를 쫓았다. 그의 심안 속에서 복수를 향한 차가운 지략이 마침내 완벽한 형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무기를 쥔 손을 칠 수 없다면, 그들이 쥔 무기 자체를 파괴한다.’
강우는 소리 없이 신형을 일으켰다. 쇳가루와 먼지가 자욱한 대장간의 그늘을 타고, 그의 몸놀림은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벙어리 아광의 구부정한 가면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가문의 혈원을 집행하려는 냉혹한 도객의 기상만이 그의 전신에서 검붉은 진기가 되어 미세하게 일렁였다.
* * *
철공소 앞마당 연무장은 이미 거대한 전장으로 변해 있었다.
구만수가 퇴역 무관 시절의 노련한 안목으로 인부들을 방진 형태로 결속시켰고, 우직한 거한 마동포가 백근 무게의 무쇠 망치를 휘두르며 최전선에서 사병들의 목책을 부수고 있었다. 인부들은 녹슨 곡괭이와 석탄 삽, 날카롭게 깎은 죽창을 쥔 채 사병들과 처절한 육탄전을 벌였다.
“반항하는 개돼지 놈들, 이 신형 명검의 맛을 보아라!”
조필성의 사병대장이 겉만 멀쩡한 신형 장도를 치켜들고 마동포의 머리를 향해 맹렬하게 내리쳤다. 푸른 광채를 발하는 검날이 허공을 가르며 날카로운 파공음을 냈다. 마동포는 거대한 무쇠 망치를 가로막으며 정면으로 받아내려 했다.
바로 그 순간, 사병대장의 칼날이 마동포의 망치에 닿기 직전이었다.
스으윽.
사병대장의 오른쪽 측면 어둠 속에서, 먼지투성이 마의를 입은 왜소한 청년이 귀신처럼 나타났다. 강우였다. 강우는 말 한마디 내뱉지 않은 채, 왼손으로 삼베와 쇠사슬에 칭칭 감긴 적소도의 묵직한 도집(칼집)을 꽉 쥔 채 앞으로 가볍게 내밀었다.
‘야철안 '결함 타격'.’
강우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검붉은 안광을 발하며, 사병대장이 휘두른 장도 표면의 미세한 기포와 탄소 균열 마디들을 단번에 읽어냈다. 철의 온도가 급격히 하강하며 생긴 치명적인 취성 결함의 핵심 마디, 그곳이 강우의 심안에 붉은 점이 되어 박혔다.
팅-!
강우가 도집 끝으로 장도의 옆면, 기포가 가장 집중된 마디를 가볍게 튕기듯 타격했다.
그것은 결코 강한 힘을 실은 타격이 아니었다. 그저 철의 고유한 울림과 균열을 가볍게 자극하는 미세한 진동의 침투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쩍-! 쨍강!
날카로운 유리창이 깨지는 듯한 비명 소리와 함께, 사병대장의 신형 장도가 허무하게 수십 개의 쇳조각이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대장의 손에는 오직 이 빠진 칼자루만이 흉측하게 남겨져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명검이 어찌 이리 허무하게 부러진단 말이냐!”
사병대장이 경악하며 굳어버린 찰나, 마동포의 거대한 무쇠 망치가 그의 가슴팍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콰앙!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대장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십여 보를 날아가 처박혔다.
이것은 거대한 붕괴의 시작에 불과했다.
강우는 연무장 한가운데로 소리 없이 파고들었다. 그의 신형이 움직일 때마다 검붉은 잔상이 허공에 흩날렸다. 사병들이 인부들을 향해 불량 장도를 휘두르는 순간마다, 강우의 도집 끝이 전광석화처럼 뻗어 나가 그들의 검날 결함을 정확히 때렸다.
쩍! 쨍강! 쩌억! 쨍그랑!
사방에서 쇠가 유리처럼 깨져나가는 기괴한 소리가 연달아 연무장을 가득 메웠다. 오십 자루의 신형 장도들이 강우의 도집 타격 몇 번에 힘없이 동강 나며 땅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적들의 무력은 순식간에 완벽히 해체되었고, 사병들은 자신들의 손에 남은 부러진 칼자루를 바라보며 극도의 패닉에 빠져 비명을 질렀.
“요, 요괴다! 벙어리 놈이 도집을 툭 치기만 해도 칼이 스스로 깨진다!”
“무기가 썩었다! 장인 놈들이 우리를 기만했다!”
전선은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무기를 잃은 사병들은 분노한 인부들의 무쇠 망치와 곡괭이 아래 짓밟히며 비참하게 쓰러져 갔다. 강우는 그 혼란을 틈타 현철 장갑을 낀 왼손으로 적의 창날을 움켜잡아 가볍게 비틀어 부러뜨린 뒤, 사병들의 포위망을 낙엽 쓸듯 제압하며 철공소 본관 지하로 향하는 육중한 철문 앞으로 전진했다.
“막아라! 저 벙어리 놈을 절대로 지하로 들여보내지 마라!”
뇌풍이 멀리서 피를 토하며 철퇴를 휘둘러 부하들을 독려하려 했으나, 구만수와 민란군 인부들이 쇠사슬을 들고 뇌풍의 앞길을 가로막으며 포위망을 좁혔다. 뇌풍은 이전 강우와의 대결에서 입은 심각한 내상 때문에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인부들의 집단 타격에 가로막혀 고립되었다.
강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의 목적지는 오직 하나, 가문을 멸망시킨 13번째 원수 조필성이 숨어 있는 지하 깊은 곳의 용광로, ‘천뢰동’이었다.
쿵-!
강우는 왼손의 검푸른 현철 장갑에 무진경의 내력을 실어 천뢰동으로 향하는 거대한 무쇠 철문을 도집 끝으로 내리쳤. 쇠와 쇠가 부딪치는 고막을 찢는 듯한 마찰음과 함께 삼중으로 잠겨 있던 무쇠 빗장이 허무하게 부러져 나갔고, 철문이 요란하게 열리며 지하의 검은 심장부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 * *
철문 너머의 어둠 속으로 발을 디디는 순간, 살을 태울 듯한 극심한 열기와 지독한 유황 매연이 강우의 폐부를 사정없이 찔러왔다.
천뢰동(天雷洞).
그곳은 추풍곡 지하 깊숙이 맥동하는 천연 화산 맥의 끓어오르는 용암을 직접 끌어올려 무기를 주조하는 지옥의 구덩이였다. 사방의 암벽은 붉게 달아오른 용암의 열기로 인해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발밑 깊은 구덩이에서는 시뻘건 용암 파도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열독 가스를 뿜어내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기도가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밀려왔고, 강우의 피부는 뜨거운 열독에 노출되어 동상을 입듯 붉게 부풀어 오르며 맥박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강우는 오른손목의 부러진 뼈마디가 열기에 반응해 욱신거리는 고통을 참아내며, 천천히 지하 광장 중앙으로 연결된 외나무돌다리 위로 걸어 나갔.
광장 중앙, 용암 구덩이 바로 위에 위태롭게 솟아 있는 거대한 석조 제단 플랫폼이 있었다.
그곳에는 쇠사슬에 묶인 채 용암 위 허공에 밧줄 하나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인물들이 보였다. 강우의 가장 우직한 동료인 마동포와, 혀가 잘린 채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던 늙은 노예 장인들이었다. 그들의 발밑에는 펄펄 끓는 시뻘건 용암이 아가리를 벌린 채 튀어 오르고 있었다. 밧줄이 타들어 가거나 끊어지는 순간, 그들은 흔적도 없이 녹아내릴 처참한 인질극의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석조 제단 중앙, 화려한 비단 장포 위에 모피를 걸친 기름진 체구의 사내가 서 있었다.
추풍곡의 지배자이자, 5년 전 한양 한씨세가의 제철 도면을 훔치고 학살에 가담했던 13번째 원수, 조필성이었다.
조필성의 탐욕스러운 안광이 외나무다리를 타고 걸어오는 강우의 신형에 머물렀다. 그의 비열하게 비틀린 입술 사이로 광기 어린 웃음소리가 천뢰동 내부의 굉음과 뒤섞여 기괴하게 울려 퍼졌다.
“결국 여기까지 기어 들어왔구나, 한양 한씨의 망령 놈아.”
조필성은 천천히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 그의 손끝이 가문에서 약탈해 간 명검, 적뢰검(赤雷劍)의 자루를 움켜잡았다.
스으으윽-
조필성이 검을 뽑아 드는 순간, 천뢰동의 붉은 열기 속으로 지독하고 사나운 벼락같은 자색 검기가 크르릉거리며 피어올랐다. 가문의 신성한 쇠로 주조된 명검이 원수의 손에서 부정한 살기를 내뿜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 강우의 등 뒤에 감긴 적소도가 삼베천 속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며 피울음 쇳소리를 울려 퍼뜨리기 시작했다.
조필성이 적뢰검을 치켜들며 강우를 향해 광기 어린 조소를 던졌다.
“네놈이 도집치기라는 해괴한 기술로 내 사병들을 제압했다고 들었다만, 이 끓어오르는 용암 위에서도 그 껍데기만 남은 도집으로 내 적뢰검을 상대할 수 있겠느냐? 어서 그 녹슨 칼날을 뽑아보거라! 그렇지 않으면 저 쓸모없는 장인 놈들부터 차례로 용암 속의 땔감으로 던져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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