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끼가 된 소년, 억눌린 발도
비릿한 밤바람이 대나무 숲을 거칠게 흔들었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추풍곡 외곽의 산길을 달리는 한강우의 안색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약방 주변을 감시하던 적들의 눈을 피하느라 장 대인이 달여둔 설산삼즙(雪山삼즙)을 제때 복용하지 못한 대가였다. 가슴속 단전에서부터 치솟는 화독(火毒)이 목구멍을 찌를 때마다 기혈이 뒤틀렸고, 한삼과의 격전에서 스며든 왼손가락의 한기마저 뼈마디를 시리게 만들었다. 오른손목의 골절상 부위 역시 연희가 감아준 붕대 아래에서 둔탁한 통증을 내뿜고 있었다.
하지만 강우는 멈출 수 없었다. 청철공명결(聽鐵共鳴訣)을 통해 멀리서 들려오는 장 의원의 약방 주변의 미세한 철기 진동이 비정상적으로 요동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한 순찰대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살의를 품은 병기들이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도사리는 궤적이었다.
‘소철…… 장 대인……!’
강우는 이를 악물며 추풍삼보의 보법을 전개했다. 발끝이 지면에 닿을 때마다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는 신속한 신형이 숲그늘 사이를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윽고 대나무 숲이 끝나는 공터에 장 의원의 약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평소라면 은은한 약초 향기가 풍겨 나왔을 초라한 목조 가옥이었으나, 지금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코를 찌르는 매캐한 유황 냄새와 비릿한 피비린내였다. 약방의 판자문은 반쯤 부서진 채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강우는 숨을 죽인 채 약방 내부로 은밀히 잠입했다. 문틈 사이로 흘러나오는 희미한 등불 불빛 아래, 가혹한 지옥도가 펼쳐져 있었다.
“읍……! 으읍……!”
약방 구석의 의자에 늙은 의원 장 대인이 밧줄로 꽁꽁 묶인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의 하얀 수염은 검붉은 선혈로 얼룩져 있었고, 목덜미의 기맥 대혈에는 귀영의 묵침(墨針) 여러 자루가 깊숙이 박혀 기혈이 완전히 동결된 상태였다. 장 대인은 강우를 보자마자 눈을 부릅뜨며 들어오지 말라는 듯 고개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그러나 강우의 시선이 머문 곳은 그보다 더 높은 곳이었다.
약방 천장의 낡은 들보에 밧줄로 묶인 채 매달려 있는 왜소한 신형. 강우를 친형처럼 따르던 철공소의 고아 소년, 소철이었다. 소철의 뺨은 매질을 당한 듯 붉게 부어올라 있었고, 소년의 발밑에는 붉은 봉인이 찍힌 나무 상자 서너 개가 위태롭게 쌓여 있었다. 벽력당에서 극비리에 공수해 온 고성능 폭열 화약 상자들이었다.
그리고 그 화약 상자들 바로 옆, 어둠이 짙게 깔린 약통 보관함 그늘에서 회색 가면을 쓴 왜소한 신형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벽력당 암전조 조장, 귀영이었다.
귀영은 품속에서 시퍼런 사독이 발린 귀영의 독 비수를 꺼내 장난스럽게 손가락 사이로 굴렸다. 그의 가면 너머로 들려오는 음침한 웃음소리가 약방 내부의 무거운 공기를 찢었다.
“역시 제 발로 찾아왔군. 벙어리 아광…… 아니, 한양 한씨세가의 마지막 망령, 한강우 도련님.”
강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벙어리 행세를 유지하기 위함이기도 했으나, 끓어오르는 살기를 정심결(靜心決)로 다스려야만 뒤틀린 기혈이 폭주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깊고 어두운 안광이 귀영의 회색 가면을 차갑게 꿰뚫었다.
“네놈의 오두막 바닥에서 사철 늪지대의 쇳가루와 한삼의 핏자국을 발견했을 때 확신했지. 조태양의 단전을 깨부수고 뇌풍의 무기를 작살낸 고수가 바로 네놈이라는 것을. 하지만 한씨세가의 무공은 검을 뽑아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법.”
귀영이 천천히 다가가 공중에 매달린 소철의 목덜미에 독 비수의 날카로운 끝을 들이댔다. 소철의 앳된 목덜미에서 가느다란 핏줄기가 흘러내려 흙바닥으로 떨어졌다. 소철은 공포에 질려 눈물을 흘리면서도 강우를 향해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 증명해 보아라. 네놈 등 뒤에 삼베와 쇠사슬로 칭칭 감아둔 그 녹슨 도검이 전설의 신검 적소도(赤霄刀)가 맞는지. 어서 검을 뽑아 이 아이의 목숨을 구해 보란 말이다!”
귀영이 다른 한 손으로 불이 붙은 횃불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약방 바닥을 가로질러 화약 상자 내부로 연결된 검은 도화선 끝에 횃불을 가만히 가져다 대었다.
치이이익-!
화약 타는 냄새와 함께 도화선이 붉은 불꽃을 튀기며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불꽃이 화약 상자에 닿는 순간, 약방 전체는 흔적도 없이 날아갈 터였다.
“검을 뽑아 화약을 베어라! 그렇지 않으면 이 아이와 늙은 의원 놈은 고철 더미와 함께 재가 될 것이다! 왜 뽑지 못하는 거지? 설마 소문으로만 듣던 그 가혹한 혈약(血約)의 저주가 진짜란 말이냐?”
귀영의 비웃음 소리가 이명을 울렸다.
강우의 가슴속에서 무서운 살기가 폭발했다. 그의 왼손이 본능적으로 등 뒤에 메고 있던 적소도의 검자루를 향해 뻗어 나갔다. 검자루를 움켜잡고 힘을 주어 칼날을 칼집 밖으로 뽑아내려 한 찰나였다.
쿵-!
심장이 벼락에 맞은 듯 격렬하게 요동쳤다.
가문의 시조와 조부가 적소도에 걸어두었던 피의 맹세, ‘혈약의 맹세 규칙’이 강우의 전신 기맥을 사정없이 죄어왔다. 귀영은 가문을 멸망시킨 정파 십삼세가의 핵심 원수 13명 중 한 명이 아니었다. 제갈현의 수하인 일개 살수에 불과한 자 앞에서 검을 뽑으려 하자, 적소도의 칼날은 단 일 치도 움직이지 않은 채 칼집 내부에서 기괴한 피울음을 울려 퍼뜨렸다.
“우욱……!”
강우의 입가로 검붉은 피 한 움큼이 흘러내렸다. 억지로 내력을 끌어올려 발도하려 한 대가는 처참했다. 심장 주위의 경맥들이 불에 달군 쇠사슬로 죄는 듯한 극도의 고통과 함께 찢겨 나갔고, 기혈이 역류하여 시야가 일순간 핏빛으로 붉게 물들었다. 오른손목의 부러진 뼈마디에서도 비명이 터져 나왔다. 칼날은 삼베와 쇠사슬에 묶인 채 단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뽑을 수 없다…… 녀석은 원수가 아니다……!’
강우는 떨리는 손을 검자루에서 천천히 떼어냈다. 차가운 땀방울이 피와 섞여 턱끝으로 흘러내렸다. 가슴속 분노와 무력감이 그를 집어삼키려 했으나, 강우는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도 정신을 집중했다. 스승 풍간열의 가르침이 뇌리를 스쳤다.
‘칼날은 생명을 베나, 칼집은 위선을 깬다. 검을 뽑지 못하는 제약 속에서도 무인은 길을 찾아야 한다.’
강우는 떨리는 오른손을 내리고, 대신 왼손의 검푸른 현철 장갑(현철 장갑)을 쥔 채 적소도의 단단한 무쇠 도집(칼집)을 꽉 움켜쥐었다. 그의 안광이 귀영을 향해 불타는 용광로처럼 무섭게 빛나기 시작했다. 비록 검은 뽑지 못할지언정, 이 무거운 칼집과 맨손의 무공만으로 적을 파멸시키겠다는 단호한 의지였다.
귀영은 강우가 검에서 손을 떼고 도집만을 쥐자 실망스러운 듯 혀를 찼다.
“결국 칼을 뽑지 못하는 천치였군. 한양 한씨세가의 후계자라는 놈이 고작 이런 저주에 묶여 있다니 가소롭구나.”
귀영의 눈에 잔혹한 살기가 서렸다. 그는 소철의 목덜미를 겨누고 있던 독 비수를 쥔 손목을 가볍게 퉁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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