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참의 침묵, 사냥개의 최후
한삼의 손가락 끝이 붉게 빛나는 화염 구슬의 도화선 매듭을 당기려는 찰나, 사철 늪지대의 무거운 공기가 얼어붙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다 함께 지옥으로 가는 거다! 조필성 소주님의 군대가 들이닥치면 네놈과 그 대장장이 가시나년도 무사하지 못해!”
진흙 구덩이에 허리까지 빠진 채 한삼이 광기 서린 비명을 질렀다. 그의 손에 들린 화염 구슬이 핏빛 광채를 뿜어내며 늪지대의 검은 안개를 붉게 물들였다. 쇳가루 먼지 바람이 불어와 시야를 가렸고, 유독한 유황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일촉즉발의 위기. 저 구슬이 하늘 높이 솟구쳐 폭발하는 순간, 추풍곡의 모든 사병이 이곳으로 몰려와 은신처인 연희의 공방을 짓밟을 것이 분명했다.
강우는 눈을 감았다. 시각을 포기하자 주변의 모든 울림이 심안(心眼)으로 밀려들었다.
‘공명감지 청철술(聽鐵共鳴訣).’
사방을 가득 채운 사철 먼지들의 미세한 부딪침, 진흙 속에서 허우적대는 사병들의 거친 호흡, 그리고 한삼의 손에 들린 화염 구슬 내부의 철제 격발 장치가 내뿜는 미세한 금속 주파수가 강우의 머릿속에 한 폭의 선명한 그림처럼 그려졌다. 쇳소리의 진동을 읽는 가문의 비전 기예가 어둠 속에서 완벽한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스으윽.
강우의 신형이 검은 늪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사냥꾼 이춘삼에게 전수받은 ‘사철 늪지 생존결’의 신법이었다. 늪바닥 깊숙이 숨겨진 단단한 사철 디딤돌만을 정확히 밟아 나가는 그의 몸짓은 한 마리 가벼운 솔개와 같았다. 늪의 장력을 역이용해 허공을 가르는 강우의 기세에 한삼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 이 괴물 같은 놈!”
한삼은 마지막 발악으로 왼손의 화염 구슬 도화선을 당기며, 오른손에 쥔 장도로 가문의 살상 검초인 ‘한천수류검’의 종참을 내질렀. 가문의 무공을 훔쳐 사냥개 노릇을 하는 배신자의 칼날에는 시퍼런 독기와 검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좁은 공간에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검풍이 강우의 목덜미를 노렸다.
강우는 등 뒤의 적소도를 뽑지 않았다. 원수를 대면하기 전에는 절대로 검을 뽑을 수 없다는 혈약의 규칙이 심장을 옭아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신, 강우는 왼손을 번개처럼 뻗었다.
‘현철장갑 철벽방(鐵壁防).’
연희가 천년한철 조각을 밤새 두드려 제련해 준 검푸른 철 장갑이 어둠 속에서 차가운 신광을 발했다.
끼이이익-! 콰드득!
귀를 찢는 듯한 소름 끼치는 금속 파열음이 사철 늪지대의 무거운 침묵을 깨부수었다. 강우는 한삼이 내지른 장검의 칼날을 맨손 철 장갑으로 정면에서 움켜잡았다. 예리한 검날이 장갑 표면을 긁으며 붉은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삼의 검에 서린 음독과 검기가 현철 장갑의 방어벽에 부딪쳐 산산조각 났다.
철벽방의 기예가 검날의 물리적 충격을 대지로 흘려보냈지만, 천년한철의 지독한 냉기와 한삼의 내력이 장갑 내부로 미세하게 침투했다. 강우의 왼손 손가락 근육에 가벼운 마비 증상이 발생하며 손목의 뒤틀린 경맥이 시큰거렸으나, 강우는 안색 하나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움켜쥔 손아귀에 무진경의 진기를 폭발적으로 불어넣었다.
쩌어억! 쨍강!
명검이라 불리던 한삼의 장도가 수십 개의 쇳조각이 되어 공중으로 비산했다. 맨손으로 장검을 부러뜨리는 압도적인 무기 파괴 기예에 한삼은 넋을 잃었다.
“말도 안 돼…… 가문의 무공도 쓰지 않고 어떻게 맨손으로 내 검을……!”
한삼이 경악하며 뒤로 물러서려 했으나, 이미 그의 장화는 검은 진흙 깊숙이 옥죄어 있었다. 강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무거운 도집(칼집)을 고쳐 쥔 강우의 신형이 한 걸음 더 좁혀졌다.
‘무진경 침투劲(浸透勁).’
강우가 휘두른 도집 끝이 한삼의 오른쪽 쇄골과 기혈이 모이는 대혈을 정확히 강타했다. 겉 표면에는 멍 자국 하나 남기지 않았지만, 도집이 닿는 순간 폭발한 무진경의 진동이 한삼의 가죽과 근육을 우회하여 오장육부와 경맥 깊은 곳으로 직접 침투해 들어갔.
퍽!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한삼의 전신이 부르르 떨렸다. 체내의 모든 기혈이 일순간에 마비되며 단전의 진기가 뒤틀려 역류했다.
“끄아아악!”
한삼은 비명과 함께 검은 피를 한 움큼 토해내며 늪바닥으로 엎어졌다. 손에 쥐고 있던 화염 구슬이 힘없이 진흙 위로 굴러떨어졌다. 강우는 소리 없이 다가가 발끝으로 구슬을 걷어차 늪지대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었다. 치익 소리와 함께 화염 구슬은 흔적도 없이 차가운 진흙 속으로 가라앉았다. 조필성의 본대를 부를 유일한 신호가 무력화된 순간이었다.
사방은 다시 음습한 안개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늪에 갇힌 사병들은 이미 진흙의 장력에 이기지 못하고 어깨까지 가라앉아 단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했다.
강우는 진흙 속에 쓰러져 허우적대는 한삼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벙어리 아광의 연기를 유지하듯 그의 입술은 여전히 다물려 있었지만, 내려다보는 두 눈동자만큼은 활활 불타오르는 용광로처럼 뜨거운 살기를 품고 있었다.
“도, 도련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양팔의 관절이 뒤틀려 마비된 한삼이 머리를 진흙에 처박으며 울부짖었다. 죽음의 공포가 그의 영혼을 잠식했다. 가문을 배신하고 조필성의 사냥개로 살며 부귀영화를 누리려 했던 자의 비참한 말로였다.
“제가 배신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닙니다! 제 가솔들의 목숨이 조필성 그 악마 같은 자식의 손에 쥐여 있었습니다! 가문을 밀고하지 않으면 제 자식들의 목을 베겠다고 협박했단 말입니다!”
한삼의 비굴한 변명이 늪지대의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강우는 여전히 침묵했다. 배신자에게 베풀 자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비명 소리와 불타던 대장간의 불꽃이 그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강우가 도집 끝을 천천히 들어 올려 한삼의 목덜미를 겨누자, 한삼은 절박하게 소리쳤다.
“비밀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조필성이 숨겨둔 진짜 음모를 자백할 테니, 제발 목숨만은……!”
강우의 도집 끝이 한삼의 목덜미 바로 앞 일 치 거리에서 멈췄다. 강우의 깊은 안광이 자백을 재촉했다.
“조, 조필성의 침전 지하 깊은 곳에 강철로 지어진 비밀 금고가 있습니다……! 그곳에 가문에서 약탈해 간 제철 비급, ‘야철유서 제1장’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림맹주 독고성이 5년 전 한씨세가를 마교로 몰아세워 멸문시키라고 조필성에게 내렸던 비밀 서신, ‘독고성의 비밀 조서’의 원본도 그 금고에 숨겨져 있습니다!”
한삼의 입에서 터져 나온 진실은 강우의 심장을 세차게 흔들었다. 가문의 잃어버린 궁극의 야철 비급과, 부친에게 누명을 씌운 만악의 근원인 무림맹주 독고성의 배후 음모를 증명할 결정적 물증이 조필성의 비밀 금고에 잠들어 있다는 사실.
“그 금고는 특수한 기계 장치로 잠겨 있어, 조필성의 인장이 없으면 여는 순간 화약이 폭발해 모든 비급이 타버리게 설계되어 있습니다! 인장은…… 인장은 조필성이 항상 지니고 있지만, 그 예비 인장 하나를 내가 품속에 숨겨두었습니다! 제발 살려만 주신다면……”
말을 마친 한삼의 호흡이 급격히 가빠졌다. 그의 하반신은 이미 사철 늪지대의 지독한 냉기와 검은 진흙 속에 완전히 잠겨 들어가고 있었다. 이 늪지대는 한 번 빠지면 외부의 도움 없이는 절대 스스로 빠져나올 수 없는 죽음의 수렁이었다.
강우는 묵묵히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한삼의 가슴팍 품속을 뒤져 흙먼지가 잔뜩 묻은 묵직한 철물 하나를 꺼내 들었다.
스으윽.
강우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기괴하고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조그만 무쇠 인장이었다. 조필성의 비밀 금고 기계 장치를 안전하게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자 예비 인장이 틀림없었다. 인장을 움켜쥔 강우의 오른손목에서 검붉은 진기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도련님…… 제발 끌어당겨 주십시오…… 진흙이 가슴까지 차오릅니다…… 제발!”
한삼이 애원하며 손을 뻗으려 했으나, 마비된 그의 양팔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강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배신자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내려다본 뒤, 천천히 뒤를 돌아섰. 그의 발걸음은 사철 늪지의 디딤돌을 딛고 소리 없이 멀어져 갔다. 가문을 파멸로 이끌고 부모님의 피를 흘리게 만든 자에게 허락될 자비는 오직 차가운 대지의 심판뿐이었다.
“도련님! 한강우! 살려줘! 으아아악!”
등 뒤에서 한삼의 절망적인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으나, 이내 검은 진흙이 그의 입안으로 흘러들며 둔탁한 울음소리로 변했다. 구글거리던 소리는 이내 늪지대의 차가운 안개 속으로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가문의 사냥개는 그렇게 자신이 저지른 대죄의 무게를 짊어진 채, 검은 늪바닥 깊은 곳으로 영원히 가라앉았다.
강우는 숲속 나뭇가지 위에 서서 품속의 무쇠 인장을 꽉 쥐었다. 쇳덩이의 차가운 감촉이 그의 손바닥을 파고들며 가슴속 복수의 칼날을 더욱 날카롭게 벼렸다.
첫 번째 원수인 조필성을 단죄하고 가문의 명예를 복구할 첫 번째 열쇠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이제 남은 것은 추풍곡 지하 용광로에서 기다리고 있는 조필성의 목을 베는 일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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