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철 장갑, 무거운 약속
추풍곡의 밤은 깊고도 잔혹했다. 뇌풍의 무시무시한 백근 철퇴를 도집만으로 받아내고 격퇴한 대가는 혹독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협곡의 숲길을 걸으며, 한강우는 오른팔 전체가 마비되는 듯한 극심한 통증에 숨을 죽였다. 장포 소매 아래로 드러난 오른손목은 이미 정상적인 형태를 잃은 채 시퍼렇게 부어올라 있었다.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뼈마디가 어긋나는 둔탁한 마찰음이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뇌리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우윽……”
입안 가득 차오르는 뜨거운 핏물을 꿀꺽 삼켰다. 목소리를 내지 않는 벙어리 ‘아광’의 가면을 유지하기 위해, 강우는 단 한 자락의 신음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오직 단전 깊은 곳에서 무진경의 차가운 진기를 끌어올려 뒤틀린 기혈을 억누를 뿐이었다.
하늘에는 뇌풍이 선포한 추풍곡 전체 폐쇄 계엄령의 여파로 횃불을 든 사병들의 그림자가 일렁이고 있었다. 협곡의 좁은 통로마다 조필성의 정예 순찰대가 배치되어 숨통을 조여왔다. 강우는 가시덤불이 우거진 험준한 절벽 바위틈을 보이지 않는 그림자처럼 은밀하게 기어올랐다. 오른손을 쓸 수 없었기에, 오직 왼손으로 적소도의 도집을 꽉 쥔 채 온몸의 무게를 지탱하며 전진했다. 손목에 감긴 연희의 붉은 실이 살을 파고들며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 미세한 자극만이 그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유일한 닻이었다.
마침내 깎아지른 절벽 중턱, 바람에 날리는 대나무 잎사귀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오는 깊은 숲속에 당도했다. 빽빽한 대나무 숲을 헤치고 들어가자, 바위벽 뒤에 교묘하게 숨겨진 작은 목조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멸문지화의 날 밤 살아남은 가문의 장인들이 은밀히 세운 후방 비밀 기지, ‘연희의 공방’이었다.
사리문이 열리며 희미한 등불을 든 여인이 나타났다. 수수한 마의 차림새에도 감출 수 없는 수려한 미모를 지닌 처자, 연희였다. 그녀는 피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는 강우를 보자마자 등불을 떨어뜨릴 뻔했다. 연희는 급히 그의 왼팔을 부축해 공방 안쪽의 지하실 밀실로 이끌었다.
밀실 문이 닫히고 쇠 냄새와 은은한 약초 향이 코끝을 스쳤다. 연희는 강우를 침상에 앉히고, 조심스럽게 그의 찢어진 소매를 걷어 올렸다. 시퍼렇게 죽은피가 몰려 퉁퉁 부어오른 손목을 마주한 그녀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눈물이 소리 없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도련님……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신 겁니까……”
강우는 대답 대신 묵묵히 그녀의 눈을 응시했다. 연희는 서둘러 가문 비전의 정밀 제철 침인 ‘한철미침’을 꺼내 들었다. 그녀의 고운 손가락 끝이 강우의 부러진 손목 뼈마디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뼈가 미세하게 조각나 어긋나 있습니다. 지금 당장 맞추지 않으면 평생 오른손을 쓰지 못하실 수도 있습니다. 고통이 심할 터이니, 제발 참으셔야 합니다.”
연희는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고 강우의 심장 혈도 몇 군데에 침을 놓아 기혈의 폭주를 일시적으로 차단했다. 그리고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꽉 쥐고, 어긋난 뼈 조각들을 원래의 위치로 맞추기 시작했다.
드드득, 뚝.
뼈와 뼈가 부딪치며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괴하고 둔탁한 소리가 밀실에 울렸다. 전신이 찢겨 나가는 듯한 가혹한 고통이 강우의 뇌리를 강타했다. 이마에 주먹만 한 땀방울이 맺히고 전신이 바르르 떨렸지만, 강우는 입술을 깨물 뿐 단 한 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않았다. 그의 눈빛은 여전히 불타는 용광로처럼 뜨겁고도 초연했다. 연희는 그런 강우의 모습이 더욱 안타까워 눈물을 흘리며 지극정성으로 뼈를 맞추고 약즙을 바른 뒤 단단히 붕대를 감았다.
치료가 끝나자, 연희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밀실 구석의 대형 화로 앞으로 걸어갔. 화로 옆 석조 보관함에서 그녀는 검푸른 광채를 내뿜는 묵직한 쇳덩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차가운 한기가 밀실 전체로 퍼져나갔다. 조필성의 삼엄한 무기고 깊은 곳에서 소철이 목숨을 걸고 빼돌린 전설의 광석, ‘천년한철 조각’이었다.
“도련님께서 검을 뽑지 못하고 도집치기만으로 싸우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반 철로 장갑을 단조해 보려 했으나……”
연희는 화로 바닥에 쪼개져 버려진 철판 조각들을 가리켰다.
“도련님이 방출하시는 무진경의 진동과 도집이 부딪칠 때 발생하는 물리적 반동을 일반 철은 견디지 못하고 제련 과정에서 쪼개지고 말았습니다. 오직 이 천년한철만이 그 무시무시한 반동의 파동을 스스로 흡수하고 상쇄할 수 있습니다.”
연희는 천년한철 조각을 불길이 끓어오르는 용광로 속에 밀어 넣었다. 화로의 온도를 극한으로 올리기 위해 그녀는 밤새 풀무질을 멈추지 않았다. 붉은 화염은 천년한철의 한기와 만나 푸른빛을 띠며 사납게 요동쳤다.
깡-! 깡-!
이윽고 달구어진 철괴를 모루 위에 올린 연희가 망치를 내리치기 시작했다. 쇠가 부딪치는 맑고 웅장한 소리가 밀실을 가득 채웠다. 연희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방울이 시뻘건 철판 위로 떨어져 치익 소리를 내며 기화했다. 밤새 단조를 계속하는 그녀의 여린 손가락 끝에는 뜨거운 불똥에 덴 붉은 화상 상흔이 하나둘 늘어갔지만, 그녀는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가문의 도검을 주조하던 대장장이의 피가 그녀의 몸속에서 뜨겁게 맥동하고 있었다.
강우는 묵묵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자신을 위해 밤새 몸을 불사르는 여인의 헌신을 바라보며, 그의 가슴속 차가운 복수심 뒤에 묻혀 있던 따뜻한 유대감이 묵직하게 차올랐.
새벽빛이 대나무 숲 틈새로 스며들 무렵, 마침내 검푸른 빛을 발하는 웅장한 특제 보구가 완성되었다. 손바닥과 손목 전체를 두꺼운 천년한철 판과 질긴 쇠가죽으로 보강한, 무겁고 차가운 ‘현철 장갑’이었다.
연희는 지친 몸을 이끌고 강우에게 다가와 그의 부어오른 오른손에 장갑을 조심스럽게 끼워주었다. 그리고 쇠가죽 끈을 단단히 조여 고정했다.
강우가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장갑 내부에서 흘러나오는 천년한철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부러진 손목 뼈의 열독을 식혀주었고, 주먹을 꽉 쥘 때마다 도집치기의 반동을 완벽히 흡수할 수 있을 듯한 단단한 질감이 전해졌다. 이 장갑만 있다면, 앞으로 무진경 2성의 강력한 내경을 뿜어내도 손목 뼈가 바스러질 염려는 없을 터였다.
연희는 강우의 장갑 낀 손목 위에, 자신이 품고 있던 붉은 실을 정성스럽게 묶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애틋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도련님, 이 무거운 약속을 잊지 말아 주세요. 복수가 끝나면…… 가문의 원수들을 모두 베고 나면, 반드시 이 손으로 망치를 쥐고 평범한 대장장이로 제 곁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강우는 소리를 내어 대답할 수 없었지만, 깊고 형형한 눈빛으로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침묵 속에 깃든 그의 눈빛은 세상의 어떤 백년가약보다 무겁고 단단한 맹세였다. 연희는 비로소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눈물을 닦았다.
그러나 평화는 길지 않았다. 아침 교대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강우는 서둘러 철공소로 복귀해야 했다. 현철 장갑을 장포 소매 속에 은밀히 숨긴 채, 강우는 공방을 나와 협곡의 은밀한 숲길을 따라 신속히 하산했다.
철공소 외곽의 고철 폐기장 근처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수풀 속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 잔심부름을 하던 영리한 고아 소년, 소철이었다. 소철의 얼굴은 흙먼지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눈동자는 극도의 공포로 흔들리고 있었다.
“형, 형님! 큰일 났어요!”
소철이 강우의 소매를 붙잡고 숨을 헐떡이며 극비리에 경보를 울렸다.
“가문의 배신자이자 조필성의 사냥개인 한삼(한삼) 그자 자식이…… 벌써 사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형님의 오두막 주변을 샅샅이 포위하고 수색하기 시작했어요! 형님이 자리를 비운 걸 들키는 건 시간문제예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강우의 소매 아래 감춰진 현철 장갑이 차갑게 반응하며 검붉은 진기가 미세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또 다른 피비린내 나는 추격과 대결의 서막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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