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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불꽃, 아광이라 불리는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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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곡(秋風谷)의 한낮은 늘 검은 장막에 가려져 있었다. 하늘에서 내려앉는 것은 따스한 햇살이 아니라, 사방의 높은 절벽에서 불어오는 사철(沙鐵) 먼지와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매연뿐이었다. 수백 개의 화로가 밤낮없이 벌건 쇳물을 뱉어내는 곳. 이곳 추풍 철공소는 인간의 피와 땀을 가마솥에 넣고 끓여 무기를 찍어내는 거대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어이, 아광! 풀무질 안 멈추냐! 불길 죽으면 네놈 가죽을 벗겨서 풀무에 붙여버릴 줄 알아!”


거친 가죽 채찍을 쥔 감시자의 고함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렸다.


한강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그는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잡역부 ‘아광’이었으니까. 강우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터질 듯한 팔근육으로 풀무의 손잡이를 밀고 당겼다. 화로 내부의 불꽃이 그의 그을린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그의 회색 마의(麻衣)는 이미 검은 그을음과 땀으로 범벅이 되어 살갗에 쩍쩍 달라붙어 있었다.


강우의 등 뒤에는 두꺼운 삼베천과 묵직한 쇠사슬로 칭칭 감아 고정한 거대한 도검이 짊어져 있었다. 붉은 녹이 가득 슬어 칼집에서 한 치도 빠지지 않는 가문의 신검, 적소도(赤霄刀)였다.


‘아직은 아니다.’


강우는 마음속으로 뜨겁게 끓어오르는 살기를 억눌렀다. 5년 전, 한양 한씨세가를 마교의 프락치로 몰아세워 피바다로 만들었던 정파 십삼세가(十三世家). 그 학살의 길잡이 노릇을 했던 자가 바로 이 추풍곡을 지배하는 13번째 원수, 조필성이었다. 원수의 목을 베기 전에는 절대로 칼을 뽑을 수 없다는 ‘혈약(血約)’의 저주가 그의 단전과 심장을 단단히 묶고 있었다.


“으욱……!”


그때, 대장간 한편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친 신음이 들려왔다.


강우가 고개를 돌리자, 구릿빛 피부의 거한 마동포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쇠를 두드리던 마동포가 극심한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제련 중이던 철괴를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철괴가 흙바닥에 박히며 매캐한 연기를 뿜어냈다.


“이 미련한 돼지 새끼가, 감히 맹주님께 바칠 한철(寒鐵) 무기 제련을 망쳐?”


가죽 안대를 찬 애꾸눈의 사내, 광산 감독관 독안귀(毒眼鬼)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손에는 독물이 시퍼렇게 발린 가시 채찍, 적사편(赤蛇鞭)이 들려 있었다. 독안귀의 잔혹한 눈빛이 쓰러진 마동포를 향해 번뜩였다.


“일하지 않는 노예는 고철만도 못한 법이지. 네놈의 다리뼈를 바스러뜨려 주마.”


독안귀가 채찍을 치켜들었다. 휙,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붉은 독기가 서린 채찍이 마동포의 등덜미를 향해 내리쳤다. 마동포는 두려움에 눈을 감았다.


짝-!


살가죽이 찢어지는 비명 대신, 둔탁하고 무거운 마찰음이 철공소 내부에 울려 퍼졌다.


독안귀의 눈이 커졌다. 마동포의 등 뒤를 막아서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벙어리 잡역부 아광이었다. 강우는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척 마동포의 앞을 가로막았고, 독안귀의 가시 채찍은 강우의 등판을 정면으로 때렸다.


“이 벙어리 새끼가 미쳤나?”


독안귀가 채찍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강우의 등 뒤 장포가 찢어지며 시뻘건 피가 배어 나왔다. 채찍 끝에 발려 있던 화독(火毒)과 묵직한 내력이 강우의 척추를 타고 뼈 속 깊숙이 침투해 들어왔다. 일반적인 삼류 무인이라면 척추가 부러지고 장기가 파열되어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일격이었다.


하지만 강우의 눈빛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무진경 1성(無진소식).’


강우는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심법의 구결을 읊조렸다. 그의 단전 깊은 곳에서 정체 모를 차가운 진기가 실핏줄처럼 뿜어져 나와 척추를 감쌌다. 침투해 들어온 독안귀의 사악한 화독과 타격력은 강우의 뼈 속 깊이 숨겨진 내력의 막에 부딪쳐 산산이 분쇄되었다. 강우는 하체를 단단히 고정하는 강골보(強骨步)의 요결을 응용하여, 몸으로 받아낸 충격을 발바닥을 통해 대장간의 흙바닥 깊숙한 곳으로 흘려보냈다. 쿵, 그의 발밑 먼지가 미세하게 사방으로 튕겨 나갔을 뿐이었다.


그 순간, 강우의 오른손 손가락이 발작하듯 미세하게 떨렸다. 본능적으로 등 뒤에 감긴 적소도의 도검 손잡이를 움켜쥐려 한 것이었다.


두근-!


그가 도검에 손을 대려 하자마자, 심장 한가운데 박힌 혈약의 낙인이 불타오르듯 요동쳤다. 원수가 아닌 자에게 칼을 뽑으려 한 대가였다. 심장이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에 강우는 이를 악물고 오른손을 강제로 거두었다. 입안 가득 쇠 냄새가 나는 핏물이 고였지만, 그는 묵묵히 삼켜냈다.


독안귀는 아광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맷집 하나는 미련할 정도로 튼튼한 놈이군. 소처럼 뼈가 단단한 녀석인가?”


독안귀는 자신의 채찍을 버텨낸 아광의 기이한 신체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내력의 반응이 전혀 감지되지 않자 그저 맷집이 좋은 천한 노예일 뿐이라 치부했다. 그는 채찍을 거두며 퉤 침을 뱉었다.


“오늘 밤은 이 정도로 넘어가지. 하지만 내일부터는 광산 가장 깊고 가혹한 막장 구역으로 기어 들어가라. 그곳에서도 그 단단한 뼈가 버텨내는지 보마.”


독안귀는 차가운 경고를 남긴 채 등을 돌려 사라졌다. 마동포는 눈물을 흘리며 강우의 손을 잡았고, 강우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인 채 찢어진 등을 삼베천으로 감쌌다.


그날 밤, 어두운 오두막으로 돌아온 강우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뒤틀린 기혈을 다스렸다. 찢어진 등의 상처보다, 혈약의 제약을 어기려 했을 때 심장에 가해진 충격이 더 뼈아팠다.


그가 천천히 호흡을 정리하며 등 뒤의 적소도를 내려놓으려던 찰나였다.


징-!


독안귀가 흘린 채찍 끝의 잔류 기운이 강우의 등 뒤에 감긴 적소도의 거친 쇠사슬을 미세하게 울렸다. 쇳소리가 어둠 속에서 낮게 공명하자, 강우의 가슴속에 새겨진 혈약의 낙인이 붉게 요동치며 복수만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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