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작령 세무서의 올가미
어스카론 장벽 도시에 푸르스름한 새벽안개가 걷히고 탐욕스러운 아침 햇살이 들이치기 시작한 시간.
준서 상회 본점 2층에 위치한 상단주 집무실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책상 뒤에 앉은 최준서는 지독한 편두통을 억누르며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지난밤, 절벽 동굴 창고를 습격한 ‘검은 이빨’의 기습을 퇴치하는 과정에서 계약의 주사위를 무리하게 가동한 여파였다.
현재 영혼 과부하 한계치는 65%.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양쪽 안구는 붉은 실핏줄로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숨을 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타들어 가는 듯한 미세한 열감이 느껴졌다. 마력이 전혀 없는 무마력 영혼 바인더 체질이 감내해야 하는 필연적인 대가였다. 하지만 준서는 눈앞에 쌓인 서류들을 바라보는 눈빛만은 주판알을 튕기듯 냉정하고 정교하게 유지했다. 상인이 포커페이스를 잃는 순간, 그것은 곧 파멸을 의미했기에.
사각, 사각.
방 안의 고요를 깨는 것은 서기 안나가 깃털 펜으로 이중 장부를 정리하는 소리뿐이었다. 칼같이 다려진 짙은 청색 서기복을 입은 안나는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손길로 장부를 넘겼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의 문이 열리며 듬직한 체구의 경비대장 카일이 들어섰다. 그의 은빛 흉갑에는 어젯밤의 전투 흔적인 가벼운 그을음이 남아 있었다. 카일은 준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무거운 목소리로 보고했다.
“상단주님, 예상이 맞았습니다. 장벽 도시 남문 방향에서 백작령 세무서의 사설 군대와 세관 경비병들이 이쪽을 향해 급속도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선두에 선 자는…….”
“내 사촌 형제, 최민수겠지.”
준서가 나직하게 말을 가로챘다. 그의 입꼬리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지난밤 생포한 검은 이빨의 행동대장 그림의 품에서 나온 카스텔 백작의 비밀 서신. 그 서신에는 철혈 상회와 백작령이 결탁하여 준서 상회를 합법적으로 압류하려는 세무 공작의 전말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무력 습격이 실패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행정적 올가미를 들이미는 꼴이 참으로 귀족들의 수법다웠다.
“엘리시아는 어디 있습니까?”
준서의 질문에 카일이 위쪽 천장을 슬쩍 바라보았다.
“2층 다락방 그늘 속에서 ‘바람의 노래’를 쥔 채 상단주님을 주시하고 있습니다. 만약의 사태가 벌어지면 즉각 저격을 개시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시아와의 영혼 계약 등급은 현재 2단계 파트너십 진입 직전의 40% 수준. 그녀는 이제 준서를 단순한 소유주가 아닌, 자신의 목숨을 빚진 동반자로 인식하며 강한 수호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든든한 바람의 장벽이 배후에 있음을 확인한 준서는 책상 위에 놓인 두꺼운 제국 세법 서류철을 가볍게 두드렸다.
우우우웅-!
그때, 준서 상회 1층 로비 아래에서 묵직한 철제 구두 굽 소리와 함께 거친 고함성이 벽을 타고 올라왔다.
“백작령 공인 세무 감사다! 상회 내부의 모든 인원은 제자리에 멈추고 장부를 지참해라! 저항하는 자는 영주님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겠다!”
쥐새끼처럼 날카롭고 얄팍한 목소리. 준서의 사촌 형제이자 카스텔 백작령의 하급 세무 관료인 최민수의 목소리였다.
준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붉게 충혈된 눈을 가리기 위해 청색 상인 로브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오른손에는 주사위 모양의 계약 해제석을 은밀히 쥐었다.
“카일, 안나. 내려갑시다. 귀한 손님들이 오셨으니 마중을 해야지요.”
1층 로비로 내려가자, 평화롭던 잡화점 내부는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가죽 갑옷을 입은 백작령 세무 경비병 서른 명이 장검을 빼든 채 진열대를 헤집고 있었고, 싹싹하게 손님을 맞이하던 위장 점원 피터는 경비병들의 창끝에 가로막혀 벽에 붙어 있었다.
그 난장판의 중심에, 깃을 바짝 세운 세무 관료 제복을 입은 최민수가 거들먹거리며 서 있었다. 그의 옆에는 배가 불룩 나오고 머리가 벗겨진 탐욕스러운 인상의 사내, 장벽 도시의 부패한 세관장 디트마르가 세관 공인 압류 인장을 만지작거리며 준서를 쏘아보고 있었다.
“오, 사촌 동생. 드디어 얼굴을 보여주는군.”
최민수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품속에서 붉은 밀랍 봉인이 찍힌 세무 감사 영장을 꺼내 흔들었다.
“백작령 세무서의 정식 명령이다. 준서 상회는 최근 급격한 매출 상승에 따른 ‘특별 군세’ 납부 의무를 기피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장 금화 10,000닢을 납부하지 않으면, 이 상회 건물과 지하 창고에 보관된 모든 에테르 원석을 백작 가문의 자산으로 합법 압류하겠다.”
금화 10,000닢.
평소 납부해야 할 세금의 무려 열 배가 넘는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상회의 유동 자금을 단숨에 마비시켜 파산으로 몰고 가려는 비열한 독소 올가미였다. 디트마르 세관장이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침을 삼키며 거들었다.
“이봐, 젊은 상단주. 법은 엄격한 법이지. 돈이 없다면 구질구질하게 버티지 말고 저 뒤쪽 창고 문이나 열어두는 게 좋을 거야. 우리 감사관들이 아주 샅샅이 뒤져줄 테니까.”
디트마르의 손짓에 세관 소속의 정밀 감사관 세 명이 돋보기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주판을 들고 앞으로 나섰다. 그들의 손에는 미세한 마법 오차나 위조 정황을 붉은빛으로 감지해 내는 황실 특제 감사 도구가 들려 있었다. 그들은 상회의 장부를 강제로 압수해 에테르 밀무역과 불법 이종족 고용 흔적을 찾아내려 눈을 불을 켜고 있었다.
최민수는 준서의 야윈 체구와 붉게 충혈된 눈을 보며 승리를 확신한 듯 킥킥거렸다.
“어떠냐, 사촌 동생? 주판알 좀 튕긴다고 무법지대에서 영주님 머리 위에 서려 했던 대가치고는 제법 매서운 올가미지? 네까짓 약골 빚쟁이가 감당할 수 있는 판이 아니다.”
그러나 최준서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포커페이스는 얼음처럼 차가웠고, 오히려 후드 그늘 속에서 황금빛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준서는 조용히 오른손의 계약 주사위를 만지작거리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안나 서기, 감사관들에게 우리 상회의 공식 세무 장부를 전달하십시오.”
안나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와 가죽 표지의 두꺼운 장부를 탁자 위에 툭 내려놓았다. 그것은 안나와 윤 서생이 밤새도록 제국 세법의 감시망을 분석하여 정밀하게 조작해 낸 ‘위조된 제국 세무 장부’였다. 에테르 밀무역 내역은 일반 허브 및 생필품 거래로 완벽히 쪼개어 돈세탁을 마쳤고, 엘리시아와 카르디아의 고용 내역은 펠릭스 행정관의 서명이 찍힌 합법적인 시민권을 기반으로 한 ‘전문 기술 자문 계약’으로 위장되어 있었다.
“흥, 어디 얼마나 그럴듯하게 위조했는지 볼까?”
디트마르의 감사관들이 달려들어 장부를 펼쳤다. 그들은 특제 감사 안경을 쓰고 장부의 종이 섬유 하나, 잉크의 미세한 마력 흐름 하나까지 돋보기로 샅샅이 감정하기 시작했다.
일순, 로비 내부에 팽팽한 침묵이 감돌았다. 감사관들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들은 장부의 숫자를 주판으로 수십 번 연산하고, 위조 마법 반응을 감지하려 마력을 주입했으나 장부는 기이할 정도로 완벽했다. 단 1%의 미세한 마법 오차도, 회계상의 불일치도 감지되지 않았다. 안나가 사전에 0.01%의 잉크 마력 농도까지 완벽하게 제어하여 수기로 작성한 결과물이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어, 어째서 흔적이 없지?”
감사관 한 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디트마르에게 속삭였다.
“장부가…… 완벽합니다. 에테르 거래는커녕 일반 잡화 세금 납부 내역까지 단 1센트의 오차도 없이 합법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위조 반응도 전혀 검출되지 않습니다.”
“뭐라?! 그럴 리가 없다! 이 빚쟁이 놈이 그런 거액의 금화를 굴릴 리가 없어!”
최민수의 얼굴이 일순 굳어졌다. 그는 성급하게 앞으로 걸어 나와 장부를 빼앗아 들었지만, 세무 관료인 그의 눈으로 보아도 장부는 제국의 표준 회계 방식을 완벽히 준수하고 있었다.
“장부가 깨끗하다고 해서 세금 폭탄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최민수가 이성을 잃고 악을 썼다.
“장부 수색은 형식일 뿐이다! 당장 금화 10,000닢을 일시불로 납부하지 못하면, 이 세무 감사 영장에 따라 상회 건물 전체와 지하 창고를 강제 압류하겠다! 경비병들, 당장 저 뒤쪽 창고 문을 부수고 진입해라!”
경비병들이 창끝을 겨누며 창고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카일이 장검의 자루를 꽉 쥐며 준서의 신호를 기다렸다. 2층 다락방 그늘 속에서 미세한 바람의 소용돌이가 일렁였다. 엘리시아의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는 소리였다.
하지만 준서는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그리고 품속에서 또 다른 황금색 마법 인장이 찍힌 서류 한 장을 여유롭게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유감스럽게도 최민수 감사관, 그리고 디트마르 세관장님. 준서 상회는 오늘 새벽을 기해 공식적으로 ‘파산 보호 신청’을 완료했습니다.”
“……뭐?”
최민수의 눈이 크게 찢어졌다.
준서가 서류를 한 장씩 넘기며 냉정하게 읊조렸다.
“여기 암시장 금융가 바실리 어르신이 보증하고 발행한 무기명 채권 증서가 있습니다. 준서 상회는 현재 바실리 금융소에 금화 30,000닢의 막대한 부채를 지고 있으며, 상회의 모든 실질 자산과 에테르 원석의 소유권은 채무 불이행에 따라 이미 동맹 상단인 ‘바실리 연합 상회’로 합법적으로 우회 양도 및 동결 처리되었습니다. 제국 파산법 제7조에 의거하여, 파산 보호 신청이 접수된 상단의 자산은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 그 어떤 지방 영주나 세무서도 강제로 압류할 수 없습니다.”
“이, 이 비열한 놈이……!”
디트마르 세관장의 대머리에 핏대가 솟구쳤다. 준서가 상회의 모든 현금 자산을 암시장 채권으로 세탁해 텅 빈 껍데기만 남겨두고, 법적인 방어막을 쳐버린 것이다. 그들이 창고를 열어봤자 법적으로 바실리의 소유로 등록된 물건들이기에 손을 대는 순간 암시장 금융 연합 전체와 전면전을 치러야 했다.
“파산 보호 신청 따위로 영주님의 권위를 피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최민수가 영장을 흔들며 최후의 발악을 했다.
“이곳은 백작령이다! 영주님의 특별세는 제국의 일반 파산법보다 우선한다! 당장 압류를 집행해라!”
“과연 그럴까요?”
준서가 후드 아래로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두꺼운 제국 세법 책을 펼쳐 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한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카스텔 백작령 세법 특별 시행령 제14조를 보십시오. ‘영지 내에서 새롭게 등록된 신흥 소상인 및 복합 농업 조합은 영지의 특별 군세 및 지방세 부과 대상에서 3년간 전면 제외된다.’ 준서 상회는 어제 날짜로 펠릭스 행정관의 정식 결재를 받아 ‘아스카론 복합 농업 조합’으로 이중 등록을 완료했습니다.”
준서가 펠릭스 행정관의 친필 서명과 황금색 특별 무역 통행증의 마법 인장이 찍힌 증명서를 탁자 위에 내던졌다.
“여기 황실 공인 자작의 보증 날인이 찍힌 공식 사본이 있습니다. 백작령 세법 스스로가 제정한 예외 조항과 황실의 보증이 존재하는데, 감사관인 네놈이 무슨 권한으로 영주님의 법을 스스로 어기며 압류를 집행하겠다는 겁니까? 이 서류를 찢는 순간, 네놈들은 영주님의 법률을 모독하고 황실의 보증을 짓밟은 반역죄로 다스려질 것입니다.”
“……윽! 으윽!”
최민수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서류에 찍힌 황금색 마법 인장은 진짜 제국 행정관의 마력이 깃들어 있어 함부로 훼손할 수 없었다. 법의 허점을 완벽하게 파고들어 자신들의 영장을 무력화시킨 준서의 치밀한 뇌지컬 앞에, 최민수와 디트마르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들은 군대를 거느리고도 준서 상회의 단 1센트의 자산도, 에테르 한 조각도 건드릴 법적 명분을 잃어버렸다. 주변의 경비병들도 황실의 인장이 찍힌 서류를 보며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창끝을 내렸다.
“……돌아가자.”
디트마르 세관장이 이를 갈며 최민수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더 버텨봤자 자신들의 불법 수탈 정황과 뇌물 수수 혐의만 역으로 노출될 뿐이었다.
“두고 보자, 최준서. 네놈이 법전 뒤에 숨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보지.”
최민수가 독사 같은 눈빛으로 준서를 노려보며 영장을 구겨 쥐었다.
백작령의 오만한 감사관들과 세관 군대가 한밤중의 기습 패배에 이어 행정적 대결에서도 처참하게 완패한 채, 꼬리를 내리고 상회 본점 문밖으로 허둥지둥 퇴각하기 시작했다. 로비 내부에 통쾌한 승리의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준서의 황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퇴각하는 적들의 배후를 투시하던 그의 눈에, 최민수가 디트마르의 귓가에 대고 음밀하게 속삭이는 입 모양이 선명하게 읽혔다.
- 디트마르 세관장, 법적으로 안 된다면 물리적으로 막아야 합니다. 당장 남문 검문소를 전면 봉쇄하십시오. 놈들의 수송 마차를 밀수 혐의로 샅샅이 털어서 기필코 올가미를 씌우겠습니다.
올가미는 아직 완전히 벗겨지지 않았다. 물류의 심장인 남문 검문소를 전면 차단하려는 적들의 새로운 음모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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