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보이지 않는 화살
“당장 지하 무법 상단 ‘검은 이빨’의 바르가스에게 연락해라! 돈은 원하는 대로 줄 테니, 그 약골 상인 놈의 목을 가져오고 비밀 창고를 짓밟으라고 해!”
파산 위기에 몰린 철혈 상회의 도련님, 레온하르트가 지른 광기 어린 비명이 아스카론 장벽 도시의 어두운 밤하늘로 흩어진 지 불과 몇 시간 뒤.
장벽 도시 동쪽, 거친 절벽 동굴 깊은 곳에 은밀하게 숨겨진 준서 상회의 외곽 비밀 창고 주변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했다. 낮 동안 채굴해 둔 푸른빛의 고대 에테르 정수 완제품들이 상자 가득 쌓여 있는 곳. 이곳은 상회의 재기를 위한 심장이자, 동시에 적들이 가장 탐낼 만한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기도 했다.
바람이 절벽 틈새를 두드리며 스산한 울음소리를 냈다. 준서는 바위 그늘 아래 서서 조용히 숨을 죽였다. 그의 오른손 안에는 주사위 모양의 정밀 마도구, ‘계약의 주사위’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준서의 눈가는 미세하게 붉은 실핏줄이 서 있었다. 지난번 토르발드의 대장간에서 엘리시아의 무기를 제련하며 영혼에 가해진 과부하 한계치가 아직 65%에 머물러 있는 탓이었다. 관자놀이가 깨질 듯 욱신거렸고 전신에 지독한 피로감이 짓눌렀지만, 준서는 특유의 차가운 포커페이스 뒤로 고통을 완벽히 감추었다. 상인에게 표정을 들키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했으니까.
스스슥.
그때, 절벽 위쪽의 높은 바위 턱 위에서 은은한 달빛을 머금은 은빛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다. 실버우드의 엘프 여제, 엘리시아였다. 그녀는 토르발드가 제련하고 준서가 마력을 조율해 완성한 전용 마도 활 ‘바람의 노래’를 쥔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신비로운 녹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과거 인간들에게 입었던 상처와 불신으로 가득했던 그녀의 눈빛은, 이제 준서를 향해 묘한 신뢰와 잔잔한 독점욕을 품고 있었다. 준서가 자신을 살리기 위해 피를 토하며 영혼의 고통을 나누었던 그 순간, 엘리시아의 마음속 빗장은 이미 반쯤 풀려 있었다.
‘온다.’
준서는 감각적으로 직감했다. 마력이 전혀 없는 무마력 영혼 바인더 체질인 그였기에, 오히려 공기 중의 미세한 마력 파동과 이질적인 살기를 누구보다 정밀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저 멀리 절벽 아래의 어두운 오솔길을 타고, 검은 가죽 옷을 입고 얼굴에 해골 문양을 그린 무리들이 소리 없이 접근하고 있었다. 지하 무법 조직 ‘검은 이빨’의 습격대원들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바르가스의 오른팔이자 흉포한 전사로 소문난 행동대장 그림이 서 있었다. 그의 허리춤에는 꺼지지 않는 마력 불꽃을 방출하는 ‘방화용 특제 마석 폭탄’이 매달려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명확했다. 창고를 폭파해 에테르 정수를 강탈하고, 준서 상회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는 것.
준서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머니 속의 계약 주사위가 그의 미세한 영혼력에 반응하며 미세하게 공명했다. 마력이 없는 준서만의 고유 기술이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활성화되었다.
‘영혼의 속삭임(Soul Whisper).’
아무런 마력 방출도, 소리도 없이 준서의 목소리가 엘리시아의 정신 속으로 직접 파고들었다.
- 엘리시아, 내 목소리가 들립니까?
바위 턱 위의 엘리시아가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손이 ‘바람의 노래’ 활시위를 천천히 당겼다. 시위가 당겨짐과 동시에 주변의 바람 흐름이 엘리시아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강력한 정령 마력의 파동은 준서가 미리 준비해 둔 ‘에테르 마력 흡수 주머니’의 보이지 않는 결계 속에 갇혀 외부로 단 한 줌도 새어 나가지 않았다.
- 적들의 수는 총 스물하나. 정면의 좁은 골목 지형 때문에 경비대장 카일의 정면 돌격은 적들의 우회 침투를 놓칠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먼저 적의 머리를 자릅니다.
준서는 머릿속 주판 위에 전장의 바둑판을 그렸다. 적들의 한 걸음, 호흡 하나까지 숫자로 치환되어 그의 뇌리로 흘러들어왔다.
- 시계 2시 방향. 거리 400미터. 뾰족하게 솟은 화강암 바위 그늘 뒤를 보십시오. 검은 해골 문양 가죽 조끼를 입고 폭탄을 만지고 있는 사내가 있습니다. 그자가 행동대장 그림입니다.
엘리시아의 시선이 준서가 지목한 좌표로 정확하게 내리꽂혔. 바람의 노래 활 끝에 새겨진 고대 엘프식 룬 문자가 푸른빛을 내뿜으며 고속 회전했다. 공기의 저항이 제로로 수렴하고, 400미터 밖의 표적이 그녀의 눈앞에 있는 것처럼 선명하게 확대되었다.
‘바람의 눈 저격(Wind's Eye Snipe).’
그림은 자신들이 완벽하게 은신하고 있다고 확신한 채,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마석 폭탄의 도화선에 불을 붙이려 하고 있었다. 그의 손가락이 마석 라이터에 닿는 바로 그 찰나.
- 지금입니다.
준서의 속삭임과 동시에, 엘리시아가 활시위를 놓았다.
피식-!
시위가 튕기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대기 중의 소리를 완전히 삼켜버린 무음의 바람 화살이 어둠을 가르고 일직선으로 날아갔다. 오직 밤공기가 순간적으로 찢어지는 미세한 진동만이 절벽 사이에 남았을 뿐이었다.
푸학!
“으아아아악!”
고요한 절벽 동굴 외곽에 끔찍한 비명이 폭발하듯 울려 퍼졌다.
폭탄을 점화하려던 그림의 오른쪽 손목에 소리 없는 바람의 화살이 정확히 박혀 관통했다. 화살에 실린 강력한 정령 회오리가 그의 손목뼈를 완전히 으스러뜨렸고, 그 충격으로 마석 폭탄의 뇌관이 무력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갔다.
“대, 대장?! 무슨 일입니까!”
“기습이다! 어디서 날아온 거야?!”
습격대원들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패닉에 빠졌다. 소리도, 마력 흔적도 없는 저격이었기에 적들은 공격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조차 갈피를 잡지 못했다. 진형이 순식간에 와해되는 순간이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 돌격!”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위 그늘 속에 대기하고 있던 상단 경비대장 카일이 은빛 흉갑을 번쩍이며 장검을 뽑아 들었다. 준서 상회의 정예 경비대원들이 함성을 지르며 패닉에 빠진 무법자들을 겹겹이 포위해 들어갔. 카일의 묵직한 검날이 적들의 무기를 차례로 쳐내며 제압해 나갔고, 손목이 날아간 채 피를 흘리던 행동대장 그림은 도망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카일의 검날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전투는 순식간에 상회의 완벽한 압승으로 끝이 났다. 소량의 원석 찌꺼기가 불타며 가벼운 화재가 발생해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지만, 창고 내부의 핵심 에테르 자산은 단 한 상자도 손상되지 않았다.
준서는 느린 걸음으로 절벽 위에서 내려온 엘리시아와 함께 묶여 있는 그림의 앞으로 다가갔다. 준서의 안구 실핏줄은 여전히 붉었지만, 그의 표정은 승리의 기쁨조차 없는 얼음처럼 차가운 포커페이스였다.
“레온하르트가 보낸 사냥개치고는 이빨이 너무 부실하군요.”
준서가 나직하게 말하며 그림의 옷깃을 헤쳤다. 그의 예리한 손끝이 그림의 가죽 조끼 안쪽 주머니에 닿았다. 서늘한 가죽의 감촉 너머로 빳빳한 종이의 질감이 느껴졌다.
사각.
준서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붉은색 밀랍으로 단단히 봉인된 한 통의 서신이었다. 그리고 그 서신 표면에 찍힌 문양을 확인한 순간, 옆에 서 있던 경비대장 카일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 이 문양은…….”
카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의 장검을 쥔 손에 핏줄이 터질 듯 힘이 들어갔다.
“카스텔 백작 가문의 공식 인장입니다. 백작령의 사설 기사단인 로릭 기사단만이 사용하는 극비 서신 서식입니다, 상단주님.”
카일이 준서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평소 감추고 있던 자신의 과거를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실은…… 제가 제국군을 탈영한 진짜 이유가 바로 저 문양에 있습니다. 저는 과거 카스텔 백작의 수하들이 이종족 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영혼을 추출하는 현장을 목격하고 반발하다가 쫓겨난 몸입니다. 저 비열한 인장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철혈 상회의 배후에 백작령의 거대한 군사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밀랍 인장에 새겨진 붉은 사자 문양이 어둠 속에서 마치 피를 흘리는 것처럼 기괴하게 빛나고 있었다.
준서는 서신을 쥐고 조용히 계약의 주사위를 굴렸다. 주사위 표면의 황금빛 수식들이 서신의 봉인 마법 배후에 숨겨진 거대한 권력의 흐름을 투시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상인들 간의 밥그릇 싸움이 아니었다. 이 무법지대 전체를 피로 물들이려는 영주의 잔혹한 수탈 계획이 서서히 그 베일을 벗고 있었다.
준서의 황금빛 눈동자가 남부 국경 너머, 백작의 거대한 영주성이 위치한 북쪽 하늘을 향해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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