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회의 깃발을 올리다
아스카론 장벽 도시의 슬럼가 변두리. 제국의 가혹한 수탈로 몰락한 하층민들이 하루하루 겨우 숨만 쉬며 살아가는 그 음침한 거리에 기이할 정도로 이질적인 냄새가 풍겨 나왔다.
매캐한 석탄 연기와 썩은 물비린내 대신, 코끝을 산뜻하게 자극하는 새 소나무 자재의 향과 빳빳하게 말린 양가죽 장부의 잉크 냄새.
“조금만 더 왼쪽으로 달아봐, 한별아.”
낡은 청색 상인 로브 대신 짙은 회색의 실크 코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최준서가 영주성 집무실 대신 초라한 2층 목조 건물의 앞마당에서 지시를 내렸다. 아직 경매장 탈출 당시 겪었던 영혼 과부하의 내상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가슴 한구석이 뻐근하게 조여왔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 없는 상단주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예, 스승님! 이 정도면 딱 황금 비율입니다!”
준서가 길거리에서 거두어 상회의 실무를 가르치고 있는 수습 상인, 한별이 이마의 땀을 훔치며 환하게 웃었다. 소년이 매달아 놓은 나무 현판에는 빳빳한 금칠로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준서 상회 (Jun-seo Trading)]
제국 남부 무법지대에서 가문을 몰락시킨 원수들에게 복수하고, 네 여제를 구원하여 대륙 최대의 상업 제국을 건설하기 위한 첫 번째 깃발이 마침내 아스카론의 슬럼가 구석에 세워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개업의 소박한 기쁨도 잠시, 1층 로비 안쪽에서 장부를 검수하던 서기 안나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어두운 안색으로 걸어 나왔다.
“상단주님, 개업식을 자축할 여유가 없습니다. 장부를 아무리 쪼개고 돈세탁 기법을 동원해 봐도 유동 자금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경매장에서 엘리시아 님과 카르디아 님을 낙찰받기 위해 사채업자 바실리에게 빌린 빚의 첫 이자 독촉 기한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안나가 펼쳐 보인 양가죽 장부에는 붉은 잉크로 선명하게 적힌 부채 액수가 준서의 눈을 찔렀. 제국 표준 금화로 무려 30,000닢. 무법지대의 어둠을 지배하는 암시장 금융가 바실리가 빌려준 돈은 피도 눈물도 없는 이자율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쾅!
준서 상회의 새카만 목조 정문이 거칠게 열리며, 슬럼가의 차가운 새벽 공기와 함께 험악한 살기를 풍기는 거구의 사내들이 들이닥쳤다. 전신에 가죽 갑옷을 걸치고 허리춤에 묵직한 철퇴를 찬 사내들. 바실리의 악명 높은 사채 회수 수하들이었다.
“이봐, 풋내기 상단주. 개업 첫날부터 아주 잔치를 벌이고 있군 그래.”
선두에 선 흉포한 인상의 외눈박이 사내가 침을 뱉으며 준서에게 다가왔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제국 표준 금화가 짤랑거리며 불쾌한 소리를 냈다.
“바실리 어르신께서 전하라고 하셨다. 무법지대에서 상회 문을 열었으면 첫 예의는 지켜야지? 당장 첫 달 이자 금화 500닢을 선납해라. 주판알 튕기며 장난질할 생각은 접는 게 좋을 거야.”
살풍경한 압박에 1층 잡화점 내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한별이 본능적으로 준서의 앞을 가로막으며 품속에서 특제 수동식 계산기를 꺼내 들었다.
“잠깐만요! 계약서상 이자 납부 기일은 아직 일주일이나 남았습니다! 게다가 상회 개업 당일에 이렇게 들이닥치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한별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계산기 태엽을 튕겼다. 소년의 특기인 ‘황금 비율 주판질’이 실시간으로 상회의 잔고 흐름을 연산해 나갔다. 한별이 준서에게 다급하게 귓속말을 건넸다.
“스승님, 안 됩니다. 지금 이자 500닢을 저들에게 건네주면, 당장 내일부터 진행할 기초 약초와 잡화 매입 자금이 완전히 바닥납니다. 물류 순환이 멈추면 일주일 뒤 원금 상환은커녕 상회 자체가 파산합니다!”
안나 역시 칼같이 다려진 서기복 깃을 매만지며 이중 장부를 들고 나섰다.
“바실리 측 수하분들, 제국 세법 제47조 및 남부 특별 면세 조항에 따르면, 파산 신청 유예 기간 중인 신흥 상회에 대한 강제 이자 징수는 불법입니다. 저희는 이미 펠릭스 행정관청에 합법적인 서류를 접수했……”
“시끄럽다, 계집년!”
외눈박이 사내가 철퇴를 바닥에 쿵 내리찍었다. 돌바닥에 미세한 균열이 가며 먼지가 피어올랐다.
“여기서 제국의 법을 논해? 이 아스카론 장벽 도시는 제국의 법보다 바실리 어르신의 금화 이자율이 더 무서운 곳이다. 당장 금화 500닢을 내놓지 않으면, 이 잘나가시는 준서 상회의 깃발을 오늘부로 땔감으로 써주마!”
험악한 사내들이 허리춤의 무기에 손을 얹으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무력이 없는 준서와 어린 한별, 안나로서는 한순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하지만 준서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의 오른손 안에서 주사위 모양의 정밀 마도구, ‘계약의 주사위’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준서는 한별과 안나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뒤로 물러서게 한 뒤,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
“이자 500닢이라…… 확실히 바실리 어르신다운 철저한 계산이군요.”
준서의 목소리는 너무나 차분하여 오히려 수하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준서는 천천히 실크 코트 안주머니로 손을 집어넣었다. 사내들이 경계하며 무기를 고쳐 쥐는 순간, 준서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것은 금화 주머니가 아니었다.
스으으으.
지하실의 어둠마저 밝히는 듯한, 영롱하고 푸른빛의 고밀도 마력 광채.
준서가 꺼내 든 것은 주먹만 한 크기의 투명한 원석 조각이었다. 원석 내부에서 흐르는 푸른빛의 마력 아우라는 숨을 쉴 때마다 파동치며 공기 중의 마력 밀도를 단숨에 끌어올렸다.
“이…… 이건?”
외눈박이 사내의 외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사채업을 하며 온갖 귀중품을 봐왔던 그들이었기에, 그 원석이 뿜어내는 마력의 순도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챈 것이다.
“고대 에테르 정수(Ether Essence)의 샘플 조각입니다.”
준서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원석 조각을 탁자 위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푸른 광채가 사내들의 탐욕스러운 얼굴을 은은하게 비추었다.
“제국 군부나 마도원에서도 눈이 뒤집혀 찾아 헤매는 물건이지요. 이 작은 조각 하나의 가치만 해도 금화 1,000닢을 가볍게 상회합니다. 바실리 어르신께 이 샘플을 담보로 전해드리십시오.”
준서는 탁자 위의 주판을 가볍게 튕기며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내 말을 똑똑히 전하십시오. 일주일 뒤, 원금 30,000골드와 이자 전액을 이 고순도 에테르 정수로 상환하겠다고 말입니다. 바실리 어르신이라면 이 원석이 장벽 도시 전체의 금융을 흔들 수 있는 진짜 ‘황금’임을 단번에 알아보실 겁니다.”
사내들은 에테르 정수 샘플이 내뿜는 영롱한 푸른빛과 준서가 풍기는 압도적인 상인으로서의 대범함에 완벽하게 압도당했다. 외눈박이 사내는 침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원석 조각을 가죽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좋다. 일주일이다, 최준서 상단주. 바실리 어르신께 이 물건과 네 제안을 그대로 보고하지. 만약 일주일 뒤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그땐 이 상회뿐만 아니라 네놈의 영혼까지 바실리 어르신의 금고에 갇히게 될 거다.”
사내들이 무기를 거두고 썰물처럼 상회를 빠져나갔다. 굳게 닫힌 목조 문 너머로 그들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긴장감으로 팽팽했던 실내가 단숨에 가라앉았다.
“후우…….”
한별과 안나가 동시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준서의 안색은 여전히 냉정했다. 일주일이라는 유예를 얻었지만, 그것은 동시에 일주일 내에 광산에서 에테르 정수를 대량으로 채굴해 내지 못하면 상회 전체가 바실리에게 완벽히 압류당한다는 뜻이었다.
“스승님, 하지만 에테르 정수를 일주일 내에 대량으로 구할 방법이 있습니까? 지하 광산은 이미 제국 군부의 감시망이……”
한별이 걱정스럽게 묻는 순간.
바스락.
상회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창문 틈새로 회색 쥐 귀를 쫑긋거리는 왜소한 체구의 소년이 소리 없이 미끄러져 내려왔. 준서 상회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슬럼가의 어린 정보 브로커, 카이였다.
“상단주 형씨! 아주 심장이 쫄깃해지는 협상이었어!”
카이가 날렵하게 탁자 위로 착지하며 품속에서 먼지가 자욱하게 묻은 낡은 양가죽 지도 한 장을 펼쳐 보였다. 소년의 쥐 꼬리가 흥분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바실리의 사채 독촉을 한 방에 날려버릴 진짜 대박 정보를 물어왔다고. 이 지도 좀 봐.”
준서와 한별, 안나가 지도를 향해 시선을 모았다. 카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아스카론 장벽 도시 지하 하수도 너머, 제국 군부도 위험 구역으로 지정해 버려둔 폐광산의 가장 깊은 사각지대였다.
“제국 군부 녀석들은 몬스터가 출몰한다고 입구를 막아뒀지만, 내 정보망에 따르면 그 버려진 구역 지하 깊은 곳에서 최근 기이할 정도로 강렬한 푸른색 마력 파동이 감지되기 시작했어. 제국의 마도사들도 아직 눈치채지 못한 진짜 고대 광맥의 입구야!”
카이의 목소리에 깃든 확신에 준서의 손안에 든 계약의 주사위가 공명하듯 황금빛 미세한 진동을 일으켰다.
준서의 입꼬리가 천천히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위기는 언제나 가장 달콤한 기회의 얼굴을 하고 찾아오는 법이었다.
“일주일이라…… 주판을 튕기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지.”
준서가 지도의 푸른 마력 파동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나직하게 선언했다.
“준서 상회의 진짜 첫 번째 채굴 사업을 시작한다. 김씨 영감에게 마차를 준비하라고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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