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예가 아닌 파트너로서
눅눅한 흙냄새와 오래된 목조 가구의 퀴퀴한 향, 그리고 알싸한 약초 달이는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최준서는 천천히 눈을 떴다. 찌르는 듯한 두통과 함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타오르는 것 같은 통증이 전신을 덮쳤다. 마력이 전혀 없는 무마력 영혼 체질의 그릇에 용족의 신체적 고통을 동조시켰던 대가는 상상 이상으로 가혹했다. 조금만 숨을 깊게 들이쉬어도 허파가 찢어지는 것 같은 감각에 준서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정신이 드느냐, 준서야.”
낮고 듬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한쪽 눈에 깊은 흉터가 있는 백발의 노인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준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낡은 앞치마를 두르고 담배 파이프를 쥔 손은 투박했지만, 그 손길만은 따뜻하게 준서의 이마에 젖은 수건을 올려놓았다.
“지홍 숙부님…….”
준서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그의 선친인 최한성의 가장 충직한 동료이자, 과거 제국 남부 무법지대를 호령하던 은기사단의 호위대장이었던 지홍. 가문이 몰락한 이후 다리 한쪽을 잃고 슬럼가 깊은 곳에서 ‘은빛 안개 여관’을 운영하며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던 노인은 준서의 손을 꽉 쥐었다. 지홍의 붉어진 눈시울에 물기가 어렸다.
“네 아비의 소식을 듣고 내 아무것도 하지 못해 매일 밤을 죄책감 속에서 지냈다만…… 오늘 네가 경매장에서 보여준 기적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그 발레리의 철통같은 결계를 해킹하고 용족의 봉인을 풀어 탈출하다니. 너는 정말로 한성의 아들이 맞구나. 그 영리한 머리와 담대함까지 빼다 박았어.”
“칭찬은 나중에 해 주세요, 숙부님. 아직 상황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니까요.”
준서는 비틀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가슴팍이 조여오는 통증에 저절로 기침이 터져 나왔다. 쿨럭이며 뱉어낸 침에는 검붉은 피가 섞여 있었다. 영혼 과부하 한계치에 다다랐던 영혼 회로가 미세하게 삐걱거리는 경고음이 내면에서 울리는 듯했다. 준서는 옷소매로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며 방 안의 어두운 구석을 응시했다.
방 한구석, 차가운 돌벽에 기댄 채 은빛 머리칼을 늘뜨린 여인이 서 있었다. 실버우드의 엘프 여제, 엘리시아였다. 비록 마력 누수 증상으로 인해 뺨이 야위고 전신이 쇠약해진 상태였지만, 그녀가 지닌 특유의 고결한 오라와 신비로운 녹안은 어둠 속에서도 칼날처럼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각.
엘리시아가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의 손끝에서 미세한 마력 찌꺼기가 웅동하더니, 이내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빛의 마력 가시가 형성되었다. 엘리시아는 주저 없이 그 날카로운 가시를 준서의 목덜미를 향해 겨누었다. 서늘한 마력의 기운이 목 피부에 닿자 준서의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움직이지 마라, 인간.”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벼랑 끝에 핀 얼음꽃처럼 차가웠다.
“과거 제국군에게 사로잡혀 노예 사슬에 묶인 이후로, 인간이라는 종족의 탐욕을 뼈저리게 배웠다. 너 역시 우리를 구해준 척 연기하며 결국은 또 다른 노예 계약의 쇠사슬을 내 목에 채우려는 속셈이겠지. 차라리 여기서 내 손에 죽는 편이 나을 것이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지홍이 본능적으로 허리춤의 단검으로 손을 뻗으려 했으나, 준서는 가볍게 손을 들어 숙부를 제지했다. 준서는 목을 겨눈 마력 가시를 눈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채,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주사위 모양의 정밀 마도구, ‘계약의 주사위’를 손에 쥐었다.
탁, 탁, 탁.
준서는 침착하게 품속에서 낡은 주판을 꺼내 들고 주판알을 튕기기 시작했다. 경쾌한 나무 마찰음이 밀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엘리시아. 나는 자선사업가가 아닙니다. 철저한 상인이지요.”
준서의 차분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주판을 두드려 보죠. 내가 당신들을 낙찰받기 위해 플루토 경매장에 지불한 전 재산과 사채업자 바실리에게 빌린 빚이 금화로 무려 30,000닢입니다. 거기에 이 안전가옥을 대여하고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들어간 약초 값, 그리고 당신들의 고통을 대신 짊어지느라 내 영혼에 가해진 실질적인 내상 치료 비용까지 합산하면…… 당신들은 나에게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막대한 채무를 지고 있는 겁니다.”
“결국…… 우리를 돈으로 환산하는구나. 인간의 탐욕이란 역시 변하지 않아.”
엘리시아의 녹안에 깃든 증오가 더 깊어졌다. 마력 가시가 준서의 목을 미세하게 파고들어 한 줄기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준서는 미소를 지었다. 비웃음이 아닌, 완벽한 비즈니스 파트너를 대하는 상인의 확신에 찬 미소였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나는 당신들을 가축처럼 부려 먹는 노예로 쓸 생각이 없습니다. 노예는 주인이 방심한 틈을 타 언제든 뒤통수를 칠 기회만 노리는 비효율적인 자산이니까요. 내가 원하는 건 내 명령에 억지로 복종하는 노예가 아니라, 내 투자를 바탕으로 스스로 가치를 증명하고 제국을 향한 피의 복수를 함께할 동등한 ‘비즈니스 파트너’입니다.”
준서는 손에 쥔 계약의 주사위를 탁자 위로 가볍게 굴렸다.
도르르륵.
주사위가 회전하며 황금빛 광채를 내뿜었다. 준서의 동공이 황금빛 기하학적 수식으로 물들며 ‘계약서 투시(Contract Insight)’ 능력이 발동했다. 허공에 플루토 경매장에서 강제로 맺어졌던 제국식 노예 계약서의 마법 공식 수식들이 홀로그램처럼 떠올랐다.
“영혼 계약 역추적 법식(Soul Loophole Analysis), 전개.”
준서가 나직하게 읊조리자, 주사위의 인과율 정렬 회로가 작동하며 계약서 수식 중 가장 악랄한 독소 조항이었던 ‘낙찰자에 대한 절대 복종’과 ‘생사여탈권 귀속’ 조항들이 황금빛 스파크와 함께 산산조각 나며 파괴되었다. 주종의 사슬이 영혼 차원에서 완벽하게 해체된 것이다.
그 자리에 준서가 새롭게 설계한 푸른빛의 마법 계약 수식이 떠올랐다. 그것은 제국의 눈을 완벽히 속일 수 있는 정교한 법적 우회 조항이었다.
“제국 법률 제1조에 따르면, 개인이 이종족을 노예 계약 외의 방식으로 비호하는 것은 반역죄로 다스려집니다. 하지만 법에는 언제나 틈새가 존재하지요. 이 계약서는 당신들을 노예가 아닌, 준서 상회의 ‘합법적 전문 기술 자문관’으로 등록하는 ‘이종족 우회 고용 계약서’입니다.”
준서는 허공의 계약서 조항을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갔.
“당신들은 내 상회의 정식 직원으로서 매달 제국 표준 규정에 맞는 고액의 급여를 받을 것이며, 거주와 행동의 자유를 완벽히 보장받습니다. 대가로 엘리시아, 당신은 당신의 정밀 마도 설계 능력을 활용해 내 상회의 특수 상품 제작을 전담해 주십시오. 우리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닙니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뭉친 철저한 동맹이자 파트너입니다.”
엘리시아의 마력 가시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평생을 지배해 온 인간에 대한 불신과 오만함이, 준서가 제시한 완벽하게 합리적이고 대등한 계약 조항 앞에서 갈팡질팡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 방 한편에서 붉은 적발을 털어내며 침상에 걸터앉아 있던 화룡족 여제, 카르디아가 호탕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하하하! 정말 기이한 약골 상인이로군! 엘리시아, 그 차가운 가시 좀 치워라. 이 인간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내 전신이 불타는 것 같던 사슬의 고통을 제 영혼으로 직접 전송받아 피를 토했던 녀석이다. 주인이 노예를 위해 제 피를 흘리는 법은 제국 어디에도 없다.”
카르디아가 다가와 엘리시아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아 내렸다. 용족의 괴력에 엘리시아의 마력 가시가 허공에서 흐려지며 사라졌다. 카르디아는 준서를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탁자 위의 계약 수식을 응시했다.
“전문 기술 자문관이라…… 용족의 지배자인 내가 상회의 호위무사 겸 자문관이라니, 격에 맞지 않지만 제법 재미있는 거래군. 약골 상인, 기꺼이 서명해 주마.”
카르디아가 손가락 끝을 깨물어 붉은 피 한 방울을 계약 수식에 떨어뜨리자, 황금빛 낙인이 그녀의 이마에 미세하게 스며들며 계약이 성립되었다.
엘리시아 역시 복잡한 감정이 서린 눈빛으로 준서를 바라보았다. 그의 창백한 안색과 로브에 묻은 핏자국은 자신들을 구하기 위해 치른 실질적인 대가였다. 인간의 잔혹함에 찢겼던 그녀의 고결한 마음에 준서의 공정하고 정직한 상술이 서서히 스며들고 있었다.
“좋다. 내 평생 인간을 믿어본 적은 없다만…… 네가 제시한 계약의 공정함과 그 담대함은 인정하지. 내 정밀 마도 설계 능력이 상회의 성장에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똑똑히 보여주마.”
엘리시아가 가느다란 손가락을 뻗어 푸른빛 계약서 위에 마력 서명을 새기려는 찰나였다.
쾅!
비밀 지하실의 두꺼운 참나무 문이 거칠게 열리며 지홍 숙부가 다급한 걸음으로 들어왔. 그의 흉터 가득한 안색은 극도로 굳어 있었고, 투박한 손에는 이미 낡은 마력 단검이 쥐어져 있었다.
“준서야, 일이 터졌다! 슬럼가 외곽에 발레리가 보낸 현상금 사냥꾼들과 경매장의 수상한 밀정들이 깔렸다. 여관 주변의 포위망이 좁혀지고 있어!”
차가운 긴장감이 지하실 내부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엘리시아의 손끝이 허공에서 멈췄고, 카르디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호전적인 화염 아우라를 내뿜으며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준서는 주사위를 움켜쥐며 어둠 너머를 응시했다. 무법지대의 어두운 추격망이 이미 그들의 턱밑까지 당도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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