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토 경매장 탈출전
서늘한 쇠붙이의 살기가 최준서의 목덜미에 닿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3초.
사방을 가로막은 흑철 장벽과 특별실 내부를 빽빽하게 메운 서른 명의 사설 살수들. 경매장주 발레리의 비열한 웃음소리가 밀실의 무거운 공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마력이 전혀 없는 무마력 영혼 체질인 준서에게는 이들의 오라를 막아낼 물리적인 방어력이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준서의 오른손 안에서 회전하기 시작한 황금빛 ‘계약의 주사위(Dice of Covenant)’는 이미 인과율의 틈새를 정교하게 비틀고 있었다. 준서의 동공이 황금빛 기하학적 수식으로 물들며 ‘계약서 투시(Contract Insight)’ 능력이 최고조로 활성화되었다. 탁자 위에 놓인 위조 계약서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저주 수식의 흐름이 준서의 뇌리에 실시간으로 해체되어 입력되었다.
“죽여라! 흔적도 남기지 말고 찢어발겨!”
발레리의 잔혹한 명령과 함께 최전방에 선 살수의 검날이 준서의 심장을 향해 짓쳐 들어왔다. 은백색의 날카로운 검기가 공기를 찢는 찰나, 쇠사슬이 거칠게 쓸리는 파공음이 밀실을 울렸다.
콰아앙!
“약골 상인! 내 뒤로 숨어라!”
붉은 적발을 휘날리며 카르디아가 거대한 몸을 던져 준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전신을 묶고 있던 억제 쇠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비명을 질렀다. 살수의 검날이 카르디아의 단단한 어깨 가죽을 비껴가며 붉은 피가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용족의 뜨거운 피가 바닥에 닿자마자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돌바닥이 그을렸다.
“으윽……!”
카르디아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아무리 강력한 화룡족의 지배자라 할지라도, 심장에 박힌 제국제 흑철 못과 온몸을 결박한 억제 사슬 때문에 제대로 된 마력을 쓰지 못하는 상태였다. 살수들의 두 번째 검날이 그녀의 빈틈을 노리고 쏘아져 들어왔다.
바로 지금이다.
준서는 주저 없이 오른손의 주사위를 탁자 위로 던지며 마음속으로 외쳤.
‘고통 분담(Pain Sharing), 활성화!’
웅 하는 기이한 공명음과 함께 준서의 가슴에서 뻗어 나온 황금빛 마력 실이 카르디아의 상처 부위로 연결되었다. 순간, 전신이 통째로 불타는 듯한 끔찍한 고통이 준서의 신경망을 타고 들이쳤다. 마력이 전혀 없는 정화된 영혼 체질의 그릇에 용족의 신체적 통증이 그대로 전송된 대가였다.
“우욱……! 컥!”
준서의 입에서 검붉은 피 한 움큼이 쏟아져 나왔다. 오감이 찢어지는 극심한 두통과 함께 눈앞이 일시적으로 암전되었지만, 준서는 이빨을 악물며 정신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황금빛 눈동자는 허공에 전개된 계약서의 마법 홀로그램을 날카롭게 꿰뚫어 보았다.
‘영혼 계약 역추적 법식(Soul Loophole Analysis), 전개!’
준서의 무마력 영혼이 필터 역할을 하며 황실의 자폭 저주 수식을 완벽하게 우회했다. 주사위가 테이블 위에서 멈추며 황금빛 룬 문자가 회전했다. 카르디아의 전신을 묶고 있던 제국 황실제 특수 쇠사슬의 핵심 결제 공식이 역으로 해킹되기 시작했다.
철커덕! 철컥!
“카르디아! 네 쇠사슬의 결계를 30% 일시 해제했다! 지금 당장 저 문을 부수어라!”
준서의 외침과 함께 카르디아의 사슬 표면에 새겨진 황실의 푸른 봉인 문양이 붉게 변하며 느슨하게 풀려났다. 전신을 짓누르던 압박이 사라지자 카르디아의 황금빛 눈동자에 광포한 화룡의 투기가 들끓었다.
“하하하! 이 약골 상인, 제법 쓸 만한 짓을 하는군!”
카르디아는 억눌려 있던 화룡의 분노를 토해내기 위해 목구멍 깊은 곳에서 열기를 끌어올렸다. ‘용의 숨결(용의 숨결)’을 뿜어내어 특별실 내부의 살수들을 한꺼번에 잿더미로 만들 생각이었다.
쿠우우웅!
그러나 그녀의 심장에 박힌 제국제 철못이 파르르 떨리며 차가운 억제 마력을 방출했다. 심장이 옥죄어오는 극심한 제동에 카르디아의 입술 사이에서는 붉은 불꽃 대신 검은 연기와 미세한 화염 파편만이 튀어나왔을 뿐이었다.
“치잇! 심장의 못 때문에 불꽃이 나오지 않는군!”
발레리가 그 모습을 보고 비열하게 웃어재꼈다.
“하하하! 어리석은 용족 년! 황실의 봉인이 그렇게 쉽게 풀릴 줄 알았더냐! 죽여라! 저 상인 놈의 목을 먼저 쳐라!”
살수들이 일제히 준서를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카르디아의 입꼬리는 오히려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불꽃이 안 나오면, 내 본연의 힘으로 짓밟아 주마!”
마력이 억제되었을지언정, 봉인이 30% 풀린 화룡족 여제의 신체 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카르디아는 전신에 휘감겨 있던 묵직한 흑철 사슬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녀가 사슬을 휘두르자, 엄청난 괴력이 실린 사슬이 거대한 채찍이 되어 공간을 갈라쳤다.
콰아아앙!
단 한 번의 휘두름에 전방으로 돌격하던 살수 세 명의 상반신이 흑철 사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처참하게 으스러지며 벽면으로 처박혔다. 돌벽이 거미줄처럼 갈라지며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카르디아는 멈추지 않고 괴력을 발휘해 사슬을 사방으로 난사했다. 살수들의 검날이 그녀의 단단한 용비늘 아우라에 닿기도 전에 사슬의 파괴적인 궤적에 걸려 검이 부러지고 뼈가 바스러졌다.
그 피비린내 나는 아수라장 속에서 준서는 비틀거리며 일어섰. 고통 분담의 여파로 온몸의 기혈이 뒤틀려 매 순간 각혈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그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준서는 구석진 곳에 혼절해 있는 하이 엘프 여제, 엘리시아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마력 누수 증상으로 인해 창백하게 질린 채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준서는 떨리는 팔로 그녀의 야윈 몸을 안아 올려 자신의 등에 업었다. 차갑고 달빛 같은 은발이 그의 청색 로브 위로 흘러내렸다.
“카르디아! 입구를 뚫어라! 오래 버틸 수 없다!”
준서의 무마력 영혼에 가해지는 과부하 한계치가 점차 위험 수위에 도달하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체되면 준서의 영혼 자체가 산산조각 날 터였다.
“알았다! 꽉 잡고 있어라, 약골!”
카르디아가 거대한 흑강 대검을 고쳐 잡고 특별실의 출구인 거대한 흑철 철문을 향해 돌격했다. 은기사급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대형 철문이었지만, 봉인이 풀린 화룡의 완력 앞에서는 한낱 종잇장에 불과했다.
“비켜라아아!”
카르디아가 온 힘을 실어 철문을 향해 어깨를 들이받으며 대검을 내리쳤다.
쿠구구구구— 쾅!
천문학적인 무게의 흑철 철문이 석조 돌쩌귀째로 뜯겨 나가며 전방으로 날아갔다. 문 너머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매장 경비병 두 명이 날아온 철문에 깔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납작하게 짓눌렸다.
“탈출이다!”
준서는 엘리시아를 등에 업은 채, 카르디아의 호위를 받으며 아스카론 장벽 도시의 지하 통로로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뒤편에서 발레리의 찢어지는 듯한 비명과 살수들의 추격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지만, 준서 일행은 이미 경매장 지하와 연결된 복잡한 지하 하수도 기로 진입한 뒤였다.
어둡고 축축한 하수도 통로는 온갖 오물 냄새와 차가운 수기가 가득했다. 카르디아는 뒤를 쫓아오는 살수들의 추격을 늦추기 위해 전진할 때마다 하수도의 돌벽을 괴력으로 무너뜨려 퇴로를 매몰시켰다. 쿵, 쾅 하는 굉음이 하수도 내부에 메아리치며 추격자들의 발소리를 지워버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고 등에 업힌 엘리시아의 미세한 온기가 준서의 낡은 로브를 적실 때쯤, 마침내 장벽 도시 슬럼가 외곽과 연결된 하수도 출구의 희미한 달빛이 눈앞에 나타났다.
차가운 밤공기가 그들의 얼굴을 때렸다. 마침내 플루토 경매장의 지옥 같은 결계망을 완전히 벗어나 슬럼가의 안전지대 초입에 도달한 것이다.
“하아, 하아…… 살았군, 약골 상인. 제법 대담한 구석이 있……”
카르디아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준서를 돌아보려던 찰나였다.
툭.
준서의 무릎이 힘없이 꺾이며 돌바닥 위로 쓰러졌다. 고통 분담의 누적된 내상과 영혼 계약 역추적의 과부하 한계치가 마침내 임계점을 넘어 폭발한 것이다.
“컥! 쿨럭……!”
준서의 입에서 엄청난 양의 검붉은 피가 하수도 출구의 차가운 돌바닥 위로 쏟아져 나와 고였다. 그의 야윈 안색은 핏기를 완전히 잃고 유령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준서의 오른손에서 힘이 빠지며 계약의 주사위가 바닥으로 떨어져 댕그랑 소리를 냈다.
“최준서?! 야! 약골! 정신 차려라!”
카르디아의 황금빛 눈동자가 극도의 당황과 충격으로 크게 흔들렸다. 등에 업혀 있던 엘리시아 역시 준서의 각혈 소리에 미세하게 눈꺼풀을 떨며 의식을 되찾으려 하고 있었다. 달빛 아래, 피웅덩이 속으로 쓰러지는 상인의 의식이 서서히 어둠 속으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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