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의 상인과 두 여제
지하 경매장 ‘플루토’의 공기는 언제나 돈과 피, 그리고 비린내 섞인 탐욕의 냄새로 가득했다. 장벽 도시 아스카론의 가장 깊은 지하에 둥지를 튼 이곳은 대륙의 온갖 불법 거래와 이종족 노예 매매가 이루어지는 무법지대의 심장부였다.
최준서는 VIP 대기실의 음침한 그늘에 서서 오른손에 쥔 작은 돌 주사위를 만지작거렸다. 가죽 장갑을 낀 손가락 사이로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아버지가 남긴 유일한 유산이자, 몰락한 준서 상회를 다시 일으킬 마지막 열쇠인 ‘계약의 주사위(Dice of Covenant)’였다.
“다음 상품은 오늘 경매의 대미를 장식할 최고의 명품들입니다! 제국 황실 마도사단의 극비 작전으로 생포된 이종족의 정점, 바로 ‘여제급 노예(Empress Class Slave)’들입니다!”
단상 위에서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뚱뚱한 사내, 경매장주 발레리가 침을 튀기며 외쳤다. 그의 목소리에 객석을 채운 제국 귀족들과 거상들의 눈빛이 굶주린 맹수처럼 번뜩였다.
철제 우리를 덮고 있던 붉은 천이 걷히자, 장내에 거대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왼쪽 우리에는 달빛을 머금은 듯한 은발과 신비로운 녹안을 지닌 실버우드 엘프 여제, 엘리시아가 묶여 있었다. 사슬에 묶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전신에서는 미세하게 정령 마력이 누수되며 차가운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에는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과 경멸이 서려 있었다.
우측 우리에는 불꽃처럼 붉은 적발과 황금빛 눈동자를 지닌 화룡족 여제, 카르디아가 서 있었다. 그녀의 심장 부근에는 제국 황실이 특수 제련한 거대한 흑철 못이 박혀 용화(龍化) 능력이 봉인되어 있었지만,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호전적인 용족의 기세는 주변의 공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시작가는 각각 금화 10,000닢! 두 상품을 동시에 낙찰받는 자에게는 황실이 보증하는 영혼 계약 1단계 문서가 제공됩니다!”
귀족들의 호가가 미친 듯이 치솟았다.
“15,000골드!”
“20,000골드!”
준서는 조용히 주머니 속의 계약 주사위를 굴렸다. 마력이 전혀 없는 무마력 영혼 체질인 그의 손끝에서 주사위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눈앞에 흐릿한 황금빛 수식들이 홀로그램처럼 스쳐 지나갔. 준서는 이 경매의 순서가 의도적으로 조율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경매장의 수석 감정사이자 과거 선친에게 은혜를 입었던 마르첼로가 준서가 저렴하게 이들을 낙찰받을 수 있도록 배후에서 판을 짜둔 덕분이었다.
“30,000골드!”
장내가 일순 조용해졌다. 호가를 부른 자는 다름 아닌 최준서였다. 낡은 청색 상인 로브를 걸친 야윈 체구의 청년 상인. 귀족들은 그를 파산 직전의 빚쟁이 풋내기라며 비웃었지만, 준서의 눈빛만큼은 주판알을 튕기듯 냉정하고 정교하게 빛나고 있었다.
“30,000골드 더 부를 자가 없습니까? 낙찰입니다!”
발레리의 망치가 단상을 내리쳤다. 준서는 전 재산과 자신의 영혼 계약 자체를 담보로 제공하는 극단적인 배팅을 통해 마침내 두 여제를 낙찰받는 데 성공했다. 영혼 계약 1단계(Soul Bond Stage 1). 주종 관계의 서막이었다.
정식 계약 서명을 위해 안내받은 경매장 지하의 극비 특별실. 사방이 두꺼운 철판과 차단 결계로 둘러싸인 밀실이었다. 무거운 철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엘리시아와 카르디아가 사슬에 묶인 채 방 안으로 끌려 들어왔.
발레리가 기름진 미소를 지으며 탁자 위에 양가죽 계약서를 올려놓았다.
“자, 최준서 상주. 낙찰금 서류와 이 영혼 계약서에 서명하시지요. 서명이 완료되는 즉시 이 고귀한 여제들은 그대의 소유가 됩니다.”
준서는 의자에 앉아 계약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손끝에서 계약의 주사위가 미세하게 회전했다. 순간, 준서의 동공이 황금빛 기하학적 마법 문양으로 변하며 패시브 능력인 ‘계약서 투시(Contract Insight)’가 가동되었다.
평범한 양가죽 계약서의 표면 너머로, 붉고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정교한 이중 마법 수식들이 그의 시야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제국 황실 마도사들이 심어둔 치명적인 독소 조항이자 올가미였다.
준서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
“발레리 경매장주. 계약서가 아주 흥미롭군요.”
“무슨 말씀이신지? 제국 공식 서식입니다만.”
발레리가 눈을 가늘게 뜨며 가식적인 미소를 유지했다.
“여기 이 하단 마법 룬 문자의 변형 수식 말입니다. 교묘하게 꼬아놓았지만 해독해 보면 이렇게 적혀 있군요. ‘낙찰자가 계약서 서명 후 24시간 이내에 사망할 경우, 낙찰 물품의 소유권 및 낙찰금 전액은 경매장주에게 영구 귀속된다.’…… 내가 서명하자마자 나를 죽이고 돈과 여제들을 모두 강탈할 생각이었나 보지?”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사슬에 묶여 있던 엘리시아의 녹안이 흔들렸고, 카르디아 역시 황금빛 눈동자를 부릅뜨며 준서를 바라보았다. 인간 상인이 제국의 정밀한 계약 저주 수식을 한눈에 파악해 내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발레리의 얼굴에서 비열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의 뚱뚱한 얼굴이 잔혹한 살기로 일그러졌다.
“……파산 직전의 쥐새끼치고는 눈치가 제법 빠르구나, 최준서.”
발레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철컥! 쿵!
특별실 사방의 벽면에서 흑철 장벽이 내려앉으며 외부로 통하는 모든 출구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동시에 경매장의 비밀 방어 결계가 활성화되며 대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어둠 속에서 무기를 뽑아 드는 소리와 함께, 발레리가 배후에 대기시켜 두었던 일류 사설 살수 서른 명이 그림자를 찢고 나타나 준서의 목덜미를 겨누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하지만 알아차렸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 어차피 이곳은 내 결계 안이다. 서명하고 죽을지, 아니면 갈기갈기 찢겨 죽은 뒤 장부를 위조당할지 선택해라.”
결계의 장막이 완전히 닫히고, 살수들이 검날을 들이미는 극한의 대치 상황. 최준서의 목덜미에 차가운 쇠붙이의 살기가 닿기까지 남은 시간은 단 3초에 불과했다. 그러나 벼랑 끝에 선 상인의 손안에서, 황금빛 계약의 주사위가 소리 없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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