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 남긴 유산
위이이잉— 쉭, 쉭.
대치동 학원가 빌딩 숲의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조차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 구석.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아 사계절 내내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반지하 방의 공기는 차갑게 내려앉아 있었다. 찢겨 나간 철문 틈새로 불어닥치는 가을 강바람을 막기 위해 낡은 종이상자를 덧대어 놓았지만, 한기는 여전히 바닥을 기어 다니며 민재의 발목을 적셨다.
민재는 가만히 방 안을 둘러보았다. 낡은 밥상 위에는 이마가 찢어져 하얀 거즈를 덧댄 어머니 박선자가 깊은 피로에 겨워 쓰러지듯 잠들어 있었고, 침대 위에서는 동생 민아가 산소호흡기에 의지한 채 고르게 숨을 내쉬고 있었다. 산소호흡기의 규칙적인 기계음만이 이 정적을 깨우고 있을 뿐이었다.
민재는 자신의 이마를 손끝으로 살짝 쓸어내렸다. 사채업자 최두식이 거친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남긴 붉은 선 흔적이 여전히 화끈거리는 통증을 유발했다.
168시간.
정확히 일주일 뒤에 현금 500만 원을 가져오지 못한다면, 저 사냥개들은 다시 이 방의 철문을 부수고 들어와 민아의 산소호흡기 코드를 뽑아버릴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협박이 아니었다. 숫자로 계산된 철저한 현실이자 목숨을 담보로 한 계약이었다.
‘합법적인 아르바이트로는 일주일 안에 500만 원을 만드는 것은 수학적으로 불가능하다. 세무서나 은행의 감시망을 피해 단기간에 이 정도의 현금 유동성을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은 단 하나뿐이다.’
민재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명성고등학교. 성적이 곧 신분이자 화폐로 작동하는 기괴한 계급제 온실. 그곳의 내신 등급 시스템 자체를 해킹하여 사설 배팅판을 설계해야만 했다.
그 설계를 완성하기 위해선, 먼저 형이 남긴 유산의 봉인을 풀어야 했다.
민재는 낡은 책상 밑 구석에 처박혀 있던 먼지 쌓인 cardboard 상자를 끌어당겼. 3년 전, 명성고의 전설적인 수능 만점자였으나 학교 본관 옥상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당했던 형, 강민우의 유품 상자였다. 당시 경찰과 학교는 서둘러 단순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자살로 사건을 종결지었지만, 민재는 단 한 순간도 그 결과를 믿지 않았다.
상자 안에는 바래진 수학 교과서들과 수식으로 가득한 낡은 다이어리, 그리고 민재가 아까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형의 유품인 ‘카시오 fx-570 공학용 계산기’가 들어있었다. 소형 액정에 미세한 흠집이 가득하고 플라스틱 모서리가 닳아 빠진 아날로그 계산기.
민재는 계산기를 손에 쥐었다. 손바닥에 닿는 차갑고 묵직한 질감이 마치 형의 손을 잡는 듯한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콧날 끝이 시려왔지만, 민재는 이내 입술을 깨물며 감정을 억눌렀. 분노와 슬픔은 연산의 오차를 만들 뿐이었다.
‘형은 왜 이 구형 계산기를 죽기 직전까지 몸에 지니고 다녔을까? 명색이 컴퓨터 공학과 수학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던 수능 만점자가, 왜 굳이 이 낡은 아날로그 도구만을 고집했을까.’
민재의 예리한 관찰력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계산기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무게 중심을 느꼈다. 이상했다. 일반적인 카시오 fx-570 모델의 공식 규격 무게는 배터리를 포함해 정확히 135g이다. 하지만 지금 손에 들린 이 계산기는 미세하게 무게 중심이 뒤쪽 아래로 쏠려 있었다.
민재는 계산기 뒷면의 건전지 소켓 덮개를 열었다. 먼지 낀 AAA 배터리 두 개가 보였다. 그는 배터리를 빼내고 내부 플라스틱 하우징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이중 격벽이다.’
배터리 단자 단자판 뒤쪽, 아주 미세한 플라스틱 틈새가 존재했다. 민재는 책상 위에 있던 얇은 핀을 집어 들어 배터리 소켓 안쪽의 이중 격벽 틈새를 정밀하게 쑤셨다.
딸깍—
작은 마찰음과 함께, 배터리 소켓 바닥의 숨겨진 슬라이드가 스프링처럼 튀어나왔다. 그 안에는 손톱보다 작은 검은색 칩, 군사용 암호화 규격으로 봉인된 마이크로 SD 카드가 숨겨져 있었다. 형이 남긴 진짜 유산이 세상 밖으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민재는 침을 삼키며 낡은 노트북을 켰다. 소음이 심한 쿨러 팬 소리가 반지하 방의 적막을 흔들었다. 그는 다이소에서 산 싸구려 리더기에 마이크로 SD 카드를 꽂고 노트북 USB 포트에 연결했다.
화면이 깜빡이더니 검은색 명령 프롬프트 창이 떠올랐.
[보안 드라이브 감지: AES-256 군사용 암호화 적용]
[패스워드를 입력하십시오. (남은 기회: 3회)]
[주의: 3회 오류 시 내부 데이터는 영구 자폭 삭제됩니다.]
화면에 붉은색 경고등이 번쩍였다. 민재의 이마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형의 생전 비밀번호, 생일, 수능 만점 점수, 자주 쓰던 수학 상수들을 머릿속으로 대입해 보았지만 아무런 확신도 서지 않았다. 단 한 번의 실수로 형이 목숨을 걸고 남긴 데이터를 영원히 날려버릴 수 있는 절체절명의 장벽이었다.
“일반적인 디지털 비밀번호가 아니야…….”
민재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백도어를 뚫으려 시도해 보았으나, 노트북 화면에 즉각 [보안 백도어 감지. 락다운 프로토콜 가동 전조]라는 메시지가 뜨며 노트북이 먹통이 되려 했다. 디지털 네트워크를 통한 해킹 시도를 원천 차단하는 정교한 방화벽이었다.
좌절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있었고, 방 안의 공기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 극심한 밤샘 연산 스트레스와 신체적 피로로 인해 민재의 시야가 일시적으로 흐려지며 두통이 엄습했다.
그때였다.
민재의 흐릿해진 시야 너머, 책상 맞은편 어두운 방구석에서 눈부시게 하얀 방 안에서 피 묻은 교복을 입은 형 강민우의 환영이 서서히 칠판 앞에 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민재의 자책감과 천재적 이성이 만들어낸 환각이었지만, 형의 목소리는 너무나 선명하게 뇌리를 때렸다.
‘수학은 감정을 믿지 않는다, 민재야. 디지털은 언제나 흔적을 남기지. 하지만 진짜 보안은 가장 아날로그적인 공간에 숨겨져 있는 법이다.’
“아날로그…….”
민재는 안경테를 테이프로 고친 안경을 치켜올리며 눈을 번쩍 떴다. 환영은 사라졌지만, 그의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카시오 공학용 계산기로 향했다.
비밀번호는 컴퓨터에 입력하는 문자가 아니었다. 이 계산기 자체에 비밀번호를 풀 수 있는 아날로그 키가 저장되어 있는 것이 분명했다.
민재는 다급히 계산기의 전원을 켰다. 그리고 `Shift̀ 키와 `Recall(Rcl)` 키를 동시에 눌러 계산기 내부의 휘발성 메모리 레지스터(Memory Register) 값을 호출했다.
액정 화면에 영문 변수들과 함께 무작위처럼 보이는 16진수 값들이 나열되기 시작했다.
`A = 0x7F3À
`B = 0x1D2C̀
`C = 0x9E5B̀
`X = 0x3F1D̀
`Y = 0x8B4C̀
`M = 0x5D2È
“이게 암호 해독의 난수표야…….”
민재의 손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형이 남긴 유품 다이어리의 첫 페이지에 그려져 있던 베이지안 확률 보정 공식과 오일러 totient 함수의 수식들이 머릿속에서 거대한 인과관계를 그리며 정렬되었다.
‘그림자 암산 (Mental Math) 가동.’
민재는 노트북의 키보드에서 손을 떼고, 오직 머릿속의 연산력과 공학용 계산기의 아날로그 다이얼만을 이용해 암호 해독 키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컴퓨터에 해독 연산을 맡기면 재단의 보안 네트워크에 감지될 위험이 있었기에, 민재는 스스로의 뇌를 CPU 삼아 연산을 처리했다.
`À와 `B̀ 변수의 공약수를 구하고, 이를 오일러 공식에 대입해 나머지 연산(Modulo)을 수행한다. 소수점 넷째 자리까지 변화하는 미세한 확률 오차를 카시오 계산기로 두드리며 수동으로 보정값을 뽑아냈다.
탁, 탁, 탁, 탁.
고요한 반지하 방 안에 공학용 계산기의 플라스틱 버튼이 부딪히는 경쾌하고 규칙적인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민재의 뇌 혈류량이 급격히 증가하며 관자놀이가 터질 듯이 박동했다. 코끝에서 미세한 비린내가 풍기더니, 이내 붉은 코피 한 방울이 뚝 떨어져 책상 위 연습장을 적셨다.
하지만 민재는 피를 닦을 시간조차 아깝다는 듯 계산기 액정만을 응시했다.
마침내, 계산기 화면에 최종 결과값인 8자리의 난수가 도출되었다.
`41126607`
민재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노트북 자판을 눌러 숫자를 입력하고 엔터 키를 쳤다.
스르륵—
화면의 붉은 경고등이 일제히 녹색으로 전환되며, 굳게 닫혀 있던 마이크로 SD 카드의 드라이브가 열렸다. 형 강민우가 목숨과 바꾸어 지켜낸 비밀 아카이브의 장막이 마침내 걷히는 순간이었다.
드라이브 내부에는 정돈된 파일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명성고 최근 3개년 정기고사 수학/영어 오답률 통계 메타데이터]
[교사별 출제 성향 및 문제 변형 공식 프로파일링 문서]
[베이지안 확률 기반 내신 등급 예측 알고리즘 소스코드 (Python)]
그리고 가장 깊숙한 폴더 안에서, 민재는 형의 일기장 텍스트 파일을 발견했다. 마우스를 클릭해 파일을 열자, 형의 담담한 글씨가 모니터를 채웠.
「명성고등학교의 1등급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재단 이사장 조상우와 교무부장 황인호는 정재계 자녀들의 학생부를 조작하고 시험 문제를 사전에 유출하는 방식으로 그들만의 카르텔을 유지하고 있다. 나는 이 조작 프로그램 ‘아테네’의 흔적을 발견했다. 만약 내가 잘못된다면, 이 데이터를 찾아낸 이가 나의 연구를 완성해 저 오만한 성벽을 무너뜨려 주길 바란다. 수학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까.」
민재의 눈동자가 분노로 짓눌렸다.
형은 자살한 것이 아니었다. 명성교육재단의 이사장 조상우와 교무실의 실세 황인호가 주도하는 거대한 입시 조작 음모를 고발하려다 입막음을 당해 추락사한 것이 분명했다. 그 추악한 기득권 세력은 형을 죽이고도 뻔뻔하게 성적 등급이라는 사슬로 학생들을 착취하며 군림하고 있었다.
“결국…… 점수로 가치가 결정되는 잔인한 전쟁터라면.”
민재는 코피를 훔쳐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형이 남긴 이 알고리즘으로, 당신들이 만든 성벽 자체를 내 현금 채굴기로 써주지.”
민재는 즉각 형의 예측 알고리즘 소스코드를 자신의 노트북에 이식하고 코딩을 시작했다. 형이 설계한 기초 뼈대에, 자신이 수집한 교사들의 최근 심리 상태와 스트레스 가중치 데이터를 결합해 ‘베이지안 확률 기반 출제 예측 모델’을 고도화했다.
창밖으로 붉은 새벽녘의 해가 서서히 떠오를 때쯤, 노트북 모니터 화면에 첫 번째 분석 시뮬레이션 결과가 로딩되기 시작했다.
[예측 알고리즘 가동: 대상 탐색 중……]
[데이터 매핑 완료. 첫 번째 타깃을 시각화합니다.]
화면 가득 붉은색 데이터 노드들이 얽히며 하나의 이름과 얼굴을 그려냈다.
`대상: 명성고 2학년 2반 담임 및 수학 교사 박태호`
`출제 경향성: 최근 스트레스 지수 최고조 (난이도 변동성 가중치 +35%)`
`중간고사 기하와 벡터 과목 출제 오류 예상 확률: 99.8%`
민재는 안경테를 고쳐 잡으며 화면에 비친 박태호의 붉은 데이터를 응시했다.
일주일 안에 500만 원을 만들기 위한 최초의 배팅판, 그 첫 번째 제물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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