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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의 칼날과 붉은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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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겨우 이 정도 판돈으로 만족하는 건 아니겠지? 이제 진짜 ‘골드 클래스’의 지분을 찢어발길 준비는 됐어?”


지원이 아이패드를 민재의 눈앞에 들이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화면 위에서 요동치는 푸른색 그래프가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기괴하게 비추고 있었다.


순간, 송우진이 거구를 움직여 민재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스포츠 테이핑 끈이 풀려 투박해진 우진의 두 주먹이 꽉 쥐어졌다. 그의 온몸에서 유도부 에이스 특유의 묵직한 살기가 뿜어 나왔다.


“너 뭐냐? 전교 1등이 여긴 왜 기어들어왔어? 당장 그 폰 치우고 꺼져.”


우진의 위협적인 목소리가 좁은 폐방송실 내부의 공기를 진공 상태처럼 얼려버렸다. 하지만 이지원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녀는 안경 너머로 우진을 싸늘하게 응시하며, 아이패드를 쥔 손끝에 아주 미세한 힘을 더할 뿐이었다.


“송우진, 유도부 에이스가 전교 꼴찌의 사냥개 노릇을 자처하는 꼴이라니. 중간고사 수학 4등급을 맞추니까 세상이 네 발밑에 있는 것 같니? 이 아지트가 교무실에 고발당하는 순간, 네 장학금도, 유도 인생도 끝이라는 걸 모를 만큼 머리가 나쁜 건 아닐 텐데.”


“이게 진짜……!”


우진이 한 걸음 더 내딛으려던 찰나, 민재가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우진의 단단한 어깨를 짚었다.


“우진아, 비켜봐. 수학적 대화가 먼저야.”


민재의 건조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우진은 이를 악물면서도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이제 민재와 지원, 두 천재의 시선이 공중에서 팽팽하게 부딪쳤.


민재는 안경테에 감긴 검은색 절전 테이프를 손가락으로 치켜올리며, 지원의 전신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이 작동했다.


‘동공 반응 정량 분석 가동.’


민재의 충혈된 눈동자가 지원의 신체적 피드백을 실시간으로 수치화했다.


[분당 깜빡임 횟수: 34회. 정상 범위를 2배 이상 초과. 극도의 만성 피로 및 정서적 불안 상태.]

[호흡 패턴: 얕고 빠른 흉식 호흡. 횡격막의 수축 상태 유지. 만성적인 스트레스 반응.]

[목소리 주파수: 미세한 고주파 떨림 감지. 성대의 긴장 가중치 84%.]


그녀는 강해 보였지만, 내면은 이미 한계까지 마모되어 부서지기 직전의 유리 벽과 같았다. 민재는 조용히 책상 위의 낡은 카시오 fx-570 공학용 계산기를 집어 들었다. 그 계산기 케이스 내부에는 방금 우진이 돌려준 수수료 30만 원이 정상적으로 숨겨져 있었다.


“교내 와이파이망의 특정 IP 대역에서 발생하는 비정상적인 암호화 패킷을 추적했겠지.”


민재가 먼저 침묵을 깨뜨렸다.


“매일 밤 10시부터 11시 사이, 마포구의 우회 서버와 통신하는 데이터 흐름. 전산망의 전력 소모 가중치를 분석해서 이 폐방송실을 특정하는 것. 전교 1등다운 정교한 추적이었어, 이지원.”


지원은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결과는 변하지 않아. 너희가 운영하는 사설 성적 거래소 ‘명문’의 모든 트래픽 경로와 알고리즘 소스코드가 내 손에 있어. 이건 단순한 학습 보조 도구가 아니야. 학교의 엄격한 등급 시스템을 해킹해서 돈을 벌어들이는 야만적인 사설 도박장이지. 수학을 이따위 투기판의 도구로 타락시킨 건 용납할 수 없어.”


“타락?”


민재가 낮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명성고의 기괴한 시스템을 향한 깊은 냉소가 담겨 있었다.


“정해진 등급에 따라 식사 줄이 나뉘고, 1등급은 한우를 먹고 9등급은 잔반을 배급받는 이 학교야말로 수학을 가장 야만적으로 타락시킨 곳이 아닌가? 점수라는 일차원적인 숫자로 인간의 존엄을 등급 매기는 것. 너는 그 정점에 서서 행복한가 보지?”


“닥쳐!”


지원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거칠게 흔들렸다. 민재의 송곳 같은 말이 그녀의 차가운 이성적 방어벽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순간, 지원의 교복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화면이 켜지며 메시지 알림이 반짝였다. 민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스마트폰 화면으로 향했다.


발신인은 ‘엄마’, 즉 명성고 학부모회장 윤혜린이었다.


[지원아, 이번 수학 서술형에서 1점을 깎였더구나. 유현우가 100점을 맞았는데 네가 어떻게 1점을 깎일 수가 있니? 엄마는 99점짜리 딸은 필요 없다고 했을 텐데. 오늘 밤 자습 2시간 더 늘려라. 내신 1.0을 유지하지 못하면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숨이 막히는 가스라이팅 문자였다. 지원은 황급히 폰 화면을 뒤집어 감추었지만, 이미 민재의 정밀한 시각 필터링은 문자 전체를 100% 뇌리에 각인한 뒤였다.


동시에 민재는 지원의 왼쪽 손목을 보았다. 단정한 교복 소매 밑으로 두꺼운 검은색 아대가 채워져 있었다. 지원이 흥분해 아이패드를 강하게 쥐는 순간, 아대가 아주 미세하게 위로 밀려 올라갔다.


그 틈새로 드러난 pale한 피부 위에는, 날카로운 칼날로 그어진 수많은 가느다란 붉은 흉터들이 낙서처럼 얽혀 있었다.


지원의 자해 흔적이었다.


완벽주의자 전교 1등, 골드 클래스의 정점이라는 화려한 가면 뒤에 숨겨진, 부모의 학업 압박이 낳은 비참하고 추악한 흔적.


민재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지원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평균 수면 시간 3시간 15분. 하루 카페인 섭취량 600mg 초과. 뇌 전두엽 가부하율 92%. 그리고…… 그 아대 밑에 숨겨진 붉은 흔적들.”


지원의 몸이 석상처럼 굳어졌다. 안경 너머 그녀의 눈동자가 공포와 수치심으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 너 지금 무슨…….”


“윤혜린 회장님이 원하는 건 이지원이 아니야. 생활기록부에 기재될 완벽한 숫자 ‘1.0’이지.”


민재의 목소리는 잔인할 정도로 낮고 정교했다. 그는 지원이 가장 숨기고 싶어 했던 영혼의 상처를 수학적인 팩트로 해체해 나갔다.


“너는 그 숫자의 노예가 되어 매일 밤 자신을 찌르고 있어. 그렇지 않으면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네가 아무리 완벽하게 정답을 써내려가도, 그 숫자가 너를 구원해 주지는 않아. 오히려 네 목을 옥죄는 사슬이 될 뿐이지.”


“그만해…… 그만하라고!”


지원이 아이패드를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그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고여 흘러내렸다.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타인에게 들켜본 적 없는 비참한 민낯이, 전교 꼴찌의 차가운 통찰력 앞에 완벽하게 발가벗겨진 순간이었다.


민재는 그녀를 다그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형의 유품인 카시오 계산기를 꺼내 그녀의 눈앞에 보여주었다.


“이지원. 점수라는 숫자가 정말 너의 가치라고 믿어?”


민재가 아대 속 상처를 가리키며 나직하게, 하지만 심장을 관통하는 무게감으로 속삭였다. 늘 얼음처럼 차갑고 오만하던 전교 1등 이지원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며 무너지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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