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패와 수학자
“전교 1등 이지원. 네가 여기 어떻게…….”
민재는 흘러내리는 코피를 교복 소매로 거칠게 훔쳐내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머릿속은 뜨겁게 달아오른 라즈베리 파이 서버처럼 터질 듯이 울려댔고,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이 시야를 흐렸다. 하지만 그의 차가운 이성은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본능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동공 반응 정량 분석 가동.’
민재의 안경 너머 충혈된 눈동자가 문앞에 선 이지원의 미세한 신체 반응들을 초 단위로 해체하기 시작했다. 지원의 호흡 주기는 1.5초로 극도로 안정되어 있었고, 교복 깃은 흐트러짐 하나 없이 단정했다. 그녀는 학교 당국이나 교사들을 대동하지 않고 홀로 이곳을 찾아왔다. 그녀가 들고 있는 최신형 아이패드 화면에는 민재가 구축한 사설 등급 거래소 ‘명문(銘文)’의 트래픽 패킷 경로와 핵심 알고리즘 소스코드가 선명하게 떠올라 있었다.
“학교 전산망의 전력 소모 가중치를 추적하는 건 생각보다 쉬웠어.”
지원이 아지트 내부의 낡은 아날로그 장비들과 칠판 가득 적힌 수학 공식들을 서늘한 눈빛으로 훑어보며 말했다.
“전교 꼴찌 강민재. 네가 명성고등학교의 그 기괴한 내신 신분제를 뒤흔드는 사설 배팅판의 설계자였을 줄이야. 이 소스코드가 교무실로 넘어가면 네가 어떻게 될지, 네 머리로 계산이 안 되지는 않겠지?”
지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지만, 민재는 그녀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음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고발자의 확신이 아니었다. 주입식 입시 시스템의 정점에 서서 정해진 정답만을 강요받던 천재 여고생이, 전교 꼴찌가 설계한 이 정교하고 전복적인 수학적 세계관을 마주했을 때 느끼는 지적 전율이자 경외감이었다.
민재는 안경테를 감은 검은 테이프를 치켜올리며 피 묻은 송우진의 기하학 족보 시험지를 움켜쥐었다.
“고발할 거면 지금 해, 이지원. 하지만 내일 아침 치러질 중간고사 수학 시험에서 내 알고리즘이 송우진을 정확히 4등급으로 만드는 걸 네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지원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박태호가 이번 시험 난이도를 고의로 급상승시켰어. 하위권 아이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출제 패턴을 완전히 깨부순 ‘블랙 스완’이야. 수학적 기초가 전혀 없는 8등급짜리 유도부가 그걸 뚫고 4등급 ‘더스트 클래스’로 진입하는 건 수학적으로 불가능해.”
“불가능을 상수로 바꾸는 게 통계학이야.”
민재는 바닥에 피가 섞인 침을 뱉어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내일 시험 결과가 나오면 알겠지. 내 알고리즘이 진짜인지, 아니면 단순한 사기극인지.”
지원은 침묵 끝에 아이패드를 거두며 돌아섰다.
“좋아. 내일 오후 성적 게시판이 붙을 때까지 네 고발을 유예하지. 하지만 1점의 오차라도 발생한다면, 이 소스코드는 즉시 교무부장 황인호의 메일함으로 전송될 거야.”
지원의 구두 소리가 멀어지며 폐방송실의 철문이 닫혔다. 민재는 긴장이 풀리며 책상 위로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우진에게 건넨 족보와 자신의 오른손가락, 그리고 거래소 ‘명문’의 운명이 내일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결정될 터였다.
***
토요일 아침, 명성고등학교 교정은 숨 막히는 침묵에 잠겨 있었다. 차가운 석조 건물 교실 안에는 가늘게 떨리는 연필 소리와 긴장된 호흡 소리만이 가득했다.
“종 칠 때까지 손은 책상 밑으로.”
담임 박태호가 교단 위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다그쳤다. 주식 계좌 폭락과 부부싸움으로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온 그의 얼굴에는 하위권 학생들을 성적으로 난도질해 자신의 출제 권위를 세우겠다는 비열한 독기가 서려 있었다.
시험지가 배포되고 시작종이 울리는 순간, 교실 곳곳에서 억눌린 신음과 절망의 비명이 동시에 터져 나왔.
“이게 뭐야……? 고교 과정을 벗어난 거잖아!”
“벡터 내적 수식이 왜 이리 더럽게 꼬여 있어?”
평소 기출문제의 숫자만 바꾸던 박태호의 패턴은 온데간데없었다. 기하학 도형의 대칭성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연산 과정을 비정상적으로 복잡하게 만든 의도적인 ‘시간 끌기용’ 덫들이 시험지 전면을 도배하고 있었다.
교실 뒤편에 앉은 송우진은 시험지를 받아든 채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그의 거구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문제를 읽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는 듯했다. 하지만 그 순간, 어젯밤 민재가 건네준 피 묻은 기하학 족보의 시각적 이미지들이 그의 뇌리에 번개처럼 내리쳤.
‘우진아, 수식을 읽으려 하지 마. 벡터는 힘의 방향이다. 유도에서 상대를 메칠 때, 상대의 무게중심을 무너뜨리는 회전축이 바로 이 벡터의 내적값이야.’
‘박태호는 지금 주식 폭락으로 이성을 잃었어. 그가 문제를 비틀 때 사용하는 각도는 무조건 그의 강박적인 편향인 \( \theta = \frac{5\pi}{12} \)야. 이 회전축을 기준으로 힘을 흘려보내면, 복잡한 연산 없이도 도형의 대칭축이 단번에 보여.’
우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신기하게도 복잡한 수식 너머로 도형의 회전 궤적이 마치 유도 매트 위에서 상대의 깃을 잡고 기울이기를 할 때의 물리적 궤적처럼 직관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이쪽이 축이다. 힘을 이 방향으로 흘려보내면…….’
우진의 투박한 손이 스포츠 테이핑 끈이 단단히 감긴 주먹으로 샤프를 쥔 채 거침없이 답안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연산 과정을 건너뛰고 도형의 공간적 인과관계만을 쫓는 기적 같은 ‘그림자 암산’의 실전 적용이었다. 박태호가 파놓은 교묘한 정의역 제한 감점의 덫들은 우진의 직관적인 공간 벡터 필터링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무력화되었다.
***
월요일 오후, 본관 1층 성적 게시판 앞은 아수라장이었다.
평균 점수 32.4점. 명성고 역사상 최악의 불지옥 난이도에 상위권 아이들조차 멘탈이 붕괴되어 울음을 터뜨리고 있었다. 교무실 앞에서는 난이도 조작에 항의하는 학부모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하지만 하위권 ‘더스트 클래스’의 아이들이 모여 있는 게시판 구석에서 믿을 수 없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야, 송우진 점수 봐봐! 64점이야!”
“미친 거 아냐? 이 난이도에 64점이면 정확히 상위 30% 컷이잖아!”
[수학 과목 성적 분포 등급: 송우진 - 4등급 (더스트 클래스 최상위 진입)]
정확히 4등급 턱걸이 점수였다. 단 1점의 오차도 없이, 민재의 알고리즘이 예측한 우진의 합격 가이드라인이 현실로 구현된 순간이었다. 교무실 복도에서 우진의 유도부 감독이 달려와 우진의 넓은 어깨를 끌어안으며 환호했다.
“우진아! 대학 장학금 지켰다! 전국대회 출전권도 살렸어!”
우진은 감독의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저 멀리 교실 복도 구석에서 낡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무표정하게 걸어가고 있는 민재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가슴속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구쳐 올랐다.
그때, 우진의 주머니 속 스마트폰이 진동했다. 발신인은 사채업자 최두식이었다. 우진은 침을 삼키며 전화를 받았다.
- 우진아, 대박 파이낸스 최두식이다. 방금 네 아버지 채무 계약서의 초기 보증금과 사채 이자 연체금 총 1,000만 원이 완납 처리되었다. 채무 증서 원본은 네 주소지로 등기 발송했으니 확인해라.
“……예? 그게 무슨 소립니까?”
- 어떤 안경 쓴 애송이 녀석이 거래소 수익금이라면서 전액 현금으로 상납하고 가더군. 약속은 칼같이 지키는 녀석이라 거래는 종결이다. 축하한다, 유도부 에이스.
뚝, 하며 전화가 끊겼다.
우진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민재는 단순히 자신의 성적을 올려 손가락 계약을 이행한 것이 아니었다. 거래소 ‘명문’의 첫 중간고사 예측 성공으로 벌어들인 배당금 수수료 30만 원과 자신의 초기 시드머니 전체를 동원해, 우진의 숨통을 조이던 불법 사채의 사슬을 완전히 끊어준 것이다.
우진의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평생 폭력과 멸시 속에서 사냥개처럼 길러졌던 소년에게, 오직 지성과 신뢰로 자신과 가족을 구원해 준 진짜 ‘수학자’가 나타난 순간이었다.
***
늦은 밤, 명성고등학교 별관 4층 폐방송실 아지트.
낡은 오디오 랙 내부의 라즈베리 파이 서버가 조용히 팬을 돌리며 녹색 불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민재는 책상 앞에 앉아 낡은 카시오 fx-570 공학용 계산기의 수식을 점검하고 있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며 송우진의 거구의 실루엣이 들어섰다. 그의 양손 주먹에는 늘 감겨 있던 흰색 스포츠 테이핑 끈이 풀려 있었다. 우진은 말없이 민재의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그의 매서운 눈동자에는 전교 꼴찌를 향한 갈취나 위협의 기색은 단 1%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깊은 경외감과 뜨거운 의리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쿵.
우진이 민재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185cm의 거구가 전교 꼴찌 수학자 앞에 스스로를 낮춘 것이다. 우진은 조심스럽게 품에서 낡은 카시오 계산기를 꺼내 두 손으로 정중히 받쳐 들고 민재에게 건넸다.
“이거, 네 목숨 같은 유품이잖아. 돌려줄게.”
민재는 말없이 계산기를 받아 체육복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형의 유품이 주는 묵직한 질감이 그의 심장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그리고 최두식의 채무 계약서…… 네가 해결해 줬다는 거 들었어.”
우진이 고개를 숙이며 굵은 눈물방울을 먼지 쌓인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 같은 쓰레기를 위해 네 전 재산을 털어 넣다니……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민재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건조하게 대답했다.
“비즈니스 파트너의 신변이 위협받는 건 내 예측 알고리즘의 가장 큰 리스크 변수니까. 리스크를 사전에 제거하는 건 자산 관리의 기본이야.”
우진은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훔쳐내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눈빛에 유도부 에이스 특유의 단단한 결의가 서렸다.
“이유가 뭐든 상관없어. 오늘부터 내 몸은 네 방패다.”
우진이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강하게 치며 선언했다.
“명성고 안에서 너와 이 거래소 ‘명문’을 노리는 새끼들은, 그게 선도부든 학생회든 내가 내 몸뚱이로 다 쓸어버릴 거야. 약속한다, 강민재.”
두 청춘의 손이 공중에서 뜨겁게 맞잡아졌다. 전교 꼴찌 수학자의 지성과 학내 최강의 무력 방패가 결합하여, 명성고의 견고한 등급 카르텔을 무너뜨릴 완벽한 ‘사설 금융 동맹’이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짝, 짝, 짝.
그때, 폐방송실 구석의 어두운 방음벽 방음 포스터 뒤편에서 느닷없는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감동적인 동맹이네.”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푸른색 아이패드의 디스플레이 화면이 켜졌다. 화면 가득히 실시간으로 가치가 폭등하고 있는 ‘명문’ 거래소의 지분 변동 그래프가 요동치고 있었다.
지원의 차가운 안경알 위로 푸른빛의 주식 차트가 기괴하게 반사되었다. 그녀가 천천히 걸어 나오며 민재를 향해 도전적인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그 난이도 조작을 뚫고 8등급을 4등급으로 만들다니. 네 알고리즘의 무결성…… 인정해 줄게, 강민재.”
우진이 즉각 민재의 앞을 가로막아 서며 주먹을 쥐었으나, 민재는 차분하게 우진의 어깨를 짚어 제지했다. 지원의 눈빛은 고발자의 그것이 아니었다. 더 큰 지적 전쟁을 갈망하는 천재의 눈빛이었다.
지원이 아이패드를 민재의 눈앞에 들이밀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하지만 겨우 이 정도 판돈으로 만족하는 건 아니겠지? 이제 진짜 ‘골드 클래스’의 지분을 찢어발길 준비는 됐어?”
Chưa có bình luận nào. Hãy là người đầu tiê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