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등급의 지옥, 명성고등학교
대한민국 사교육의 심장, 대치동 한복판에 우뚝 솟은 명성고등학교의 점심시간은 철저히 통제된 계급 사회의 축소판이었다.
“비켜.”
짧은 단말마와 함께 덩치 큰 남학생이 급식실 대기 줄의 허리를 거칠게 자르고 들어왔다. 가슴팍에 금빛으로 번쩍이는 ‘1등급’ 자수가 새겨진 교복 타이. 명성고의 절대 권력자이자 최상위 기득권층인 ‘골드 클래스’ 학생이었다.
그 뒤로 서너 명의 우등생들이 당연하다는 듯 줄줄이 새치기를 감행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30분째 줄을 서 있던 하위권 학생들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어 항의하지 못했다. 명성고에서 내신 등급은 단순한 성적표의 숫자가 아니었다. 그것은 급식실의 대기 줄을 결정하고, 메뉴를 차별하며, 심지어 교실 내에서의 인간 대접 여부까지 가르는 절대적인 신분증이었다.
급식실 안쪽의 풍경은 더욱 기괴했다. 저 멀리 통유리 너머로 보이는 골드 클래스 전용 구역에는 육즙이 흐르는 한우 스테이크와 신선한 샐러드가 가득 담긴 도자기 식기가 놓여 있었다. 반면, 9등급을 비롯한 하위권 ‘아웃사이더’들이 배급받는 식판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식어빠진 시래깃국과 잔반 수준의 마른 반찬이 전부였다. 차가운 석조 건물 바닥에 주저앉아 밥을 먹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굴욕감이 깊게 배어 있었다.
그 소란스러운 차별의 한가운데, 강민재는 헐렁한 체육복 차림으로 묵묵히 서 있었다. 테이프로 다리를 엉성하게 고친 부러진 안경 너머로, 그의 눈동자는 깊고 가라앉아 있었다.
민재는 화를 내지도, 억울해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머릿속의 다이얼을 돌리고 있을 뿐이었다.
‘골드 클래스 학생 1명이 새치기를 할 때마다 대기 줄 전체의 정체 시간은 평균 1.4분 증가한다. 현재 배식대 뒤편의 남은 스테이크 양은 약 12인분. 상위권 아이들의 진입 속도와 소모율을 고려할 때, 5분 이내에 5등급 이하의 배식대에는 단백질 공급원이 완전히 고갈될 확률은 99.4%.’
민재에게 이 기괴한 학교는 분노의 대상이 아니라, 철저히 정량화할 수 있는 데이터의 집합소에 불과했다. 숫자는 감정을 믿지 않는다. 그리고 민재는 그 숫자를 다루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전교 최하위 ‘9등급 아웃사이더’라는 공식 신분 뒤에 숨겨진 진짜 그의 머리는 이미 학교 시스템의 모순을 완벽하게 계산해 내고 있었다.
“야, 9등급.”
급식실의 차가운 잔반 냄새를 뚫고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민재의 고막을 찔렀. 땀을 흘리며 두꺼운 돋보기안경을 치켜올린 사내, 2학년 2반의 담임이자 학생부 소속 교사인 박태호였다.
“강민재. 너 점심 처먹고 당장 교무실로 와라. 오늘 화학실이랑 본관 화장실 청소 당번 너니까.”
박태호는 민재의 식판을 혐오스럽다는 듯 훑어보며 혀를 찼다.
“어차피 공부도 안 하고 하루 종일 잠만 처자는 놈이 몸이라도 때워야지. 안 그래? 학교 시설에 기생하는 꼴찌 놈들은 이럴 때라도 밥값을 해야지.”
주변에 서 있던 골드 클래스 아이들이 킥킥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민재는 그들의 조롱 섞인 시선을 고스란히 받으면서도, 아무런 대꾸 없이 고개를 까딱 숙였다.
“예, 선생님. 바로 가겠습니다.”
비굴할 정도로 고분고분한 태도였지만, 민재의 안경 너머 눈동자는 박태호의 일거수일투족을 해부하듯 관찰하고 있었다.
‘박태호. 왼쪽 눈가 미세 떨림 주기 1.2초. 걸음걸이의 템포가 평소보다 15% 빠름. 커피 컵을 쥔 손끝에 묻은 분홍색 미세 가루는 모의고사 출제용 특수 토너. 최근 이사장에게 교무 평가 압박을 받고 있으며, 스트레스 지수가 극에 달해 있음. 다가올 중간고사 수학 과목의 난이도를 비정상적으로 꼬아 출제할 확률 87.5%.’
민재는 묵묵히 식판을 반납하고 교무실로 향했다. 복도를 걸어가는 그의 머릿속에서는 박태호의 미세한 행동 패턴들이 숫자가 되어 거대한 확률 그래프를 그리며 춤을 추고 있었다. 민재는 지금 당장 힘으로 부딪히는 것은 자멸임을 알고 있었다. 상대의 패턴을 수집하고, 그들의 무의식적인 편향을 데이터화하는 것. 그것이 전교 꼴찌가 명성고라는 거대한 학벌 카르텔을 무너뜨리기 위해 설계 중인 첫 번째 금융 전쟁의 기초 공사였다.
방과 후, 대치동 학원가 골목은 밤 10시가 넘어가며 노란 학원 버스들과 학부모들의 외제차가 엉켜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해 있었다. 빌딩 숲이 뿜어내는 뜨겁고 차가운 열기 사이로, 민재는 낡은 가방끈을 꽉 쥔 채 어두운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화려한 대치동의 불빛이 닿지 않는 음침한 빌라촌 구석. 햇빛이 전혀 들지 않아 늘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찌르는 반지하 단칸방이 민재의 집이었다.
철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가느다란 기계음이었다.
위이이잉— 쉭, 쉭.
낡은 산소호흡기가 뿜어내는 인위적인 호흡 소리. 침대 위에는 창백하게 마른 체구의 여동생 강민아가 환자복에 파묻힌 채 누워 있었다. 민아의 마른 손에는 민재가 첫 아르바이트 수익으로 사다 준 캐릭터 보온병이 꼭 쥐여 있었다. 동생의 심장 벽이 서서히 굳어가는 확장성 심근병증. 매달 수백만 원에 달하는 약값과 수억 원의 심장 이식 수술비가 필요한 생사의 벼랑 끝이었다.
“오빠 왔어?”
민아가 산소마스크 너머로 하얗게 튼 입술을 움직여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민재는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을 누르며 여동생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응. 민아 약은 잘 먹었어? 기계 소리가 좀 큰 것 같은데, 내일 원장님께 여쭤볼게.”
방 한구석의 낡은 이불 위에는 어머니 박선자가 쓰러지듯 누워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대치동 학원가 빌딩들을 밤새 청소하며 두 자녀를 부양하는 어머니의 손등은 락스 물에 절어 거칠고 갈라져 있었고, 방 안 가득 파스 냄새가 진동했다.
민재는 부엌 싱크대 옆에 놓인 구청의 지원 거부 서류를 발견했다. 복지 사각지대라는 핑계로 긴급 의료비 지원 신청이 거절당했다는 차가운 행정 문서.
가난은 죄가 아니라지만, 이곳 대치동에서 가난은 서서히 숨통을 조여 죽이는 사형 선고와 같았다. 정직한 육체노동만으로는 동생의 목숨을 구할 수도, 이 지옥 같은 반지하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 합법의 테두리 안에서는 절대로 구할 수 없는 거액의 돈.
민재는 책상 앞으로 가 털썩 앉았다. 책상 위에는 수능 만점자였으나 3년 전 명성고 본관 옥상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형 강민우의 유품인 ‘카시오 fx-570 공학용 계산기’가 놓여 있었다. 낡고 흠집이 가득한 계산기의 플라스틱 표면을 만지며, 민재는 차갑게 굳어가는 이성을 다잡았다.
‘법이 우리를 구하지 않는다면, 저들이 만든 잔인한 룰 안에서 가장 치명적인 무기를 만들어 주마.’
민재는 형의 계산기 전원을 켰다. 초록색 액정에 가느다란 빛이 들어오는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 명성고등학교의 모든 성적 데이터와 교사들의 출제 성향 가중치가 한 줄의 거대한 파이썬 코드로 압축되며 살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신 등급이 신분이 되는 학교. 그렇다면 그 등급의 변동성을 자산으로 삼아 사설 배팅판을 열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단순한 투기판이 아니었다. 점수로 아이들을 줄 세워 착취하는 오만한 학벌 카르텔의 심장부에 꽂아 넣을, 강민재식 금융 전쟁의 시작이었다.
위이이잉—.
산소호흡기의 기계음만이 조용한 지하방을 채우던 그 순간.
쾅—!!!
지하방의 낡은 철문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거칠게 걷어차였다. 먼지 가루가 사방으로 휘날리며, 문틈 사이로 험악하고 거대한 그림자들이 들이닥쳤다. 문신으로 뒤덮인 거구의 사내들, 외삼촌의 사채 빚을 받으러 온 최두식 패거리였다. 차가운 강바람과 함께 폭력의 공포가 반지하 단칸방을 단숨에 집어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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