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대나무의 첫 번째 제자
창강의 검은 물결을 가르는 평저선에서 내려 천조산의 음산한 품으로 기어들었을 때, 추공의 전신은 이미 지옥과 극락을 오가고 있었다.
채홍의 독비단실에 베인 어깨와 가슴팍의 상처는 단순한 자창이 아니었다. 정파 명문 남궁세가의 비전 독물인 빙결열독(氷結熱毒)은 차가운 얼음의 기운으로 혈관을 얼려가면서도, 그 내면에는 뼈를 태워버릴 듯한 열성을 숨기고 있었다. 이 음독한 기운이 단전 속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양명경 화독(陽明經 火毒)과 반응하자, 기경팔맥이 미친 듯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크윽…….”
추공은 검은 대나무 숲의 초입에서 굵은 대나무 대를 움켜쥐었다.
허대수가 천조산 한철과 백련강 스프링으로 정교하게 제련해 준 오른쪽 의족의 무게가 평소보다 열 배는 더 무겁게 느껴졌다. 경맥이 마비되어 내력을 의족의 접합부로 흘려보내지 못하자, 한철의 둔중한 무게가 고스란히 왼쪽 다리의 무릎 관절로 쏠렸다. 절뚝거리는 걸음걸이마다 뼈가 어긋나는 듯한 극심한 마찰음이 그의 척추를 타고 뇌리로 올라왔다.
이대로 야수현 분타의 초소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마유신의 사냥개들이 사방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 단전이 폭주하는 상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스스로 양면일도임을 자백하는 꼴이었다.
추공은 이빨을 악물고 천조산 중턱의 은밀한 그늘로 몸을 돌렸다. 안개가 자욱한 검은 대나무 숲은 밤이 되면 사람의 시야를 완벽히 차단하는 천혜의 장막이었다. 그는 대나무 잎이 서글프게 서걱이는 소리를 이정표 삼아, 역대 장문인들만이 출입할 수 있었던 금단의 구역, 천조종 지하 일월릉(日月陵)의 비밀 틈새로 스며들었다.
석문이 고요히 닫히고, 일월릉 지하 밀실의 서늘한 공기가 추공의 타오르는 안면을 감싸 안았다.
추공은 비틀거리며 밀실 한구석, 차가운 바위틈에서 똑똑 떨어지는 한천수(寒泉水)가 고인 석대로 다가갔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가죽 호리병에 한천수를 담아 단숨에 들이켰다. 얼음보다 차갑고 맑은 음기가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단전으로 쏟아졌다.
치이이익!
마치 달구어진 달구쇠에 찬물을 끼얹은 듯, 단전 내부에서 거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남궁세가의 빙결열독과 단전의 화독이 한천수의 극음한 기운에 눌려 일시적으로 동결되기 시작했다. 추공은 차가운 석판 바닥에 외다리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일월신공 기초구결(日月神功 基礎口訣)을 암송했다. 들숨과 날숨을 극도로 미세하게 조율하며, 상충하는 세 가지 기운을 단전 깊은 곳에 억지로 가두어 얼려버리는 처절한 호흡이었다.
두 시진이 지나서야 추공은 겨우 눈을 떴다.
얼굴을 덮었던 검붉은 열기는 가라앉았으나, 그의 기경팔맥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공력을 무리하게 시전할 경우 경맥이 유리처럼 깨져나갈 터였다. 허대수가 심어둔 의족 내부의 빙백 단도 기믹 역시 이미 채홍을 처단하는 데 소모되어 작동하지 않았다. 지금의 그는 절정의 고수가 아닌, 단지 한 자루의 무거운 목도를 쥔 외다리 장애인에 불과했다.
추공은 땀에 젖은 밤의 살수 도포를 수습하고 풍검의 목도(木刀)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다시 검은 대나무 숲으로 기어 나왔다. 밤의 차가운 강풍이 대나무 숲을 흔들 때마다, 그는 한 발로 서서 대나무 끝의 탄성을 디디며 신체의 절대 균형 감각을 시험했다. 다리의 통증이 뼈를 깎았으나, 수련을 멈출 수는 없었다. 복수의 칼날은 무뎌지는 순간 부러지는 법이니까.
스스슥.
그때, 빽빽한 대나무 숲 너머에서 다급하고 불규칙한 발걸음 소리가 청이법(聽耳法)의 그물망에 걸려들었다.
단순한 짐승의 기척이 아니었다. 공포에 질려 헐떡이는 가냘픈 숨소리, 그리고 그 뒤를 쫓는 거칠고 패도적인 사파 무사들의 발걸음 진동이었다.
추공은 즉시 대나무 대 뒤로 신형을 감추고 기척을 지웠다.
안개를 뚫고 숲 안쪽으로 굴러 떨어지듯 나타난 것은 한 소년이었다. 남루한 하급 무복은 이미 흙먼지와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고, 앳된 얼굴에는 매질로 생긴 피멍이 가득했다. 천조종의 하급 고아 소년, 아철(阿鐵)이었다.
아철의 부모는 과거 뇌진풍의 찬탈에 끝까지 저항하다가 성문 대들보에 목이 걸려 죽어간 문파의 마지막 충신들이었다. 고아가 된 아철은 낮마다 뇌태백과 곽두식 같은 삼류 무뢰한들에게 개처럼 두들겨 맞으면서도, 밤이면 부모의 원한을 갚겠다며 홀로 주먹을 쥐던 아이였다.
“거기 서라, 쥐새끼 같은 놈!”
숲 너머에서 뇌진풍의 하급 순찰 무사 두 명이 도검을 치켜들고 나타났다. 그들은 도망치던 아철을 대나무 밑동으로 걷어찼다.
“이 어린 원수의 자식이 감히 분타주님의 곳간에서 약초를 훔치려 해? 네놈의 부모 곁으로 보내주마!”
무사의 서슬 퍼런 칼날이 울부짖는 아철의 목덜미를 향해 내리눌려던 찰나였다.
사라락.
바람이 불지 않았음에도, 아철의 머리 위에 서 있던 거대한 검은 대나무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무사들이 의아한 듯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 순간, 칠흑 같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기괴한 송곳니가 돋아난 흑철 귀면(黑鐵 鬼面)이 내려앉았다.
추공은 기계 의족의 스프링 장치를 쓰지 않고, 오직 왼쪽 다리 하나만의 도약력과 신체의 회전력만으로 대나무 끝에서 낙하했다. 그의 손에 쥔 풍검의 목도가 허공에서 단 한 번 회전했다.
일도류 정좌도법(一刀流 靜座刀法) 제1식, 단극참(單極斬).
스사삭!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속도로 뿜어진 단 한 줄기의 푸른 도광이 어둠을 갈랐다. 무사들의 목에 가느다란 선이 생기더니, 이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하얗게 얼어붙으며 그대로 진흙탕 바닥으로 쓰러졌다. 목 경맥이 단숨에 동결되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무성(無聲)의 처단이었다.
“……!”
바닥에 엎드려 죽음을 기다리던 아철의 눈동자가 깨질 듯이 커졌다.
소년은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검은 도포의 살수를 바라보았다. 한쪽 바지춤이 허전하게 묶인 채, 한 자루의 낡은 목도를 쥐고 한 다리로 대지를 굳건히 디디고 선 사내. 낮에는 대연무장에서 삼류 무사들이 침을 뱉고 걷어차도 허허 웃으며 걸레질을 하던 외다리 청소부 늙은이, 추공의 실체였다.
“추, 추공 아저씨……?”
아철의 목소리가 격렬하게 떨렸다. 경외감과 공포,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진실이 소년의 어린 마음을 세차게 흔들었다.
추공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가면 뒤로 비치는 그의 안광은 낮의 비굴한 청소부의 것이 아니었다. 서슬 퍼런 칼날 그 자체였다.
스윽.
추공이 목도 끝을 아철의 목덜미에 나직이 겨누었다. 살기가 숲의 안개를 얼려버릴 듯 무겁게 내려앉았다.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보았구나, 아이야.”
추공의 차가운 음성이 대나무 잎사귀 사이로 스며들었다.
정체가 탄로 나는 순간, 자신뿐만 아니라 누이 설희와 탁삼, 그리고 문파의 마지막 생존자들 전체가 무림맹과 흑사련의 칼날에 몰살당할 터였다. 살수의 이성은 소년의 입을 영원히 막아야 한다고 속삭이고 있었다.
하지만 아철은 달아나거나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소년은 진흙탕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리며 추공의 목도 끝을 향해 이마를 짓찧었다.
“죽이시려면 죽이십시오! 하지만…… 하지만 제발 제 원수들을 갚아주십시오! 아저씨가 밤마다 그 배신자들의 목을 베는 양면일도이심을 알고 있었습니다! 저를 제자로 거두어 주십시오! 제 부모님의 원수를, 천조종의 원수를 제 손으로 갚게 해주십시오!”
소년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을 넘어선 처절한 복수심과 굳건한 의리가 깃들어 있었다.
추공은 목도를 겨눈 채 가만히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아철의 눈동자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과거 스스로 다리를 부러뜨려야 했던 치욕의 밤, 자신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증오의 불꽃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이 아이는 뇌진풍의 개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죽어간 충신 부부의 마지막 핏줄이었다.
‘이 아이라면…… 내 정체를 숨겨줄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눈과 귀가 될 수 있으며, 천조종의 부러진 도법을 이어받을 유일한 재목이다.’
추공은 천천히 목도를 거두었다. 그리고 아철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청이식 심안으로 진단한 소년의 체내는 참혹했다. 삼류 무도들의 가혹한 매질로 인해 기경팔맥이 꼬여 있었고, 단전의 기초 내공은 완전히 망가져 있었다. 이대로 두면 무공은커녕 평생을 폐인으로 살아가야 할 신체였다.
“내 지옥의 길을 걷는 살수일 뿐, 협객이 아니다. 나를 따르는 길은 매일 밤 뼈가 바스러지는 고통을 동반할 터인데, 견딜 수 있겠느냐?”
“견디겠습니다! 어떤 고통이든 견디겠습니다!”
아철이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맹세했다.
추공은 소년을 가부좌 틀고 앉게 한 뒤, 그의 등 뒤에 섰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 끝에 미세한 태극진기를 실어 아철의 백회혈과 대추혈을 짚었다.
“천조종의 정종 무학은 뼈를 깎는 인내에서 시작된다. 지금 전수하는 백일축기 심법(百日築基 心法)은 네 망가진 경맥을 넓히고 단전의 기초를 단단한 반석처럼 다져줄 것이다. 숨을 고르고, 내 진기의 흐름을 따르라.”
추공이 손끝을 통해 자신의 순수한 정종 진기를 아철의 등 뒤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소년의 꼬여 있던 경맥이 강제로 펴지며 아철의 입에서 나직한 신음이 터져 나왔으나, 소년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추공의 진기는 소년의 망가진 단전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새로운 내공의 씨앗을 심어주었다.
자신의 내력을 나누어 주며 아철의 경맥을 정화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스으으으-
검은 대나무 숲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안개가 기이한 각도로 뒤틀리며 흐트러졌다.
바람이 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주변 사방 십 보 안의 검은 대나무 잎사귀들이 소리 없이 바스라지며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추공의 청이식 심안이 격렬하게 고동쳤다.
숲 너머 어둠 속에서, 단 한 줄기의 숨소리조차 내지 않는 서늘하고 날카로운 살기가 번개처럼 다가오고 있었다. 흑사련이 보낸 일류 추격자이자 그림자 자객인 귀영 률(鬼影 률)의 살기였다. 채홍의 죽음과 현장에 남겨진 의족의 미세한 흔적을 추적해 온 사냥개가 마침내 이 깊은 대나무 숲의 턱밑까지 당도한 것이다.
추공은 아철의 등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안개 너머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차가운 살의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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