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천동의 붉은 숨결
대나무 잎사귀를 때리는 밤바람 소리가 귓전을 거칠게 스쳐 지나갔다.
설지후의 청강검을 부러뜨리고 가문의 무학이 결코 삼류 무뢰배들의 전유물이 아님을 증명해 냈으나, 승리의 희열은 찰나에 불과했다. 허공을 갈랐던 단극참(單極斬)의 반동은 외다리 사신의 육체를 가차 없이 파괴하고 있었다.
“윽…… 하아, 윽!”
추공은 검은 대나무 줄기를 움켜쥔 채 무릎을 꿇었다. 입술 사이로 흘러내린 검붉은 피가 진흙 바닥의 낙엽 위로 뚝뚝 떨어졌다. 단순한 내상이 아니었다. 단전 깊은 곳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시한폭탄, 양명경 화독(陽明經 火毒)이 걷잡을 수 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여기에 기루 취춘루에서 채홍의 독비단실에 베였던 상처를 통해 침투한 남궁세가의 비전 독 기운이 화독의 열기와 결합하여 폭주하기 시작했다. 뜨거운 불꽃과 차가운 얼음 송곳이 동시에 온몸의 기경팔맥을 갈기갈기 찢어발기는 듯한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전신 피부가 검붉게 타오르며 아지랑이 같은 열기가 아른거렸다.
오른쪽 다리가 없는 비참한 신체는 균형을 잃고 쓰러지려 했다. 허대수가 정교하게 제련해 준 천조산 한철 의족의 둔중한 무게감이 오늘따라 천 근처럼 무겁게 왼쪽 어깨와 척추를 짓눌렀다. 이대로 의식을 잃는다면 가문의 복수도, 누이 설희의 안전도 모두 끝이었다.
‘살아야 한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다.’
추공은 이를 악물었다. 입안 가득 고이는 비린 피를 강제로 삼키며, 그는 빗자루 손잡이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켰다. 절뚝거리는 걸음마다 뼈를 깎는 통증이 척추를 타고 뇌리로 솟구쳤으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흑철 귀면 뒤에서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그가 향할 곳은 단 하나, 천조산 가장 깊은 지하에 위치한 극음(極陰)의 성지, 한천동(寒氷洞)이었다.
***
천조산 한천동은 만년설이 녹아내린 빙수가 지하 깊은 암반을 뚫고 흘러드는 천연의 얼음 동굴이었다.
동굴 입구에 다다르자, 뼈를 찌르는 듯한 차가운 냉기가 검붉게 타오르는 추공의 얼굴을 때렸다. 동굴 벽면은 단단하고 투명한 얼음 장막으로 뒤덮여 있었고, 천장에는 칼날처럼 예리한 고드름들이 무수히 매달려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서리가 입안에서 얼어붙는 절대 영도의 공간이었다.
“하아…… 윽!”
추공은 비틀거리며 동굴 안쪽으로 기어 들어갔다. 이미 하반신의 기경팔맥은 완전히 마비되어 한 걸음도 걷기 힘든 상태였다. 그는 무거운 한철 의족을 바닥에 질질 끌며, 동굴 중앙의 가장 차가운 얼음 바닥 위에 주저앉았다.
더러워진 밤의 살수 도포를 거칠게 벗어던지자, 검붉게 부풀어 오른 전신의 기경팔맥이 흉측하게 요동치는 모습이 드러났다. 남궁세가의 비전 독과 화독이 심장으로 향하는 길목을 막아서기 위해, 그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 한빙진기 운용법(한빙진기 운용법)의 구결을 나직하게 암송하기 시작했다.
‘음기(陰氣)를 끌어들여 단전을 얼려라. 불꽃이 심장을 태우기 전에, 전신의 피를 멈추어야 한다.’
추공은 얼음 바닥에 닿은 왼손 손바닥을 통해 한천동의 극한 냉기를 온몸으로 빨아들였다. 서늘한 한빙 진기가 손끝 경맥을 타고 들어가 끓어오르는 혈관 속으로 침투했다.
치이이익!
마치 뜨겁게 달구어진 무쇠에 찬물을 끼얹은 듯, 그의 체내에서 기괴한 마찰음이 일며 하얀 수증기가 모공을 통해 폭발하듯 뿜어 나왔다. 화독의 뜨거운 열기와 동굴의 극음 한기가 전신 경맥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뼈 속까지 얼어붙는 고통과 살가죽이 타들어 가는 통증이 동시에 뇌리를 난도질했다.
추공은 억지로 내력을 가동해 체내의 남궁세가 비전 독 기운을 단전 밖으로 밀어내려 시도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판이었다. 정파 명문의 정교한 독기는 그의 뜨거운 양명경 화독을 먹이 삼아 오히려 더 맹렬하게 타오르며 단전을 파열시키려 했다.
“푸헉!”
추공의 입에서 차가운 선혈이 다시 한번 얼음 바닥 위로 쏟아졌다. 붉은 피가 바닥에 닿자마자 하얗게 얼어붙으며 기괴한 혈빙(血氷)을 만들어냈다. 단전의 기류가 뒤틀리며 기절하기 직전의 무기력증이 몰려왔다. 힘으로 밀어내려 해선 안 되었다. 오직 조화와 봉인만이 살길이었다.
그는 품속에서 가죽 호리병을 꺼내 한천수(한천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얼음 고드름 끝에서 떨어진 순수한 음기 이슬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단전 내부의 뜨거운 화독이 일시적으로 얼어붙으며 전신 마비 상태로 빠져들었다. 고통은 사라졌으나, 이제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바로 그때였다.
한천동 입구의 어두운 바위 그늘 너머에서, 인기척조차 내지 않고 소리 없이 다가온 한 사내가 있었다.
아니, 사내가 아니었다. 보라색 여무복을 입고 허리에 무수한 독병을 찬 괴팍한 안색의 소녀, 사천당가의 방계 출신이자 독공의 천재인 당혜린(당혜린)이었다.
당혜린은 대나무 숲에서부터 공기 중에 떠도는 기이한 혈향과 독성의 냄새를 맡고 양면일도의 뒤를 쫓아 한천동까지 당도한 참이었다. 그녀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알몸으로 얼음 바닥에 앉아 하얀 서리를 뿜어내고 있는 추공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당혜린의 커다란 눈동자가 호기심과 경악으로 가늘어졌다.
‘저 사내의 몸속에서 일어나는 진기의 파동은 대체 뭐지? 분명 사파의 사악한 열독인데, 동시에 정파 남궁세가의 비전 빙결 독 기운이 섞여 있어. 보통 인간이라면 벌써 경맥이 녹아내려 즉사했을 텐데…… 어떻게 저 한빙 진기로 두 기운을 스스로 억누르고 있는 거지?’
당혜린은 자신의 만독귀종결(萬毒歸宗訣) 진기를 손끝으로 미세하게 방출하여 동굴 내부의 기류를 분석했다. 그녀의 손끝이 독초물로 검게 물든 채 미세하게 떨렸다. 의학적, 독공학적 호기심이 그녀의 뇌리를 강렬하게 지배했다. 저 사내의 신체는 그녀가 평생 찾아 헤맨 완벽한 독공 연구체였다.
추공은 청이식 심안(聽耳式 心眼)을 통해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음을 어렴풋이 감지했다. 동굴 벽면에 부딪히는 미세한 호흡 소리, 그리고 차가운 안개 속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독성의 기운. 하지만 전신이 마비된 지금으로선 고개를 돌려 확인할 힘조차 없었다. 오직 단전의 음양 기류를 안정시키는 데 모든 정신을 집중할 뿐이었다.
추공이 마지막 공력을 쥐어짜 내 한천수의 음기를 단전 깊은 곳으로 밀어 넣은 순간이었다.
체내에서 억눌려 있던 열독과 한빙 진기가 단전에서 태극의 형상을 그리며 급격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추공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가공할 진기 파동이 보이지 않는 무형의 음파가 되어 한천동 사방으로 퍼져 나갔.
우우웅-!
동굴 전체가 미세하게 공명하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진동의 파동이 천장에 매달려 있던 거대한 얼음 고드름들에 닿는 순간, 단단했던 얼음의 결에 미세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쩍! 쩍쩍!
날카로운 파열음이 동굴 천장을 가득 채웠다. 추공의 머리 위, 사람의 몸통만 한 크기의 예리하고 거대한 청빙 고드름들이 진기의 공명에 못 이겨 일제히 균열을 일으키며 아래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전신이 마비되어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무방비 상태의 추공의 정수리를 향해, 수십 자루의 얼음 칼날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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