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하늘에 지는 청강검
밤안개는 검은 대나무 숲을 통째로 삼켜버릴 듯 눅눅하고 짙게 깔려 있었다. 천조산 중턱, 바람이 불 때마다 검은 대나무들이 서로 몸을 부딪치며 음산한 비명을 질렀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안개는 살아 움직이는 귀신처럼 나무 사이를 넘나들며 시야를 한 자 앞도 분간할 수 없게 가로막았다.
터벅. 터벅.
그 고요한 침묵을 깨고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취춘루에서 배신자 뇌진풍과의 비밀스러운 광산 강탈 밀약을 흡족하게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낙양검파의 수석 제자 설지후였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천하를 제 발밑에 둔 듯한 오만함과 술기운이 가득 배어 있었다. 허리춤에 차인 낙양검파의 신병, 청강검(靑鋼劍)이 안개 속에서도 은은한 푸른 안광을 뿜어내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설지후는 비단 소맷자락을 가볍게 털어내며 차가운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오늘 밤 뇌진풍과 맺은 밀약대로 천조산의 한철 광산 채굴권을 낙양검파의 영토로 강탈하기만 하면, 그의 문파 내 입지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반석 위에 오를 터였다. 대연무장에서 짓밟아버린 천조종의 고아 소년 아철의 비명 소리가 아직도 그의 귓가를 즐겁게 맴돌고 있었다.
“천조종의 도법이 고물이 아니라니, 다시 생각해도 가소롭군. 쓰레기 더미에서 자란 쥐새끼들이 감히 낙양의 하늘을 논하려 들다니.”
설지후가 오만한 실소를 터뜨리며 검은 대나무 숲의 좁은 길목을 꺾어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스으으읍.
바람의 흐름이 단숨에 멈췄다. 검은 대나무들의 스산한 마찰음도, 숲을 메우던 벌레들의 울음소리도 일순간에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극도의 침묵이 안개 속에 내려앉았다.
설지후의 가죽 장화가 지면을 디딘 채 그대로 굳어졌다. 일류 극의의 고수다운 예리한 직감이 그의 등덜미를 서늘하게 후려쳤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안개 자욱한 전방을 주시했다.
대나무 숲의 음지, 짙은 밤안개 너머로 한 사내의 실루엣이 소리 없이 솟아올라 있었다.
사내는 칠흑처럼 어두운 독문 살수 도포를 걸치고, 얼굴에는 양 볼에 기괴한 송곳니가 돋아나고 이마에 붉은 해 문양이 새겨진 흑철 귀면(黑鐵 鬼面)을 쓰고 있었다. 오른쪽 바지춤은 허전하게 묶여 있었고, 오직 왼쪽 다리 하나만으로 대지 위에 서 있었다. 그러나 사내의 신형은 가파른 바람 속에서도 한 그루의 거대한 바위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기이할 정도로 완벽한 절대 균형이었다.
사내의 오른손에는 낡고 때 묻은 참나무 목도(木刀)가 들려 있었다. 평범한 나무 칼이었으나, 그 끝에서 뿜어지는 기운만큼은 대나무 숲의 안개를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 서슬 퍼랬다.
“……누구냐?”
설지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허리춤의 청강검이 주인의 긴장감에 공명하듯 미세하게 떨리며 검명(劍鳴)을 울렸다.
흑철 귀면 뒤에서 변조된 둔탁하고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치 지옥 바닥에서 긁어 올린 듯한 사신의 음성이었다.
“야수현에 들어온 사냥개는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 낙양의 천재라 불리는 놈의 목숨 역시 예외는 아니지.”
설지후는 사내의 기괴한 형색과 오른쪽 다리가 없음을 확인하고는, 이내 긴장을 풀며 오만한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요즘 야수현 저잣거리를 떠들썩하게 만든다는 유령 조직, 귀면천도의 ‘양면일도’가 바로 네놈이로구나. 뇌진풍의 삼류 무사 몇 놈의 목을 베었다고 우쭐해져서 정파의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잊어버린 모양이군.”
설지후는 청강검의 검자루를 천천히 쥐었다.
“외다리 절름발이 자객 놈아. 네놈이 쓰는 그 투박한 도법은 낙양검파의 정교한 검 끝에 닿기도 전에 사지가 찢겨 나갈 것이다. 내 오늘 밤, 네놈의 그 기괴한 가면을 벗겨 대연무장 정문에 걸어두마.”
스으릉-!
설지후가 청강검을 뽑아드는 순간, 서슬 퍼런 청색 검기가 대나무 숲의 밤하늘을 밝히며 사방으로 휘몰아쳤. 잎사귀에 맺혀 있던 빗방울들이 검기의 위압감에 얼어붙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추공은 귀면 뒤에서 차갑게 눈을 빛냈다. 단전 내부에서 양명경 화독과 남궁세가의 비전 독 기운이 격렬하게 충돌하며 가슴을 찌르는 통증을 유발했으나, 그는 무념보(無念步)를 밟으며 전신의 살기와 기척을 완벽히 지웠다. 오직 왼쪽 다리 하나에 체중을 싣고, 청이법(聽耳法)을 활성화해 설지후의 미세한 호흡과 검의 기류를 해부하기 시작했다.
“죽어라!”
설지후가 먼저 신형을 날렸다. 그의 신형이 안개 속에서 번개처럼 스러지더니, 이내 청강검이 허공을 가르며 푸른 검기 서른여섯 갈래를 사방으로 방출했다.
낙양삼십육검(洛陽三十六劍)!
푸른 검기의 그물망이 사방에서 추공의 휠체어와 신형을 찢어발길 듯 조여왔다. 검기 하나하나가 예리하고 정교하여 피할 틈을 주지 않았다.
추공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제자리에 서서 오직 풍검의 목도를 비스듬히 치켜세웠을 뿐이었다. 그는 청이식 심안으로 검기의 파공음을 읽어내며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첫 번째 쇄도를 흘려보내려 했다.
콰아아앙!
그러나 정파 명문의 신병인 청강검의 위력은 추공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설지후의 검기가 목도의 방어선을 뚫고 들어와 추공의 밤의 도포 소맷자락을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살을 에는 듯한 서늘한 검기가 어깨 가죽을 스치며 붉은 선혈이 베어 나왔다.
“하하하! 겨우 나무막대기 하나로 내 청강검을 막으려 들다니! 절름발이 놈의 한계로구나!”
설지후는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하며 더욱 광폭하게 청강검을 휘둘렀다.
추공은 상처의 통증을 무시한 채 차분하게 머리를 굴렸다. 정파의 검법은 사파의 투박한 도법보다 훨씬 좁고 정교하다. 흘려보내려 하거나 어설프게 방어하려 하면 무기의 강도 차이로 인해 목도가 먼저 파괴될 터였다. 이기기 위해서는 적의 진기가 검 끝에 완전히 집중되는 순간, 그 무게중심의 맹점을 노려 단 한 번의 회전력으로 무기 자체를 부러뜨려야 했다.
설지후는 추공의 신형이 뒤로 밀리자 오만함이 극에 달했다. 그는 검의 맹점을 숨기기 위해 신속하게 공중으로 도약했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설지후의 신형이 높이 솟구쳤고, 이내 청강검이 가공할 가속도를 실어 추공의 정수리를 향해 수직으로 쏟아져 내렸다.
낙양삼십육검의 최종 극의, 청강낙하(靑鋼落下)!
검 끝에 설지후의 모든 내공이 집중되어 태양처럼 푸르게 빛났다. 그 압도적인 위압감에 주변의 검은 대나무들이 사방으로 꺾여 나갔다.
바로 지금이었다.
추공의 눈동자가 귀면의 좁은 틈새 새로 번뜩였다. 설지후가 검을 수직으로 내리꽂는 순간, 그의 하체 무게중심이 미세하게 왼쪽으로 치우치며 오른쪽 어깨가 무방비해지는 치명적인 맹점이 청이식 심안에 포착되었다.
추공은 오른쪽 바지춤 아래 숨겨진 목제 기계 의족의 백련강 스프링 장치에 전신의 태극진기를 주입했다.
핑-!
의족 내부의 강력한 스프링이 폭발하듯 튕겨 오르며, 추공은 제자리에서 신체의 회전 속도를 두 배로 가속했다. 왼쪽 다리를 축으로 삼아 지면을 강하게 디디며, 허리와 어깨의 회전력을 단 한 자루의 목도 끝에 응축시켰다.
정좌도법 제1식, 단극참(單極斬)!
보이지 않는 투명한 진기 칼날이 밤하늘을 가르며 일직선의 푸른 섬광을 남겼다. 그것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대지를 양단할 듯 서슬 퍼런 일격이었다.
콰아아아앙-!
두 무기가 허공에서 정면으로 충돌했다. 쇳소리가 아닌, 벼락이 치는 듯한 굉음이 검은 대나무 숲 전체를 뒤흔들었다.
설지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청강검 끝에 집중되어 있던 그의 모든 검기가 추공의 묵직한 회전 도광에 밀려 단숨에 사방으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와 동시에, 낙양검파가 자랑하던 신병 청강검의 중간 매듭이 단극참의 날카로운 충격력을 견디지 못하고 쩍 소리와 함께 반으로 완벽하게 동강 났다.
강철 부러지는 소리가 안개 속에서 청량하게 울려 퍼졌다.
“이, 이럴 수가…… 내 청강검이……!”
부러진 검날 조각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중 날카로운 파편 하나가 설지후의 뺨을 스치며 깊은 자창을 남겼고,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설지후는 공중에서 균형을 잃고 대나무 숲 바닥 진흙탕 위로 처참하게 추락했다. 부러진 검자루를 손에 쥔 채,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뺨에서 흐르는 피와 동강 난 검날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평생을 천재라 불리며 쌓아 올린 자존심이 단 한 번의 외다리 도법에 무참히 짓밟힌 순간이었다.
추공은 한 다리로 착지하며 묵묵히 목도를 내리누르고 섰다. 흑철 귀면 뒤의 두 안광은 여전히 서늘했다.
“낙양으로 돌아가라.”
추공의 차가운 목소리가 패배자의 고막을 찔렀.
“천조의 도법은 너 같은 오만한 정파 놈들이 비웃을 고물이 아니다. 다시 한번 야수현의 한철 광산을 넘본다면, 다음 번에 부러지는 것은 네놈의 목뼈가 될 것이다.”
설지후는 절망과 공포에 질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부르르 떨었다. 천하를 호령할 듯 오만했던 낙양의 천재는, 이제 이 검은 대나무 숲의 흙바닥에서 개처럼 기어 다닐 처지로 전락해 있었다.
추공은 웅장한 기개를 뿜어내며 몸을 돌려 안개 속으로 사라지려 했다.
쿵.
그 순간, 추공의 단전 내부에서 참혹한 반동이 시작되었다.
전투의 여파로 절정의 내력을 일시에 폭발시킨 대가는 너무도 잔혹했다. 단전 속에 억눌려 있던 양명경 화독과 체내에 침투해 있던 남궁세가의 비전 독 기운이 끈끈하게 공명하며 걷잡을 수 없는 기세로 폭발했다.
“윽……!”
머릿속이 하얗게 타들어 가는 듯한 극심한 고열과 오한이 동시에 추공의 전신을 덮쳤다. 기경팔맥의 모든 경맥이 불타오르듯 팽창하며 전신 마비의 전조가 급격히 밀려왔다. 왼쪽 다리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지며 중심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하아…… 흑!”
추공은 비틀거리며 곁에 서 있던 검은 대나무 줄기를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대나무가 그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삐걱거리며 휘어졌다.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겁고 비린 혈액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푸웁-!
추공의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가 안개 속으로 길게 뿜어져 나왔다. 빗물에 젖은 대나무 잎사귀들이 그의 피로 붉게 물들어 갔다. 전신 피부가 검붉게 타오르며 숨소리가 급격히 거칠어졌다.
안개 낀 검은 대나무 숲속, 복수를 완수한 사신은 가문의 영광을 되찾은 찰나의 순간 직후, 자신의 신체적 한계가 초래한 최악의 파멸 위기 속에 무겁게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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