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의 천재와 천조의 낙엽
야수현의 아침 안개는 유독 매캐했다. 간밤에 저잣거리 한구석을 붉게 물들였던 신씨 노파의 주막 화재 소식은 벌써 천조종 야수현 분타 내부까지 흘러들어와 있었다. 문도들은 삼삼오오 모여 귀면천도라는 정체불명의 살수 조직이 드디어 성내 깊숙이 침투했다며 수군거렸다. 분타주 뇌진풍의 사냥개인 마유신이 저잣거리 폭동을 진압하러 급히 나간 사이, 정문 앞은 기묘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쿨럭, 쿨럭…….”
초라한 하급 문지기 초소 앞. 때 묻은 회색 무복을 입은 추공은 부러진 대나무 빗자루를 쥔 채 절뚝거리며 마당을 쓸고 있었다. 마유신의 무자비한 철사수 고문으로 인해 오른쪽 허벅지는 검붉게 부풀어 올랐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왼쪽 무릎에 체중의 세 배가 넘는 물리적 과부하가 실려 뼈마디가 비틀리는 고통이 뇌리를 찔렀. 게다가 단전 깊은 곳에서는 전날 흡입한 주화초의 미세한 열독과 채홍에게 입었던 남궁세가의 비전 독 기운이 음험하게 충돌하며 전신에 차가운 오한을 퍼뜨리고 있었다.
추공은 이빨을 악물고 천조일월신공의 음기를 운용해 가슴을 후벼 파는 열독을 억눌렀다. 빗자루를 쓸어내리는 투박한 손길 너머로, 그의 청이식 심안은 이미 정문 계단 아래에서 들려오는 비범한 발걸음 소리들을 포착하고 있었다.
사각, 사각, 사각.
가죽 장화가 돌계단을 밟는 소리는 가볍고 서늘했다. 일반적인 사파 무뢰한들의 무겁고 거친 발소리와는 격이 달랐다. 맑고 날카로운 검기가 안개를 뚫고 대연무장 입구로 흘러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푸른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자들은 천조종의 흑색 도포가 아닌, 극상의 청색 비단에 낙양의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푸른 자수 도포를 입은 무사들이었다.
그들의 중심에 서서 거만하게 걸어 들어오는 청년. 낙양검파의 수석 제자이자 정파 동세대 최고의 천재로 추앙받는 설지후였다. 수려한 이목구비에 오만한 안광을 지닌 그의 허리에는 낙양검파의 신병인 청강검이 은은한 푸른빛을 발하며 채워져 있었다.
“이곳이 천조종의 야수현 분타인가? 듣던 대로 쥐새끼들의 소굴이 따로 없군.”
설지후는 대연무장 한가운데에 멈춰 서서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코를 살짝 가렸다. 그의 눈빛에는 몰락한 문파를 향한 노골적인 멸시가 가득했다. 뇌진풍의 하급 문도들은 낙양검파의 위세와 설지후가 풍기는 강력한 일류 극의의 검기에 압도되어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굽실거렸다.
“과거 중원 제일의 도객을 배출했다는 천조종이 어쩌다 이리 비참하게 몰락했는지 알 만하구나. 찬탈자 뇌진풍의 수하들이라 그런지 무공의 기초조차 안 된 삼류 무뢰배들만 가득해. 이런 자들이 익히는 천조도법이란 것도 결국 다 닳아빠진 고물짝에 불과하겠지.”
설지후는 청강검의 자루를 툭툭 치며 오만하게 웃어젖혔다. 그의 비웃음 소리가 텅 빈 대연무장의 벽을 타고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대연무장 구석에서 빗자루질을 하던 추공은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가슴 깊은 곳에서 가문의 영광을 모욕당한 슬픔과 분노가 양명경 화독을 자극해 목구멍까지 뜨거운 핏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는 철저히 무능한 절름발이 청소부의 껍질을 유지하며 빗자루를 쥔 손에 힘을 뺄 뿐이었다. 지금 무공을 드러내면 누이 설희의 안전도, 가문의 복수도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그러나 추공이 참아낸 분노는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 주둥이를 당장 닥치지 못할까!”
대연무장 한구석에서 물동이를 지르고 청소를 돕던 고아 소년 아철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뛰어나왔다. 아철의 눈동자는 불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소년의 손에는 추공이 빗자루 나무를 깎아 만들어 준 참나무 목도가 굳게 쥐여 있었다.
“우리 천조종의 무공은 고물이 아니다! 배신자 뇌진풍이 타락시켰을 뿐, 선조들의 도법은 너 같은 오만한 정파 놈들이 함부로 더럽힐 무학이 아니란 말이다!”
아철은 분노로 전신을 떨며 설지후의 정면을 가로막아섰다. 소년의 우직하고 맑은 기개가 대연무장의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설지후는 뜻밖의 저항에 잠시 어안이 벙벙한 듯 아철을 바라보더니, 이내 가소롭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쥐새끼 소굴에도 뼈다귀를 가진 놈이 남아 있었군. 하지만 어린놈아, 강호의 법도는 주둥이가 아니라 검 끝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설지후의 눈빛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스으릉-
설지후의 허리춤에서 청강검이 뽑혀 나오는 순간, 서슬 퍼런 청색 검기가 대연무장의 안개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그는 검을 가볍게 휘두르며 낙양삼십육검의 화려한 초식을 과시했다. 검끝이 그리는 푸른 궤적은 정교하고 화려하여 보는 이들의 눈을 멀게 할 지경이었다.
“천조의 잔당 놈아, 네놈들이 자랑하는 그 위대한 도법으로 내 청강검을 막아보아라.”
“으아아아!”
아철은 비명을 지르며 참나무 목도를 치켜들고 앞으로 돌진했다. 소년은 추공에게 밤마다 은밀히 배웠던 천조비보의 보법을 밟으며 설지후의 검각을 우회하려 애썼다. 미숙하지만 제법 날렵한 신형이 설지후의 왼쪽 사각을 파고들었다.
하지만 내공의 절대적인 격차는 잔혹했다.
“가소롭구나.”
설지후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 청강검을 가볍게 퉁겼다.
콰아앙!
단 한 번의 검격이 허공을 가르자, 아철이 쥐고 있던 참나무 목도는 형편없이 부러져 사방으로 흩날렸다. 그와 동시에 날카로운 청색 검기가 아철의 가슴팍을 사선으로 깊게 베고 지나갔다.
“아악!”
아철은 가슴에서 붉은 피를 뿜어내며 대연무장 진흙 바닥으로 처참하게 베여 넘어졌다. 부러진 목도 조각이 소년의 뺨을 스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아철은 가슴을 부여잡고 신음하며 숨을 헐떡였다.
설지후는 쓰러진 아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무자비하게 가죽 장화로 아철의 머리를 짓밟아 진흙탕 바닥에 처박았다. 소년의 얼굴이 흙먼지와 피로 범벅이 되었다.
“이것이 천조종의 실체다. 개처럼 기어 다니는 절름발이와, 나무막대기를 들고 설치는 고아 놈들뿐이지. 이런 쓰레기 문파는 진작 강호에서 사라졌어야 했다.”
설지후는 장화 굽으로 아철의 머리를 짓이기며 조롱했다. 아철은 이빨을 악물고 비명을 참아냈지만, 그의 눈에서 억울함과 고통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구석에서 빗자루를 쥐고 있던 추공의 눈동자가 극도로 수축했다.
단전에서 음양조화 태극진기가 미친 듯이 소용돌이치며 화독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전신 경맥이 찢어지는 듯한 내상의 통증이 가슴을 찔렀지만, 추공은 대나무 빗자루 손잡이를 뼈가 으스러지도록 움켜쥐며 살기를 억누르고 또 억눌렀다. 지금 저 정파의 천재를 베어버리는 것은 쉽다. 하지만 마유신과 독조 마씨의 이중 수사망이 촘촘한 지금, 대낮의 대연무장에서 정면 대결을 벌이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참아야 했다. 밤의 장막이 내릴 때까지.
추공은 조용히 청이식 심안을 가동했다. 빗자루질을 하는 척하며 바닥의 미세한 먼지 진동과 파공음을 통해 설지후의 무공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낙양삼십육검…… 화려하고 정교하지만 치명적인 맹점이 있군.’
설지후가 청강검을 휘두르고 다시 회수하는 순간, 그의 하체 무게중심이 미세하게 왼쪽으로 치우쳤다. 검을 회수할 때 오른쪽 어깨가 일시적으로 무방비해지는 맹점. 정좌도법의 제자리 회전력이라면 단 한 번의 베기로 저 청강검을 부러뜨리고 그의 어깨를 양단할 수 있었다. 약점 분석은 끝났다.
설지후는 아철의 머리를 발로 툭 차서 진흙탕 구석으로 밀쳐버렸다. 그리고 가죽 장갑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며 정문을 향해 걸어 나갔.
“흥, 흥미가 깨졌군. 가자. 뇌진풍 분타주와 천조산 한철 광산 채굴권 강탈에 대한 밀약을 마무리해야 하니.”
설지후는 무사들을 거느리고 대연무장을 가로질렀다.
정문 초소 앞을 지나던 설지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의 눈길이 비굴하게 허리를 굽힌 채 빗자루를 쓸고 있는 외다리 청소부 추공에게 닿았다. 설지후는 더러운 벌레를 보듯 눈살을 찌푸렸다.
카악, 퉤.
설지후는 추공의 낡은 가죽 신발과 발밑에 쌓인 낙엽 더미를 향해 노골적으로 침을 뱉었다.
“절름발이 늙은이 놈, 보기만 해도 재수가 없군. 평생 그렇게 바닥이나 쓸며 기어 다녀라.”
설지후는 오만한 웃음을 남긴 채 무사들과 함께 정문을 빠져나갔다.
추공은 묵묵히 고개를 숙여 침이 묻은 발밑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칠흑처럼 어두운 안광 속에서, 밤의 사신 양면일도의 서슬 퍼런 살기가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사사사삭.
추공이 천천히 대나무 빗자루를 쓸어내리는 순간, 그가 쓸어 담던 마른 낙엽들이 그의 손가락 끝에서 누설된 미세한 무형 진기에 의해 반으로 완벽하게 갈라져 진흙 바닥으로 흩날렸다. 단 한 줄기의 바람도 일지 않았음에도, 낙엽들은 칼로 벤 듯 정교하게 쪼개져 있었다.
외다리 사신의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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