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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 성벽의 붉은 신호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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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님! 서쪽 성벽 3번 구역이 돌파당하기 직전입니다!”


전령의 다급한 비명이 지하 감옥의 서늘한 공기를 가로질렀다. 아서(김도현)는 코 밑으로 흘러내리는 뜨거운 선혈을 가죽 장갑 등조차 쓰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훔쳐냈다. 머릿속이 수천 개의 바늘로 쑤시는 것처럼 쪼개질 듯 아팠다. 방금 전 학자 에드워드의 천문 기하학 공식을 자신의 현대 군사 탄도학 연산법과 강제로 동화시킨 대가였다. 뇌 신경망이 과부하를 일으키며 삐- 소리가 나는 이명이 귓가를 맴돌았지만, 지금 주저앉을 시간은 없었다.


“카엘, 전령을 데리고 앞장서라. 서쪽 성벽으로 간다.”


아서의 서늘하고 이성적인 목소리에, 늙은 부사관 카엘은 짧고 굵게 대답하며 대검을 치켜세웠다.


“알겠습니다, 사령관님! 저를 따르십시오!”


지하 계단을 뛰어 올라가 성벽 위로 들어서는 순간, 아서의 숨이 턱 막혔다. 요새를 뒤덮은 하얀 장막은 이미 평소의 안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괴수의 아가리처럼 성벽 전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가시거리는 1미터도 되지 않았고, 안개 속에서는 살점과 뼈가 으스러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보이지 않는 적들의 기괴한 울음소리가 고막을 찢었다.


“으아아악! 보이지 않아! 어디서 공격하는 거냐!”


“살려줘! 내 다리가...!”


성벽 위는 아수라장이었다. 매일 아침 기억을 잃는 패널티 속에서도 겨우 자아를 유지하던 징집병들이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 칼을 휘두르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안개의 정신 오염에 잠식되어 아군끼리 서로를 벨 터였다. 병사들의 안개 저항력은 기껏해야 ‘C급: 경계의 파수꾼(Sentinel)’ 수준. 안개 속에서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한계 시간인 2시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대열을 유지하라! 공포에 질려 무작정 검을 휘두르면 안개의 아가리에 스스로 목을 들이미는 꼴이다!”


아서는 연병장 단상에서 보였던 차가운 무의식적 위압감을 방출하며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기묘한 통제력이 병사들의 공포를 순간적으로 억눌렀다. 아서는 관자놀이 부근의 혈자리를 강하게 압박했다. ‘뇌 세포 자극 정신 방어 기법’이 가동되며 뇌 신경에 날카로운 충격이 가해졌다. 지독한 두통이 일시적으로 가라앉고 시야가 극도로 맑아졌다.


“일반 철제 화살을 맹목적으로 쏘지 마라! 허공에 마력만 낭비할 뿐이다!”


실제로 몇몇 초병들이 안개 속을 향해 무작정 화살을 날렸으나, 화살들은 아무런 타격음 없이 안개 장막 너머의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무력을 낭비하는 것은 전술가로서 용납할 수 없는 오책이었다. 보이지 않는다면, 강제로 보이게 만들면 그만이었다.


아서는 성벽 모퉁이에서 나침반을 쥔 채 안개의 흐름을 읽고 있던 정찰조장 프란츠를 향해 손을 뻗었다.


“프란츠! 신호탄 발사기를 준비해라. 탄약은 내가 지난주에 그리샤에게 의뢰해 제작한 특수 탄이다.”


프란츠가 서늘한 안개 가죽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허리춤에서 묵직한 황동제 신호탄 발사기를 꺼내 들었다. 그가 약실에 장전한 것은 청동 기어 문양이 정교하게 음각된 ‘망령 식별 신호탄’이었다. 안개의 영향을 받지 않는 희귀 광물인 ‘기억의 청동’ 가루를 특수 화학제와 배합해 만든 아서의 비장의 카드였다.


“서쪽 성벽 3번 구역 상공, 고도 50미터 지점을 향해 격발하라!”


아서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프란츠가 방공망을 향해 방전 레버를 당겼다.


*콰아아아앙!*


하늘을 찢는 굉음과 함께 붉은색 광전이 안개 장막 한가운데서 폭발했다. 공중에서 터진 신호탄은 단순한 불꽃이 아니었다. 미세하게 분쇄된 기억의 청동 가루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안개 수분 속에 숨어 있던 망령들의 표면에 자석처럼 달라붙기 시작했다.


*치이이이익-!*


기괴한 비명 소리와 함께, 안개 속에서 무음으로 기어오르던 망령들의 형체가 붉은색 실루엣으로 강제로 실체화되었다. 수백 마리에 달하는 하급 망령들이 붉은 입자를 뒤집어쓴 채 성벽 난간을 타격하고 있는 광경이 드러나자 병사들이 침을 삼켰다.


“적들의 위치가 보인다! 이제 사격하라!”


아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력 흐름 시각화(Flow Vision)’ 스킬을 개안했다. 그의 두 눈동자가 은백색 안광으로 발광하기 시작했다. 안구 주변의 실핏줄이 터지며 눈가로 붉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지만, 그의 시야에는 안개 속에 흐르는 미세한 마력의 결이 푸른색 실선으로 입체화되어 보였다.


그리고 그 붉은 실루엣들의 중심, 가장 짙고 푸른 마력 핵을 품은 거구의 형상이 아서의 시야에 들어왔다. 부서진 고대 장군의 검은 갑옷을 걸치고, 닿는 모든 것을 부식시키는 검은 대검을 치켜든 망령 선봉장, ‘검은 투구’였다.


“오토! 궁수대원들을 이끌고 서쪽 성벽 3번 구역, 각도 45도 방향의 붉은 마력 핵을 향해 집중 저격하라! 핀이 배치한 와이어 덫의 반경 안으로 적들을 몰아넣는다!”


아서가 설계한 ‘안개 유인 복병법’의 시작이었다. 명사수 오토가 이끄는 궁수대원들이 바람의 깃털 화살을 시위에 먹였다. 보이지 않던 적들이 붉게 물들자, 그들의 저격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슈슈슈슈슉! 팍! 팍!*


수십 발의 마력 화살이 검은 투구의 주변 하급 망령들의 관절을 정확히 꿰뚫었다. 다리가 묶인 망령들이 성벽 아래로 추락하는 사이, 아서의 전술 지시를 받은 카엘과 돌격 투사 브루노가 성벽 난간을 박차고 나갔다.


“사령관님의 전술대로 간다! 대열을 열어라!”


브루노가 거대한 청동 기어 전투 도끼를 휘두르며 검은 투구의 측면 장갑을 강타했다. 콰르릉하는 파쇄음과 함께 검은 투구의 자세가 흐트러진 찰나, 카엘의 묵직한 대검이 검은 투구의 목덜미를 정확히 가로질렀다.


*서거억-!*


푸른 안개 불꽃이 폭발하며 망령 선봉장 검은 투구의 형체가 먼지처럼 바스러졌다. 보이지 않는 적들의 기습에 몰살당할 뻔했던 성벽 위는 아서의 정밀한 신호탄 전술과 진형 지휘 덕분에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완벽한 방어 성공의 전율로 가득 찼다. 병사들의 눈빛에 사령관 아서를 향한 절대적인 신뢰와 경외심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승의 환호가 요새를 채우기도 전이었다.


*구구구구궁-!*


성벽 바닥이 물리적으로 뒤틀리는 거대한 지진 같은 진동이 요새 전체를 뒤흔들었다. 서쪽 성벽 아래의 짙은 안개 심연 속에서, 대지를 찢어발기는 듯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아서는 흐려지는 시야를 다잡으며 성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부서진 고대 갑옷과 해골들이 몸체에 기괴하게 뭉쳐진 채 푸른 안개 불꽃을 뿜어내는 8미터 크기의 거구—변종 망령 괴수 ‘보르그’였다.


보르그의 거대한 눈동자가 서쪽 성벽 하단의 지지 기둥을 조준한 채 맹렬한 기세로 돌격을 시작했다. 성벽 하단 기둥에 거대한 균열이 가며 요새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다시금 아서를 덮쳐왔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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