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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내리는 밤의 자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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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빛 안개 요새의 밤은 죽음보다 깊은 침묵으로 찾아온다.


창문 틈새를 기어오르는 하얀 안개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밤마다 요새를 집어삼키며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기억과 자아를 지워버리는 가혹한 제국의 결계였다. 서늘하고도 산성 기운이 어린 하얀 장막이 사령관 집무실의 유리를 두드릴 때마다, 아서—대한민국 육군 작전 전술가 김도현—는 등 뒤로 서늘하게 돋아나는 소름을 느꼈다.


째깍, 째깍, 째깍.


집무실 벽면을 가득 채운 청동 태엽 시계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만이 이 방이 아직 현실에 존재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서는 책상 위에 놓인 청동 활판 인쇄 장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낮 동안 펠릭스와 헨리의 이중 장부를 폭로하고 요새의 군권을 장악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진짜 사투는 이제부터였다.


매일 아침 포맷되는 뇌세포. 그리고 밤마다 찾아오는 자아 소실의 공포.


"으윽……."


관자놀이를 찌르는 듯한 극심한 편두통에 아서는 신음하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낮에 획득한 특수 마력 잉크를 가죽 각인 전술 프로토콜에 사용한 대가였다. 영혼 각인 바늘로 자신의 왼쪽 팔뚝과 가슴팍에 내일 아침 깨어나자마자 수행해야 할 3단계 핵심 군사 명령을 새겨 넣는 작업은 살을 찢는 고통을 동반했다. 피부 진피층에 푸른색 마력 잉크가 스며들며 서늘한 광채를 내뿜을 때마다, 아서의 뇌 신경은 마치 불꽃이 튀는 듯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 고통이야말로 내일 아침 그를 다시 '사령관 아서'로 깨워줄 유일한 생명선이었다.


아서는 숨을 몰아쉬며 왼손 약지에 끼워진 '기억의 은빛 반지'를 매만졌다. 가문에서 전해 내려온 이 유물은 안개 속에서도 최근 48시간의 기억을 온전히 보존해 주는 강력한 보호 장치였으나, 그 대가로 매일 밤 영혼의 마력을 갉아먹으며 만성적인 두통을 안겨주었다. 목덜미에 닿는 '영혼 보호의 룬 목걸이'의 차가운 금속 감각만이 그를 간신히 이성적인 상태로 붙잡아두고 있었다.


"오늘 밤만 버티면 된다."


아서는 침상에 누워 이불을 덮었다. 하얀 안개가 침실 바닥까지 낮게 깔리기 시작했다. 안개의 미세한 마력 파동이 방 안의 소리마저 흡수해 버리는 기묘한 침묵 속에서, 아서의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정신 정화와 자아 유지를 위해 온 신경을 곤두세운 탓에 육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밤 12시 정각.


요새를 뒤덮은 안개의 농도가 최고조에 달하는 시간. 뇌 세포를 잠식해 들어오는 안개의 소거 마력 탓에 아서의 정신력이 일시적으로 흐려졌다. 은빛 반지가 미세하게 떨리며 방어막을 전개하려 했으나, 몰려오는 잠과 망각의 유혹은 해일처럼 거대했다. 이성이 깊은 심연 속으로 가라앉으려던 바로 그 찰나였다.


스스슥.


인간의 청각으로는 결코 인지할 수 없는 미세한 마찰음이 천장에서 들려왔다.


잠결 속에서도 군인으로서 단련된 아서의 전술적 직감이 경보를 울렸다. 묵직한 살기가 침실 내부의 차가운 안개를 찢으며 강하하고 있었다.


‘적습이다.’


하지만 안개의 독성에 취한 몸은 납덩이처럼 무거워 움직이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가위눌림 같은 감각 속에서, 천장의 어둠 속에서 소리 없이 낙하한 검은 형체가 아서의 가슴을 향해 독 단검을 내리꽂았다.


찰나의 순간, 아서는 주저 없이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자신의 관자놀이와 목 뒤의 비장한 혈자리를 강하게 압박했다.


'뇌 세포 자극 정신 방어 기법(Brain Cell Stimulation)!'


*파지직!*


뇌리에 날카로운 번개가 치는 듯한 극심한 충격과 통증이 아서의 전신을 관통했다. 스스로 뇌 신경에 가한 물리적 타격은 안개의 마취 성분을 일시적으로 걷어내며 그의 사지 마비를 강제로 풀어버렸다. 극도의 고통과 함께 눈을 번쩍 뜬 아서는 가슴으로 떨어지던 자객의 독 단검을 보기 무섭게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푸슉!*


자객의 단검이 아서가 누워 있던 침대 매트리스를 깊숙이 찔렀다. 단검 끝에 발려 있던 치명적인 암살용 독물이 가죽 시트를 태우며 치익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쯧."


복면 뒤에서 흘러나온 자객의 차가운 조소. 그는 실패를 모르는 제국 어둠의 길드 소속 암살자, 제브였다. 펠릭스의 의뢰를 받고 밤의 안개를 틈타 요새 사령관의 침실 가장 깊숙한 곳까지 은밀히 기어 들어온 사냥개.


아서는 침대 밑 돌바닥을 구르며 벽면에 걸린 자신의 지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기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제브의 반응은 아서의 물리적 기동 속도를 아득히 초월해 있었다. 제브는 아서가 검을 쥐기도 전에 허리춤에서 투척용 단검 한 자루를 가볍게 튕겨냈다.


*깡!*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제브가 던진 단검이 아서의 지휘 검 검집 윗부분을 관통하여 벽면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검집이 강철 단검에 고정되어 벽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기를 쥘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원천 차단당한 순간이었다.


"사령관치고는 기민한 대처로군. 하지만 거기까지다."


제브가 안개의 습기를 머금은 그림자 보법을 전개하며 순식간에 아서의 뒤를 잡았다. 그의 두 자루 독 단검이 아서의 무방비한 목덜미를 향해 교차하며 짓쳐 들어왔. 목이 잘려 나갈 절체절명의 위기.


*키이잉!*


그 순간, 닫혀 있던 침실의 무거운 목재 문이 아무런 소리도 없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과 함께 은빛의 머리칼이 휘날렸다.


말 없는 부관, 실비아였다.


그녀는 안개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특이 체질을 활용해 요새 내부의 기묘한 살기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실비아의 손에 쥔 침묵의 은빛 단검이 제브의 독 단검 궤적을 정확히 받아쳤.


*챙! 강!*


어둠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실비아의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제브의 검은 복면을 꿰뚫어 보았다. 말을 하지 못하는 그녀는 어떠한 기합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완벽한 무음의 기동으로 제브의 목줄기를 향해 단검을 찔러 넣었다.


제브는 예상치 못한 강자의 난입에 가볍게 뒤로 도약하며 실비아의 참격을 흘려냈다. 그의 몸이 안개의 산성 습기와 섞여 시각적인 연막을 형성하더니, 다시금 방 안의 어두운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방 안에는 다시 한번 소름 끼치는 침묵이 찾아왔다.


시야가 완벽히 차단된 안개 속에서, 언제 어디서 암살자의 칼날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극한의 대치 상황. 아서는 찢어진 왼쪽 어깨 가죽 갑옷 틈새로 독 기운이 미세하게 스며들어 손끝이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지체되면 마비가 전신으로 퍼질 터였다.


그때, 차가운 안개 장막을 헤치고 실비아가 소리 없이 아서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차갑게 식어가는 아서의 오른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실비아의 손바닥에서 은은한 온기와 함께 푸른색 마력의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안개 속에서 태어난 변칙 인류인 실비아 고유의 권능, '안개 마력 중화 장막'이었다. 그녀의 손끝에서 방출된 푸른 정화의 마력이 아서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독 기운을 밀어내는 동시에, 침실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던 하얀 안개 장막을 원형으로 밀어내며 소리 없는 장벽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째깍, 째깍.


장막이 전개되자 차단되었던 소리가 복구되며 침실 구석 먼 곳에서 제브의 미세한 거친 숨소리가 공명하듯 들려왔다. 아서는 실비아의 따뜻한 손길 속에서 이성을 완전히 되찾으며,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암살자의 붉은 안광을 향해 차갑게 시선을 돌렸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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