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군수고의 장부
은빛 안개 요새의 밤은 소리 없이 찾아온다. 성벽 틈새로 기어든 하얀 안개는 횃불의 불빛마저 집어삼킬 듯이 짙게 흘러내렸고, 집무실의 창틀은 산성 안개의 습기 때문에 서늘하게 축축해져 있었다.
아서는 관자놀이를 강하게 압박했다. 아침에 기동했던 ‘기억 복원 프로토콜’의 여파가 밤이 되어서도 머릿속을 찌르는 듯한 두통으로 남아 있었다. 뇌세포의 마력 결합을 강제로 비틀어 자아를 복구하는 대가였다. 하지만 아서는 쉴 수 없었다. 요새의 비축 식량이 단 일주일 치밖에 남지 않았다는 잔혹한 현실이 그의 목을 죄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령관님, 부르셨습니까.”
조용한 노크 소리와 함께 집무실 문이 열렸다. 들어온 이는 창고지기이자 요새의 늙은 보급병, 월터였다. 그는 주름진 얼굴에 흙먼지를 묻힌 채, 두꺼운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낡은 가죽 가방을 소중히 품에 안고 있었다. 펠릭스 감시관의 삼엄한 감시망을 피해 은밀히 사령관실로 출두한 참이었다.
“고생 많았다, 월터. 펠릭스의 하수인들이 눈치채지는 않았겠지?”
“예, 사령관님께서 연병장에서 소동을 피워주신 덕분에 감시관 일당의 시선이 모두 그쪽으로 쏠렸습니다. 그 틈을 타 창고의 실제 장부들을 확보했습니다.”
월터는 품에서 낡았지만 꼼꼼하게 손때가 탄 장부 한 권을 꺼내 아서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은 펠릭스와 그의 수하인 보급관 헨리의 눈을 피해 월터가 평생 동안 기록해 온 ‘비밀 물자 대조 장부’였다.
아서는 현대 대한민국 육군 작전 전술가 시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군수 보급 매뉴얼을 떠올렸다. 전쟁의 승패는 전방의 칼날이 아니라 후방의 보급선에서 결정된다. 아서는 즉각 월터가 가져온 장부와 요새의 공식 군수 장부를 나란히 펼쳐놓고 대조하기 시작했다.
“월터, 공식 장부에는 지난달 제국 수도에서 수송된 곡물 자루 중 무려 40%가 안개의 산성 습기 때문에 부패하여 폐기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군.”
“그렇습니다. 보급관 헨리 대위가 서명한 공식 보고서입니다. 매년 겨울마다 안개 때문에 곡물이 썩어 나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자연재해라고 황실에 보고해 왔지요.”
“자연재해라.”
아서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그의 예리한 안광이 공식 장부의 숫자들을 훑어내렸다. 현대의 물류 회전율 분석법과 공급망 누수 계산 공식이 그의 머릿속에서 정밀한 기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이건 명백한 행정 조작이다. 여기 공식 영수증을 봐라. 지난달 곡물과 함께 요새로 유입된 물품 목록에 ‘제국 정품 양피지’ 300장과 방수용 밀랍 왁스 50상자가 포함되어 있어. 습기를 완벽히 차단하는 제국 규격의 방수 포장재들이지. 이 자재들이 정상적으로 사용되었다면 곡물의 부패율은 아무리 높아도 3%를 넘을 수 없다.”
월터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그렇다면…….”
“썩어서 버린 게 아니야. 방수 포장재로 완벽하게 밀봉한 상태에서 통째로 빼돌린 거지. 보급관 헨리와 감시관 펠릭스, 이 두 놈이 요새 병사들의 목숨줄인 식량과 고가의 특수 마력 잉크를 중간에서 가로채 제국 암시장에 유통해 온 거다.”
아서는 펠릭스의 허리춤에서 보았던 가죽 주머니 속 청동 장부의 모서리를 떠올렸다. 그 장부야말로 이 모든 횡령 내역이 적힌 결정적 물증일 터였다. 하지만 그 장부를 확보하기 전에, 당장 굶어 죽어가는 병사들을 먹일 ‘진짜 식량’의 위치를 찾아야 했다.
“월터, 이 막대한 양의 식량과 마력 잉크를 요새 외부로 즉시 반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국경 수비대의 눈이 있고, 밤마다 안개 속에서 망령들이 몰려오니까. 그렇다면 요새 내부 어딘가에 숨겨두었을 텐데…… 정식 창고가 아닌 곳이 어디지?”
월터는 침을 삼키며 아서의 지적이고 냉철한 추론에 압도당한 듯 고개를 숙였다.
“사령관님의 말씀이 정확합니다. 전임 사령관 휴버트 님 시절, 요새 지하 깊은 곳에 비상시를 대비해 구축해 둔 ‘지하 비밀 군수고’가 있습니다. 지금은 폐쇄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헨리 대위가 밤마다 그쪽 통로를 비밀리에 드나든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지하 비밀 군수고라.”
아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눈동자에 단호한 결의가 서렸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 안개가 요새 전체를 완전히 뒤덮기 직전이 가장 한산한 시간이다. 월터, 길을 안내해라. 우리가 직접 그 쥐새끼들의 숨구멍을 막아버린다.”
* * *
요새 지하의 통로는 어둡고 음습했다. 벽면의 돌바닥은 안개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습기로 미끄러웠고, 차가운 한기가 뼈마디를 시리게 만들었다. 아서는 허리춤에 기계식 태엽 일지를 단단히 고정한 채 월터의 뒤를 따랐.
한참을 내려갔을까, 통로의 막다른 길에 거대한 이끼로 뒤덮인 청동 석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월터가 숨겨두었던 비상 열쇠를 꺼내 조심스럽게 기어 장치에 밀어 넣었다.
*끼이이익! 쿵.*
무거운 석문이 열리며 먼지 섞인 서늘한 공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 안쪽의 풍경을 본 월터는 탄성을 질렀다.
“이, 이럴 수가……!”
지하 비밀 군수고 내부에는 펠릭스와 헨리가 썩어서 폐기했다고 주장했던 수백 자루의 곡물 포대들이 썩은 기색 하나 없이 방수 가죽에 밀봉된 채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옆의 목재 상자들을 열자, 요새 병사들의 자아 고정에 필수적인 푸른빛의 ‘특수 마력 잉크’ 병들과 ‘제국 정품 양피지’ 묶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요새 전체가 한 달은 족히 버틸 수 있는 거대한 규모의 군수 물자였다.
“내 예상이 맞았군.”
아서가 밀봉된 곡물 자루를 만지며 중얼거렸다.
“병사들은 배를 갉아먹으며 안개 속에서 미쳐가고 있었는데, 이놈들은 여기서 기름진 배를 두드리고 있었어.”
“정말 천인공노할 자들입니다……!”
월터가 분노로 몸을 떠는 그 순간.
*탁. 탁. 탁.*
어두운 지하 통로 양끝에서 불길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수십 개의 횃불이 동시에 밝혀졌다. 오렌지빛 불꽃이 축축한 지하 벽면을 붉게 물들이며 사방에서 들이닥쳤다.
“사령관실의 쥐새끼가 결국 제 발로 덫에 기어들어 왔군.”
기름진 목소리와 함께 통로 한가운데로 걸어 나온 이는 요새의 부패한 보급관, 헨리 대위였다. 그의 뒤로는 펠릭스 감시관에게 매수된 요새 지하 저항군 소속의 무장 사병 이십여 명이 검을 뽑아 든 채 아서와 월터의 퇴로를 완벽히 차단하고 있었다.
헨리는 비단을 두른 뚱뚱한 몸을 흔들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아서 사령관. 밤중에 창고지기 늙은이를 대동하고 황실의 비밀 군수고를 무단 침입하다니. 이것은 요새의 군수품을 사적으로 약탈하려 한 명백한 ‘반역죄’이자 현행범이다. 감시관님의 명령에 따라, 이 자리에서 반역자들을 즉결 처형하겠다!”
무장 사병들이 칼날을 번뜩이며 포위망을 좁혀왔다. 횃불의 그림자가 요동치는 좁은 지하 통로에서, 아서와 월터는 완벽하게 고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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