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예배당
연병장 방향에서 육중한 청동판이 쪼개지는 날카로운 쇠 마찰음과 병사들의 광기 어린 함성이 서늘한 새벽 공기를 가르며 들려오기 시작했다.
사령관 집무실의 깨진 문틀 사이로 흘러들던 긴장감이 단숨에 폭발했다. 늙은 부사관 카엘의 손이 본능적으로 대검 자루를 움켜쥐었고, 말 없는 부관 실비아의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집무실 구석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성녀 후보 헬레나 역시 은빛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지적 호기심과 종교적 당혹감이 기묘하게 뒤섞여 있었다.
“사령관님, 연병장의 행동 지침판이……!”
문지기 병사 토마스가 숨을 헐떡이며 보고를 올렸다. 그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아서는 자리에 앉은 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머리를 쪼개는 듯한 극심한 두통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신성 장막의 여파로 억눌린 마력 회로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고, 오른손 손가락 끝은 여전히 납덩이처럼 무감각했다. 하지만 그는 전술가였다. 아침의 혼란을 틈타 병사들을 선동한 배후가 누구인지, 대가리 속의 전술 기어가 즉각적으로 답을 도출해 냈다.
위선적인 신부, 피터.
“카엘, 중갑병들을 대기시켜라. 무력 충돌은 피한다. 실비아, 나를 보좌해라.”
아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전신에서 매일 아침 죽음을 이겨낸 지휘관 특유의 서늘하고 냉철한 기운, ‘무의식적 위압감(Commander's Aura)’이 뿜어져 나왔. 짓눌릴 듯한 중압감에 토마스는 침을 삼키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저도 동행하겠습니다, 아서 사령관.”
헬레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교단의 사제가 요새의 군기를 어지럽히고 폭동을 선동했다면, 그것은 교단의 명예와도 직결된 문제입니다. 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습니다.”
“기꺼이.”
아서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을 나섰다. 새벽의 푸르스름한 안개가 요새 복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연병장으로 향하는 걸음걸이마다 아서의 가죽 갑옷이 묵직한 소리를 냈고, 그의 옆을 지키는 실비아는 단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오직 예리한 시선으로 주변의 어둠을 경계했다.
연병장에 도착했을 때, 광경은 처참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병사들의 이성을 붙잡아주던 거대한 청동 행동 지침판이 찌그러진 채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도끼를 든 몇몇 신참 병사들이 광기 어린 눈빛으로 침을 흘리며 청동판을 내리치고 있었고, 그 주변을 수십 명의 징집병들이 둘러싼 채 울부짖고 있었다.
“망각은 축복이다! 매일 아침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주하는 지옥에서 벗어나라!”
“신부님의 말씀이 맞다! 우리는 왜 억지로 기억을 찾아야 하는가! 어차피 안개가 모든 것을 지워줄 텐데!”
그들의 눈동자는 풀려 있었고, 절망과 체념이 영혼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 연병장 단상 위에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채 금빛 십자가 펜던트를 쥔 피터 신부가 서 있었다.
“어리석은 양들이여, 고통스러운 기억의 사슬을 끊어내십시오. 매일 아침 자신이 누구인지 고뇌하는 형벌에서 벗어나, 신이 내린 달콤한 망각의 품에 안기십시오. 저 사령관의 청동판은 여러분에게 매일 아침 절망을 강요하는 사악한 덫일 뿐입니다.”
피터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마력 파동이 실려 있었다. 교단 비전의 ‘민중 심리 장악’ 주술이었다. 게다가 그가 들고 있는 금빛 신성 향로에서는 은은하고 달콤한 세뇌의 향기가 풍겨 나와 병사들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멈춰라.”
아서의 목소리가 연병장의 소란을 뚫고 무겁게 울려 퍼졌다.
병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아서에게로 향했다. 아서는 한 걸음씩 단상을 향해 걸어갔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무기를 든 탈영병들이 그의 기세에 눌려 슬그머니 길을 열었다.
“피터 신부.”
단상 아래에 멈춰 선 아서가 고개를 들어 피터를 올려다보았다.
“신이 내린 달콤한 망각이라니, 제법 그럴듯한 궤변이군. 하지만 묻겠다. 만약 망각이 진정으로 신이 내린 자비이자 축복이라면, 왜 교단은 자신들의 세금과 면죄부 기록, 그리고 교회의 법률을 단 한 장도 잊지 않고 보존하는가?”
피터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했다. 자애로운 미소 뒤로 음흉한 살기가 스쳐 지나갔.
“그것은 세속의 무지한 자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성스러운 기록입니다, 사령관.”
“성스러운 기록이라. 그렇다면 우리 병사들이 매일 아침 자신의 이름과 고향, 그리고 지켜야 할 가족의 이름을 기록하는 것은 왜 사악한 주술이 되는가? 교단은 기억을 독점하여 지배 체계를 유지하고, 백성들에게는 망각을 강요하여 순종하는 가축으로 만들려는 것 아닌가?”
“무슨 신성모독을……!”
병사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커졌다. 아서의 이성적이고 차가운 논리가 피터가 쌓아 올린 세뇌의 장막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병사들의 풀렸던 눈동자에 미세한 의구심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때, 아서의 시야에 기묘한 마력의 흐름이 포착되었다.
예배당 제단 방향에서 시작된 짙은 자색의 마력 실선들이 연병장 바닥을 타고 흘러와 병사들의 발끝에 닿아 있었다. 그것은 신성 마력이 아니었다. 타인의 정신과 영혼의 질량을 빨아들이는 음습하고 탐욕스러운 약탈의 흐름이었다.
아서는 즉각 ‘마력 흐름 시각화(Flow Vision)’ 능력을 가동했다.
*파지직!*
두 눈동자가 은백색으로 번뜩이며 극심한 안구 통증이 뇌를 찔렀다. 시신경의 모세혈관이 터져 눈가로 한 줄기 핏물이 흘러내렸지만, 아서는 눈을 감지 않았다. 시각화된 마력의 결은 명백히 예배당 지하 깊은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대륙 전체 기억 소거 세금의 메커니즘.’
제국민들이 안개 속에서 잃어버리는 기억의 질량이, 사실은 교단이 설계한 지하의 거대한 수확 장치를 통해 순수한 마력 에너지 세금으로 변환되어 빨려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예배당 자체가 거대한 흡수 노드였다.
아서는 등 뒤의 실비아에게 수화로 극비 신호를 보냈다.
‘실비아, 헬레나를 데리고 연병장의 병사들을 진정시켜라. 도나투스의 기사들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헬레나의 시선을 묶어두어야 한다. 나는 예배당 내부를 조사하겠다.’
실비아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서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가 놓았다.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진 미세한 온기가 아서의 두통을 아주 잠깐 가라앉혀 주었다. 실비아는 즉각 헬레나의 옆으로 이동하며 연병장의 통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기동을 시작했다.
아서는 병사들과 피터의 대치 상태를 틈타, 어둠이 깔린 예배당 내부로 은밀히 걸음을 옮겼다.
예배당 안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새벽빛이 붉고 푸른 파편이 되어 낡은 장의자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공기 중에는 피터의 향로에서 풍기던 달콤하고 눅눅한 향기가 가득 차 있었다.
아서는 제단 뒤편의 성상 아래로 향했다. 마력 흐름 시각화가 가리키는 붉은 실선들이 성상 밑바닥의 틈새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서는 성상 뒤편의 가려진 벽면을 밀었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지하로 내려가는 어둡고 습한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곳이군.”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안개의 독성이 고인 음습한 한기가 피부를 찔렀다. 지하 깊은 곳에 도달했을 때, 아서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그곳은 예배당의 지하가 아니었다. 고대 기하학 룬 문자들이 사방의 돌벽에 빼곡히 음각되어 있는 거대한 제단, ‘속죄의 제단’의 변형판이었다. 그리고 제단 중앙에는 청동 기어들과 마력 수정들이 기괴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 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째깍, 째깍, 웅웅웅…….*
장치 내부의 수정들이 붉고 푸른빛을 내뿜으며 회전할 때마다, 요새 병사들이 잃어버린 기억의 파편들이 미세한 영혼의 질량이 되어 실린더 내부로 흡수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정제된 마력 결정이 되어 제단 상단의 전송석으로 모이고 있었다.
“자연 현상이 아니었어. 교단이 백성들의 자아를 수확해 영생의 동력원으로 쓰고 있었던 거다.”
아서는 전율했다. 이것이 바로 제국과 교단이 숨겨온 가장 추악한 역사적 진실이었다.
그는 품속에서 ‘에드워드의 계산용 슬레이트’를 꺼내 들었다. 이 거대한 영혼 수확 장치의 핵심 룬 문양과 기하학적 제어 수식을 슬레이트에 복사하여 물증을 확보해야 했다. 아서가 슬레이트의 레버를 조작하며 제단의 룬 파동을 해독하기 시작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철컥! 쾅!*
지하로 내려오는 유일한 철문이 둔탁한 쇠소리를 내며 굳건히 닫혔다. 사방을 울리는 육중한 잠금장치의 마찰음이 아서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아서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자애로운 신부의 가면을 완전히 벗어던진 피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빛을 반사하지 않는 예리한 은장도가 쥐어져 있었고, 입가에는 소름 끼치도록 음흉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과연 전술가 가문의 마지막 핏줄답군, 아서 사령관. 이 지하 깊은 곳의 성스러운 정화 장치까지 기어들어 오다니.”
피터가 들고 있던 금빛 신성 향로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향로의 구멍 사이로 고농도의 황금빛 정신 마취 가스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와 순식간에 밀실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성스러운 장치라니, 기만적인 영혼 수확기일 뿐이다.”
아서가 말하려 했으나, 들이마신 마취 가스가 기도를 태우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유발했다. 가슴이 죄어왔고 목구멍에서 뜨거운 핏덩이가 울컥 솟구쳤.
“콜록! 욱……!”
아서는 붉은 피를 바닥에 토해내며 무릎을 꿇었다. 시야가 흐려지고 사지의 감각이 급격히 무뎌졌다. 뇌 세포가 마비되며 자아가 다시 한번 망각의 심연으로 가라앉으려 하고 있었다.
“이곳은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신성 방음 장막이 걸려 있습니다. 네놈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지상의 사나운 부사관이나 말 없는 부관은 들을 수 없지. 순순히 기억을 바치고 영원한 안식에 드십시오, 사령관.”
피터가 은장도를 치켜들며 아서의 심장을 향해 벼락같이 돌격해 왔다. 육체적 무력이 전무한 아서에게는 절체절명의 암살 위기였다.
하지만 아서의 눈동자만큼은 흐려지지 않았다. 그는 주저 없이 왼손 검지와 중지를 모아 자신의 관자놀이와 목 뒤의 특정 혈자리를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강하게 압박했다.
‘뇌 세포 자극 정신 방어 기법(Brain Cell Stimulation)!’
*파지직!*
뇌리에서 푸른 스파크가 튀는 듯한 극심한 물리적 충격과 고통이 전신을 관통했다. 스스로 뇌 신경에 가한 타격은 마취 가스의 잠식을 강제로 밀어내며 아서의 이성을 맑게 깨웠다.
아서는 칼날이 심장을 찌르기 직전, 몸을 오른쪽으로 거칠게 굴려 공격을 회피했다. 은장도가 아서의 가죽 갑옷 어깨 자락을 스치며 불꽃을 튀겼다.
“쥐새끼 같은 놈이 감히 신의 자비를 거부하는가!”
공격이 빗나가자 피터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즉각 왼손을 펼쳐 정신 조작 사슬 주술을 발동했다. 제단의 마력과 공명한 황금빛의 신성 사슬들이 허공에서 실체화되어 아서의 사지를 묶기 위해 올가미처럼 뻗어 나갔.
사슬이 아서의 발목을 휘감으려는 찰나, 아서는 품속에서 ‘기계식 태엽 일지 프로토타입’을 꺼내 들었다.
그는 무감각한 오른손 손가락 끝으로 일지의 청동 기어 태엽을 한계까지 강하게 회전시켰.
*카르르릉! 째깍째깍째깍!*
일지 내부의 기억의 청동 기어들이 초고속으로 회전하며 특유의 미세 전자기 파동과 마력 진동 주파수를 사방으로 방출하기 시작했다. 기어의 회전 파동은 피터가 전개한 정신 조작 사슬의 마법 주파수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웅- 콰쾅!*
허공을 날아오르던 황금빛 사슬들이 기계식 일지의 전자기 교란 파동에 휘말려 형체를 잃고 허무하게 와해되어 사방으로 흩어졌다. 주술이 깨지자 피터는 강한 반동 충격을 받으며 뒤로 세 걸음 물러섰다. 그의 눈동자에 경악과 공포가 서렸다.
“이…… 이것은 무슨 사악한 마도 공학 장치인가! 어떻게 인간의 기계 따위가 신성한 주술의 주파수를 깨뜨린단 말인가!”
아서는 피를 흘리는 입술을 닦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피터를 응시했다.
그는 허리춤의 전술 지휘용 청동 휘장을 꺼내 비상 신호를 보내려 했으나, 예배당의 신성 방음 장막에 막혀 신호탄의 마력 파동이 외부로 나가지 못하고 소멸하는 것을 포착했다. 외부의 구원은 기대할 수 없었다. 이 밀실에서 오직 자신의 지혜와 기계 장치만으로 이 위선적인 사제를 처단해야 했다.
아서의 시선이 피터의 등 뒤, 영혼 수확 장치의 핵심 제어 레버와 가동 기어들로 향했다. 전술가로서의 뇌 세포가 승리를 위한 마지막 기하학적 전술 경로를 초고속으로 계산해 내기 시작했다.
“피터 신부, 네놈의 가짜 신앙은 오늘 이 지하에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아서가 기계식 일지의 태엽을 다시 한번 움켜쥐며 서늘하게 선언했다. 피터는 광기 어린 비명을 지르며 다시 한번 은장도를 치켜들고 아서의 목덜미를 향해 돌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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