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찰관의 불시 검문, 암호화된 각인
바르도의 경고가 폐광의 차가운 정적을 깨뜨리는 순간, 아서의 머릿속에서는 요새 사령관 집무실에 남겨두고 온 기계식 일지와 가죽 문신의 암호 해독 표를 지켜내기 위한 새로운 행정 전술전의 기어가 빠르게 맞물려 돌아가기 시작했다.
지하 3층의 서늘한 공기가 바르도의 거친 숨소리와 뒤섞였다. 노획한 기억의 청동 원석과 고대 오토마톤의 태엽 부품들이 실린 광차는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발락 감찰관의 기사단이 정문을 통과했다면, 지금 요새는 이미 제국의 물리적 통제 하에 들어갔을 터였다.
“로건.”
아서가 낮고 차가운 목소리로 야수 전사를 불렀다.
“예, 사령관.”
“너와 탐사대원들은 이 광차를 이끌고 지하 비밀 통로를 통해 ‘지하 비밀 군수고’로 진입해라. 보급병 월터가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을 거다. 원석과 오토마톤 부품, 그리고 보르그의 마력 핵을 한 톨도 남김없이 비밀 창고 가장 깊은 곳에 은닉해라. 감찰 기사단이 지하까지 내려오기 전에 완벽하게 숨겨야 한다.”
“사령관님은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지상에는 그 독사 같은 감찰관 놈들이 깔렸을 텐데요.”
로건이 굵은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서는 오른손 가죽 장갑을 매만졌다. 기계 동조화를 무리하게 가동한 탓에 손가락 끝에 서늘한 마비 증세가 남아 있었지만, 그의 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명료했다.
“나는 지상으로 바로 올라간다. 발락이 노리는 것은 내 목숨이 아니라, 이 요새의 군권을 박탈할 ‘명분’이다. 내가 도망치면 그들에게 완벽한 반역죄의 명분을 주는 꼴이 돼. 실비아와 함께 사령관 집무실로 가겠다.”
아서는 바르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바르도, 자네는 상단의 마차들을 이끌고 정상적인 무역 통행증을 제시하며 정문으로 진입하게. 감찰관이 자네를 심문하더라도, 그저 정당한 겨울철 방한 물자 거래를 위해 방문했다고만 답해라. 나머지는 내가 집무실에서 해결하지.”
“알겠네, 아서 사령관. 부디 몸조심하게. 발락은 제국 법률의 맹점을 칼날처럼 휘두르는 자일세.”
바르도가 걱정 어린 눈빛을 남긴 채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아서는 지체 없이 실비아에게 수화로 신호를 보냈다.
‘집무실 우회로로 진입한다. 소리를 죽여라.’
실비아가 말없이 은빛 눈동자를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안개의 영향을 받지 않는 특이 체질을 활용해, 아서의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무음으로 움직였다.
***
사령관 집무실의 문은 이미 거칠게 열려 있었다.
방 안은 제국 감찰 기사들의 거친 수색으로 인해 양피지 서류들과 책들이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기계식 태엽 시계들의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서늘한 침묵을 깨뜨리고 있었다.
방 중앙에는 두 명의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명은 제국의 검은 감찰관 제복을 빈틈없이 차려입은 중년 관료, 특별 감찰관 발락이었다. 그의 눈빛은 먹이를 노리는 독사처럼 차갑고 예리했으며, 허리춤에는 마력 흔적을 추적하는 ‘진실의 단안경’이 매달려 있었다.
그의 옆에는 얇은 은테 안경을 쓰고 두꺼운 법전 가방을 든 날카로운 인상의 청년, 천재 행정관 루시우스가 서 있었다. 루시우스는 바닥에 떨어진 아서의 메모 조각들을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집어 들며 흥미롭다는 듯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구석에는 신참 서기 레오가 기사들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최전방 요새의 사령관실치고는 참으로 기묘한 장치들이 많군.”
발락이 차가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때, 아서가 집무실의 깨진 문틀을 밟으며 당당하게 안으로 걸어 들어왔. 실비아가 그의 등 뒤에 소리 없이 섰다.
“내 허락도 없이 국경 수비대의 사령관실을 짓밟는 무례를 범하는 자가 누구인가 했더니, 제국의 특별 감찰관이셨군.”
아서의 서늘한 목소리가 방 안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이 내리앉았다.
발락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서를 응시했다. 그의 단안경이 아서의 전신을 훑어내렸다.
“아서 사령관. 유배지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제법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군. 매일 아침 안개 속에서 미쳐 날뛴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헛소문이었던 모양이지?”
“제국의 법률에 명시된 감찰관의 권한은 요새의 군사적 방어 상태를 감사하는 것에 국한될 텐데요, 발락 감찰관. 사령관의 사적인 집무실을 이렇게 난장판으로 만드는 행위는 황실 군법에 위배되는 월권행위입니다.”
아서가 한 걸음 다가서며 무의식적 위압감을 방출했다. 매일 아침 자아를 잃는 공포를 이겨내고, 망령들의 군세를 막아낸 지휘관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방 안을 채웠다. 감찰 기사들이 본능적으로 검자루를 쥐며 긴장했다.
그때, 루시우스가 은테 안경을 치켜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월권이라니요, 아서 사령관. 우리는 정당한 반역 혐의를 조사하러 온 것입니다. 전임 감시관 펠릭스가 행방불명되었고, 요새 내부에서 제국이 허가하지 않은 불법적인 마법 기록 체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루시우스가 아서의 턱 끝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 증거는 이미 사령관, 자네의 몸에 새겨져 있는 것 같군.”
루시우스의 지시에 따라 두 명의 감찰 기사가 아서의 양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실비아가 단검을 뽑으려 몸을 움직였으나, 아서가 미세하게 고개를 흔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물리적 충돌은 지금 적들이 가장 바라는 명분이었다.
“옷을 벗겨라.”
루시우스가 명령했다.
기사들이 아서의 군용 가죽 갑옷과 셔츠를 강제로 찢어발겼다. 가슴팍이 드러나는 순간, 방 안에 있던 모든 자들의 입에서 나직한 침묵이 흘러나왔다.
아서의 야윈 가슴과 양팔, 그리고 목덜미를 타고 올라오는 피부 위에는 푸른색 마력 잉크로 새겨진 기묘하고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들이 가득 각인되어 있었다. 현대 한국군의 작전 약어와 암호 체계, 그리고 고대 룬 문자가 기괴하게 뒤섞인 가죽 문신이었다.
“이것 보십시오, 발락 님.”
루시우스의 눈동자가 광적인 지적 희열로 빛났다.
“이것은 제국 마탑에 등록되지 않은 불법 주술 회로입니다. 매일 아침 기억을 잃는 요새에서 사령관이 이단적인 주술을 몸에 새겨 군대를 선동하고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이단 혐의 및 황실 반역죄로 즉각 기소하겠습니다.”
루시우스가 품속에서 황동으로 제련된 ‘진실의 마력 인장 깃펜’을 꺼내 들었다. 그 깃펜의 끝에서 붉은색 마력 실선이 뿜어져 나와 아서의 가슴에 새겨진 문신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이 문양들의 마력 주파수를 해독하는 즉시, 자네는 이 요새의 지하 감옥이 아니라 황도의 처형대로 가게 될 걸세.”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이단 혐의가 확정되는 순간, 요새의 모든 군권은 발락에게 넘어가고 아서와 그의 동료들은 즉결 처형을 면치 못할 터였다.
구석에 무릎 꿇고 있던 서기 레오가 공포에 질려 흐느끼기 시작했다.
아서는 각혈하듯 밀려오는 두통을 억누르며, 오히려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레오.”
아서가 나직하게 서기를 불렀다.
“예, 예? 사령관님…….”
“바닥에 널려 있는 법전 서적들 중, 제국 헌법 제3권 최전방 특별 군사법 조항을 찾아라. 그리고 제47조 3항을 큰 목소리로 낭독해라.”
“무, 무슨 말씀이신지…….”
레오가 당황하여 바닥의 책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의 손이 너무 심하게 떨려 두꺼운 가죽 법전 서류들이 바닥으로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하하, 무의미한 발악이군. 법 조항 몇 개로 이 명백한 주술 흔적을 가릴 수 있을 것 같나?”
루시우스가 비웃으며 깃펜의 스캔 속도를 올렸다.
레오가 서류를 떨어뜨리며 행정적 지연이 발생하자, 아서는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붉은 마력 실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그리고 그의 뇌리에 완벽하게 저장되어 있던 현대 군사 작전 매뉴얼과 제국법 조항을 결합하여, 정확한 문장을 단호하게 암송하기 시작했다.
“제국 헌법 제47조 3항. ‘북방 최전방 은빛 안개 요새를 포함한 안개 노출 지역의 사령관은, 적의 정보 탈취 및 안개로 인한 군사 기밀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군사 명령과 지휘 계통을 독자적인 암호 체계로 작성하여 보존할 의무를 지닌다.’ 루시우스 행정관, 자네가 가진 그 깃펜으로 내 몸의 문양들을 다시 스캔해 보아라. 그것이 ‘주술 회로’인지, 아니면 정당한 ‘군사 보안 암호’인지.”
루시우스의 안경 너머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가 쥔 진실의 마력 인장 깃펜이 아서의 목덜미에 새겨진 룬 문양과 한글 자모음 혼합 각인을 완전히 스캔했다.
*삐이이이- 째깍!*
깃펜 끝의 보석이 붉은색 이단 주술 경보 대신, 정당한 보안 기록을 의미하는 은은한 청동빛을 내뿜으며 멈춰 섰다.
아서의 문신은 마력을 방출하는 주술 회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아서의 뇌 신경 세포 자극 정신 방어 기법과 기억 복원 프로토콜에 의해서만 해독되는, 철저히 정보 보존만을 위해 음각된 ‘암호화된 가죽 각인 해독법’의 결과물이었다. 제국의 해독 마법 장치에는 그저 고도로 복잡한 ‘단순 군사 보안 암호’로 판독될 뿐이었다.
“이, 이럴 리가…….”
루시우스가 당황하며 깃펜을 흔들었다.
“이건 명백한 암호문입니다. 마력의 활성화 반응이 전혀 없는, 순수한 정보의 기록 장치일 뿐입니다. 법적으로…… 이단 주술이라 규정할 수 없습니다.”
루시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발락에게 보고했다. 아서는 찢어진 셔츠 깃을 가볍게 여미며 발락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보안 암호를 몸에 새겨서라도 매일 아침 자아를 복구하고 요새를 지켜온 지휘관에게, 제국 감찰부가 반역죄를 씌우려 했다는 사실이 황도 군부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발락 감찰관? 최전방 군사 기밀 수호법을 위반한 것은 오히려 자네들입니다.”
발락의 얼굴이 소름 끼치도록 차갑게 굳어졌다. 그는 루시우스를 힐끗 바라본 후, 천천히 아서에게 다가왔다.
“지독하게 영리한 놈이군, 아서. 법률의 구멍을 이토록 완벽하게 파고들 줄이야. 하지만 사법적 명분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발락이 허리춤의 철검을 살짝 드러내며 묵직한 목소리로 압박했다.
“전임 감시관 펠릭스가 실종되었다. 요새 내부의 모든 병사들이 자네를 구원자로 받들며 펠릭스의 실종을 묵인하고 있지. 사령관인 자네가 사적으로 감시관을 살해하고 시신을 안개 속에 유기했다는 혐의로 즉각 체포하겠다. 이 요새 내부의 군권을 전면 동결한다.”
기사들이 다시 검을 뽑아 아서의 목덜미를 겨누었다.
아서는 한숨을 쉬며 책상 서랍 아래 비밀 틈새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미리 복사해 두었던 가죽 비망록 한 권을 꺼내 발락의 발밑에 던졌다.
*툭.*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시지.”
루시우스가 조심스럽게 비망록을 주워 펼쳤다. 장부의 첫 페이지를 본 루시우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갔다.
“이, 이것은…… 펠릭스 감시관과 보급관 헨리가 작성한 요새 군자금 및 식량 횡령 이중 장부입니다. 황실 보급품의 무려 40%를 빼돌려 제국 암시장에 유통한 구체적인 날짜와 뇌물 수수 내역이…… 헨리 대위의 마력 인장과 함께 적혀 있습니다.”
아서가 차가운 눈빛으로 발락을 쏘아보았다.
“펠릭스는 살해당한 게 아닙니다. 자신의 횡령 죄상이 나와 부사관 카엘에게 적발당할 위기에 처하자, 요새의 마지막 군자금을 들고 국경 너머로 야반도주한 것이지. 그 증거가 바로 그 이중 장부다. 발락 감찰관, 자네가 펠릭스의 도주를 도운 공범이 아니라면, 당장 그 장부를 들고 황도로 돌아가 감사 보고서부터 수정해야 할 텐데?”
발락의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아서는 완벽한 기록 증거와 제국법 역이용 전술을 통해, 감찰관이 준비해 온 모든 사법적 올가미를 단 10분 만에 완벽히 튕겨내 버렸다.
완벽한 아서의 승리였다.
하지만 발락은 순순히 물러설 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빨을 갈며 검을 검집에 거칠게 집어넣었다.
“지독한 놈…….”
발락이 아서의 귀밑에 대고 서늘하게 속삭였다.
“법률 조항 뒤에 숨어 목숨을 건졌다고 자만하지 마라. 감찰관의 권한으로, 오늘부로 이 요새의 공식 마력 통신망을 전면 동결하겠다. 외부 아인종 상단과의 그 어떠한 거래도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발락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올라갔다.
“세속의 법률이 자네를 묶지 못한다면, 신의 불꽃은 어떨까? 요새 외곽에 신성 교단의 붉은 이단 심문소 텐트가 쳐지기 시작했다. 신성 불꽃을 두른 이단 추적 기사들이 자네의 그 기묘한 문신을 직접 불태우러 올 걸세. 도나투스 심문관은 나와 달리 타협을 모르는 광신도지.”
발락과 루시우스가 기사들을 이끌고 집무실을 거칠게 빠져나갔다.
그들이 떠난 집무실 창문 너머로, 요새 성문 외곽 평원에 신성 교단의 상징인 거대한 붉은 장막 텐트들이 군대처럼 들어서기 시작하는 광경이 보였다. 하얀 안개 장막을 뚫고 붉은 신성 불꽃을 피워 올린 이단 추적 기사들이 요새 성문을 사방으로 둘러싸며 압박해오고 있었다.
아서는 쓰러지듯 집무실 의자에 주저앉으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만성적인 두통이 다시금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실비아가 다가와 그의 차가운 손을 꼭 잡았다. 은은한 정화의 마력이 아서의 손끝을 타고 흐르며, 새로운 전술적 투지를 일깨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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