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의 포효, 지워진 이름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단순한 두통이 아니었다. 뇌세포 하나하나를 날카로운 유리 조각으로 긁어내는 듯한 극심한 인지적 과부하. 사방은 온통 축축하고 차가운 하얀 장막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은빛 안개 요새(은빛 안개 요새)의 사시사철을 지배하는 기이한 안개였다.
"으아아아악!"
"놓아라! 이 쇠사슬을 놓으란 말이다! 네놈들은 누구냐!"
창문 너머 요새 연병장(요새 연병장) 쪽에서 짐승 같은 비명과 쇠사슬이 부딪치는 금속음이 고막을 찔렀다. 매일 아침 눈을 뜰 때마다 반복되는 지옥의 서막이었다.
‘나는…… 누구지?’
찰나의 순간, 뇌리가 완벽한 공백으로 가득 찼다. 이름도, 나이도, 자신이 왜 이 음습한 석조 방에 누워 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극단적인 인지 상실의 공포가 목구멍을 턱 막아왔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며 호흡이 가빠졌다. 이것이 바로 이 요새의 모든 생명체를 집어삼키는 1단계: 기억의 미아 (Amateur)의 상태였다.
하지만 패닉이 뇌를 완전히 장악하기 직전, 손등에 느껴지는 서늘한 감각이 아서(김도현)의 시선을 붙잡았다.
손가락 끝부터 손목을 타고 올라가는 짙은 푸른색의 정교한 기하학적 선들. 가죽 각인 전술 프로토콜(가죽 각인 전술 프로토콜)이었다. 피부 진피층 깊숙이 새겨진 암호화된 문장들이 은은한 한기를 내뿜으며 도드라져 있었다.
[거울을 봐라. 우측 서랍의 태엽을 감아라. 너는 사령관 아서다.]
현대 대한민국 육군의 수석 작전 전술가였던 김도현의 본능이 차갑게 깨어났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비틀거리며 책상 위에 놓인 청동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거울 속에는 야윈 체구에 날카로운 안광을 지닌 20대 후반의 청년이 서 있었다. 가죽 군용 갑옷 아래로, 목과 가슴팍까지 타고 올라간 군사 명령들이 한글 자모와 고대 룬 문자가 뒤섞인 암호로 빼곡히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은 매일 밤 안개가 내리기 전, 자신이 직접 영혼 각인 바늘로 새겨 넣은 ‘생존의 이정표’였다.
아서는 지체 없이 책상 우측 서랍을 열었다. 묵직한 청동 기어로 구성된 둥근 기계 장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계식 태엽 일지 프로토타입(기계식 태엽 일지 프로토타입)이었다. 안개의 소거 마력은 유기적인 뇌세포의 기억은 지울 수 있어도, 차가운 금속에 음각으로 새겨진 기계적 기록은 지우지 못한다.
*끼이익, 째깍, 째깍.*
아서는 익숙한 감각으로 청동 태엽을 끝까지 감았다. 태엽 기어가 맞물려 돌아가며 정교한 황동 실린더가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일지 내부에서 서늘하고 이성적인 청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서 본인의 목소리였다.
- "김도현, 정신 차려라. 이 목소리를 듣고 있다면 너는 또다시 최근 24시간의 기억을 잃은 것이다. 당황하지 마라. 너는 제국 북방 최전방, 은빛 안개 요새의 사령관 아서다. 네 목 뒤의 수호 낙인은 가문의 비전이며, 밤마다 안개 속에서 몰려오는 망령들을 막아내는 것이 네 임무다. 오늘 아침 네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음성 일지의 파동이 뇌 신경을 자극하자, 차단되었던 전술적 기억들이 해일처럼 밀려들어 왔다. 기억 복원 프로토콜 (Memory Reboot)이 뇌세포의 마력 결합을 강제로 맞물리게 한 것이다.
요새의 지형, 병력 배치, 보급 상태, 그리고 자신을 노리는 내부의 적들의 이름까지. 잃어버렸던 자아가 90% 이상 복구된 순간, 아서의 눈동자가 차가운 지혜의 빛으로 번뜩였다.
*쾅! 콰르릉!*
그때, 아서의 집무실(아서의 집무실)의 두꺼운 참나무 문이 비명 지르듯 쪼개졌다.
"침입자다! 황실의 첩자 놈들! 모두 죽여버리겠다!"
방 안으로 들이닥친 것은 거구의 중갑 전사였다. 요새의 늙은 부사관 카엘(카엘)이었다. 얼굴 가득 깊은 칼자국 흉터를 지닌 노병의 눈은 핏발이 선 채 완전히 뒤집혀 있었다. 매일 아침 안개에 기억을 소거당한 카엘은 본능적인 전투 본능만 남은 채 폭주하고 있었다. 그가 휘두르는 거대한 대검이 공기를 가르며 아서의 머리 위로 수직으로 떨어졌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그 압도적인 무력에 얼어붙었을 터였다. 소드 마스터 하급에 달하는 카엘의 일격은 일개 전술가인 아서가 육체적으로 맞설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서는 당황하지 않았다. 현대 군사 심리학과 전술적 분석력이 그의 머릿속에서 초고속으로 회전했다.
‘기억을 잃은 인간은 언어적 설득이 통하지 않는다. 오직 몸에 각인된 규율과 시각적 지표에만 본능적으로 복종한다.’
아서는 대검이 낙하하는 궤적을 예측하고 몸을 비틀어 오른쪽으로 굴렀다.
*콰직!*
카엘의 대검이 아서가 서 있던 청동 거울과 책상 모퉁이를 처참하게 박살 냈다. 돌가루와 나무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카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즉각 대검을 회수해 아서의 목덜미를 향해 수평으로 그어왔다. 피할 공간이 없었다.
그 절체절명의 순간, 아서는 도망치는 대신 카엘의 품 안으로 과감하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카엘의 가슴 중앙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는 청동 패를 움켜잡았다.
그것은 아서가 직접 가죽에 새겨 카엘에게 하사했던 ‘부사관 전용 기계식 신원 확인 패’였다.
"카엘! 코드 702!"
아서는 카엘의 귀가에 대고 벼락같이 군사 규율을 연호했다.
"너는 은빛 안개 요새의 수석 부사관이다! 사령관의 명령이다, 검을 멈추고 직립해라!"
"크, 윽……?"
카엘의 칼끝이 아서의 목덜미 바로 앞 3cm 지점에서 기적적으로 멈춰 섰다.
노병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머릿속의 기억은 지워졌을지언정, 수십 년간 뼈에 새겨진 군사적 복종 본능과 신원 확인 패의 시각적 자극이 그의 폭주하던 신경망을 강제로 억누른 것이다. 카엘은 대검을 쥔 손을 부르르 떨며 이성을 되찾기 위해 처절하게 신음했다.
"내가…… 내가 왜 여기에…… 사령관, 님……?"
카엘의 칼날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며 둔중한 금속음을 냈다. 아군은 다치지 않았고, 폭주는 제어되었다. 아서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카엘의 어깨를 짚으려던 바로 그 순간.
*쾅!*
집무실의 부서진 문틈 너머로, 수십 명의 무장 병력을 거느린 사내가 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걸어 들어왔다. 은빛 안개 요새의 부패한 감시관, 펠릭스(펠릭스)였다.
"정말 눈물겨운 광경이군, 아서 사령관."
펠릭스는 품속에서 황실의 붉은 인장이 찍힌 감사 명령서를 꺼내 보이며 비열하게 웃었다.
"기억을 잃고 미쳐 날뛰는 부하와, 그 칼날 끝에서 벌벌 떠는 사령관이라니. 이 요새가 정상적으로 가동되지 않고 있음이 만천하에 입증되었다. 황실의 밀명에 따라, 정신 광증에 걸린 아서 사령관의 지휘권을 이 시간부로 즉각 박탈하겠다."
펠릭스의 하수인들이 일제히 철검을 뽑아들며 아서와 카엘을 포위했다. 아침의 혼란을 틈타 요새의 군권을 통째로 강탈하려는 비열한 음모가 아서의 목전을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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