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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의 방문, 가면 뒤의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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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대저택의 아침은 언제나 비정하리만치 고요했다. 창백한 새벽빛이 높은 콘크리트 담벼락을 넘어 지하 아틀리에의 두꺼운 방화문 틈새로 스며들 때, 이지안은 욱신거리는 오른손바닥을 감싸 쥐었다. 지난밤 은지원의 자해 폭주를 맨손으로 막아내다 메스에 베인 상처는 하얗게 소독약을 머금은 거즈 아래에서 심장 박동에 맞춰 맥질하고 있었다. 발목 역시 날카로운 크리스탈 유리 파편에 긁혀 걸을 때마다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지안은 입술을 깨물며 고통을 참아냈다.


지금은 아픔을 느낄 여유가 없었다. 몇 시간 뒤면 은지원의 정신적 붕괴를 확정 짓고 이사회에서 그의 상속권을 영구히 박탈하려는 숙부, 은정학 부회장의 불시 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안은 아틀리에 구석에 마련된 소형 가마터 옆의 스팀 배관 벨브를 조심스럽게 돌렸다. 지난밤 경동시장에서 목숨을 걸고 공수해 온 최상급 천연 침향 가루와 야생 옻나무 수액을 배합해 만든 해독 유액의 잔여물이 온실 배관의 스팀 열기를 타고 은은하게 기화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지안이 설계한 ‘한방 향료 훈증 요법’의 은밀한 덫이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황금빛 향기 입자가 지원의 침실과 연결된 환기구를 타고 공기 중에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상무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침실 침대에 정갈한 실크 셔츠 차림으로 앉아 있는 은지원에게 지안이 다가갔다. 해독제를 복용한 덕분에 언제나 그의 오른손을 가혹하게 흔들던 미세한 마비 떨림은 기적처럼 멈춰 있었다. 하지만 그의 창백한 얼굴에는 폭풍전야의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지원은 지안이 다가오자 그녀의 짓무르고 상처 가득한 손가락 끝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숨소리 공감각 청각’이 지안의 정직하고 규칙적인 숨소리를 읽어냈다. 저택 내부의 가식적인 인간들에게서는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오직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피를 흘린 자만이 낼 수 있는 깨끗한 호흡이었다. 지원의 차가운 눈동자에 일렁이던 불신이 걷히고, 지안을 향한 단단한 신뢰가 그 자리를 채웠.


“약은…… 완벽히 처리했어.”


지원이 나지막이 속삭였다. 지안이 가르쳐 준 ‘구강 보관 프로토콜’에 따라, 오늘 아침 안 간호사가 강제로 삼키게 했던 오만석 주치의의 신경 마비독 알약은 이미 혀 밑에 숨겨두었다가 세라믹 용기 속에 완벽히 뱉어낸 상태였다. 그의 대뇌 피질을 마비시키던 사슬이 풀려 있었기에, 지원의 정신은 수년 만에 가장 맑고 예리하게 깨어 있었다.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숙부는 상무님이 정상이라는 사실을 절대 믿지 않으려 할 겁니다. 분명 과거의 상처를 건드려 강제로 발작을 유도하려 하겠지요. 어떤 자극이 오든, 제 숨소리에만 집중하세요. 제가 상무님의 깨진 마음을 이어 붙이는 황금실이 되겠습니다.”


지안이 지원의 옷깃 안쪽으로 ‘신경 안정 한방 펜던트’를 단단히 밀어 넣어 주며 속삭였다. 그 순간, 저택 1층 로비에서부터 무겁고 위압적인 구두 발자국 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오는 청각적 진동이 느껴졌다.


쿵, 쿵, 쿵.


올 것이 왔다. 지안은 신속히 지원의 침대 옆으로 물러서서 고개를 숙였다. 가난하고 돈을 바라고 들어온 나약한 미술 교사의 가면을 쓸 시간이었다.


철컥! 쾅—!


지원의 침실 문이 난폭하게 열려 젖혀졌다. 은성그룹의 실권자이자 최종 적대자, 은정학 부회장이 사설 경호원들을 거느리고 방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의 뒤에는 비열한 안경 너머로 눈동자를 굴리는 오만석 주치의와, 태블릿을 들고 실시간 보고 태세를 갖춘 밀정 최 비서가 버티고 있었다.


은정학은 맞춤 제작된 최고급 더블 브레스트 수트를 걸치고, 정갈하게 빗어 넘긴 은발 아래로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금테 안경 너머에 서린 눈빛은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의 그것처럼 차갑고 비정했다.


“지원아, 숙부다. 몸은 좀 어떠냐?”


은정학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가왔지만, 방 안의 공기는 순식간에 영하로 얼어붙었다. 오만석 주치의가 기다렸다는 듯 지원의 창백한 혈색을 살피며 주주들에게 전송할 태블릿을 치켜들었다.


“부회장님, 상무님의 동공이 크게 열려 있고 안색이 극도로 창백합니다. 조현병적 환각 증세가 최고조에 달해 뇌 신경 마비가 진행 중인 것으로 판단됩니다. 오늘 이사회에 영구 정신 분열 진단서를 즉각 제출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만석의 교활한 진단에 은정학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선적인 연극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지원이 이미 완벽히 파멸한 폐인으로 보일 터였다.


그때, 은정학의 눈짓을 받은 최 비서가 품 안에서 묵직한 가죽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상자가 열리자, 내부에서 태엽이 감기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울렸다. 최 비서가 꺼낸 것은 소년 시절 지원을 비밀 방에 가두고 학대할 때 은태웅 회장이 상시 틀어놓았던, 가혹한 기계식 괘종시계였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정적을 깨부수는 날카롭고 규칙적인 초침 소리가 침실 안을 가득 채웠다.


그 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었다. 소년 지원의 살을 찢고 영혼을 부수었던 가학적 학대의 트리거이자, 그의 뇌 신경에 각인된 절대적인 공포의 사슬이었다.


순간, 지원의 어깨가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뇌 신경 속에서 과거의 어두운 망령들이 깨어나며, 사지가 다시 마비되려는 극단적인 공황 발작의 징후가 그의 온몸을 덮쳐왔다.


“지원아, 시계 소리가 들리느냐? 네 아버지가 너를 가두었던 그 서재의 소리다.”


은정학이 지원의 귀에 대고 잔인하게 속삭였다. 지원의 오른손이 다시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바닥에 떨어진 메스를 쥐고 제 살을 찢어야만 이 고통이 멈출 것 같은 극단적인 자해 충동이 솟구쳤다.


‘안 돼…… 여기서 무너지면 안 돼.’


지안은 숨을 죽인 채, 침실 벽면의 스팀 송출 밸브를 미세하게 한 칸 더 올렸다. 아틀리에 지하에서부터 기화되어 올라온 천연 침향의 깊고 묵직한 나무 향이 환기구를 통해 지원의 코끝으로 강하게 뿜어내어졌다.


동시에 지안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깊고 정직한 호흡을 내쉬었다.


*후우…… 하아…….*


지원의 예민한 ‘숨소리 공감각 청각’이 기계식 초침 소리를 뚫고 지안의 깨끗한 숨소리를 포착했다. 지안의 숨소리는 찬란한 금빛 실이 되어, 그의 머릿속에서 날카롭게 깨어져 가던 유리 파편 같은 신경들을 하나하나 단단하게 이어 붙이기 시작했다.


지원은 옷깃 속에 감춰진 ‘신경 안정 한방 펜던트’를 왼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펜던트에서 흘러나오는 침향의 약성과 지안의 호흡이 그의 대뇌 피질의 극단적인 흥분을 가라앉혔다.


지원은 이성을 붙잡기 위해 펜던트를 쥔 주먹에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극단적인 힘을 주었다. 붉은 피가 그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금빛 은 펜던트를 적셨지만, 그 신체적 통증이 오히려 마비독의 부작용을 완벽하게 무력화하는 각성제가 되었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 소리는 더 이상 공포의 사슬이 아니었다. 지원은 깊은 호흡과 함께 흔들리던 눈동자의 초점을 완벽하게 바로잡았다. 그의 눈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고 예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오만석 주치의가 지원의 발작을 확정 짓고 사설 구급대원들을 부르려 스마트폰을 꺼내든 찰나였다.


스윽.


휠체어에 앉아 무력하게 떨고 있어야 할 은지원이, 제 힘으로 침대를 짚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년 동안 휠체어에 갇혀 지내던 후계자가 대지 위에 당당하게 두 발을 딛고 선 순간이었다.


방 안의 모든 인간들이 숨을 들이켰다. 최 비서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고, 오만석은 들고 있던 태블릿을 떨어뜨릴 뻔했다.


지원은 은정학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를 날렸다. 그것은 이사회 주주들을 떨게 만들었던, 은성그룹의 진정한 황태자이자 ‘명목상 후계자 권력’의 부활이었다.


“무슨 무례인가, 숙부.”


낮고 묵직한 지원의 목소리가 침실 벽면을 울렸다. 한 올의 떨림도 없는, 극도로 냉철하고 오만한 태도였다.


“……지, 지원아? 네가 어떻게 일어선 것이냐?”


은정학의 가면 뒤 위선적인 얼굴이 처음으로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평생 폐인으로 주저앉아 있어야 할 조카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군주처럼 호통을 치고 있었다.


지원은 테이블 위에서 시끄럽게 울려대던 기계식 괘종시계를 향해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그의 단단한 오른손이 시계를 움켜잡았다.


쾅—! 와장창!


지원은 망설임 없이 시계를 대리석 바닥으로 내던져 산산조각 내버렸다. 톱니바퀴와 유리가 비참하게 깨어져 나가는 파열음이 침실에 울려 퍼졌다.


“이딴 쓰레기를 내 방에 들이지 마라. 그리고 오만석 주치의.”


지원이 오만석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내 정신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보고하려던 그 손가락, 당장 치우는 게 좋을 거다. 이사회 주주들이 상무인 나의 친필 서명이 담긴 정상 업무 복귀 조서를 받게 된다면, 네 의사 면허가 어떻게 될지 스스로 잘 계산해 봐라.”


오만석은 사색이 되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지원의 눈빛에 담긴 살기가 단순한 미치광이의 광기가 아닌, 은성그룹 창립 가문의 피에 흐르는 냉혹한 지배자의 안광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은정학은 떨리는 주먹을 수트 주머니 속에 감춘 채, 무너져 내리는 가면을 간신히 유지하려 애썼다. 자신이 설계한 완벽한 자극(시계 소리)과 약물 제어가 완벽하게 실패했음을 직감한 숙부의 얼굴에 검붉은 분노가 차올랐다.


“……그래, 지원이 네가 건강을 회복했다니 숙부로서 이보다 기쁜 일이 어디 있겠느냐. 오늘은 이만 물러가마.”


은정학은 이빨을 갈며 몸을 돌렸다. 그의 비정한 패배의 퇴장이었다.


하지만 정문을 나서기 직전, 은정학은 극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옆에 서 있던 최 비서의 뺨을 사정없이 갈겼다.


찰싹—!


날카로운 타격음과 함께 최 비서의 안경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쓸모없는 것. 상무의 상태가 악화되었다고 보고한 대가가 이것이냐?”


은정학은 최 비서를 차갑게 짓밟고 저택 정문을 나섰다. 그의 등 뒤로 깊은 어둠의 반격이 예고되고 있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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