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약의 실체, 보이지 않는 사슬
달칵.
정적을 깨뜨리는 가혹한 금속음과 함께 서재 안쪽 비밀 방의 문손잡이가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이지안은 숨을 들이켰다. 바닥에는 깨진 크리스탈 꽃병의 날카로운 유리 파편들이 은빛 칼날처럼 흩어져 있었고, 그녀의 발목에서는 붉은 피가 배어 나와 대리석을 적시고 있었다. 품에 안긴 은지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겨우 정신을 차렸으나, 전신 마비 증세로 인해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이 참상을 들키는 순간, 야간 통행금지 규칙 위반으로 지안은 즉각 해고될 것이며 가문의 공방 ‘은광요’를 살릴 기회는 영원히 박탈당할 터였다.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틈 사이로 랜턴의 차가운 백색 불빛이 어둠을 가르고 들어왔다.
불빛의 끝에 선 사내는 성북동 대저택을 30년간 지켜온 엄격한 수석 집사, 한 집사였다. 그의 깊게 파인 눈가 주름 사이로 서늘한 안광이 번뜩였다. 한 집사는 바닥에 주저앉아 지원을 온몸으로 안고 있는 지안과, 그 주변에 흩어진 피와 메스, 그리고 깨진 유리 조각들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안은 심장이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지만, 이빨을 악물고 지원의 등을 더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녀는 겁먹은 가난한 미술 교사의 가면을 쓰고 즉흥 연기를 시작했다.
“한 집사님…… 상무님이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셔서 자해를 하려고 하셨어요. 제가 막으려다가 꽃병이 깨졌고…….”
지안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연기인 동시에, 실제로 발목에서 밀려오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흘러나온 진심이었다.
한 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지안의 피 묻은 발목을 지나, 지원의 목덜미에 걸려 있는 ‘신경 안정 한방 펜던트’로 향했다.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은은하고 따뜻한 침향의 향기가 회청색 방 안의 매캐한 피비린내를 지워가고 있었다. 한 집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는 과거 지원의 어머니 한여진 이사장이 생전에 가장 아꼈던 차의 향기, 그리고 그녀가 구가하던 다도의 온기를 기억하고 있는 산증인이었다.
그때, 지안의 품에 안겨 있던 지원이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한 집사…….”
지원의 창백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이 사람은…… 나를 구하려 한 거다. 은정학에게…… 단 한 마디도 전하지 마라.”
그것은 명령인 동시에 애원이었다. 평생 타인을 불신하며 폐쇄적으로 살아온 지원이, 처음으로 외부인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수석 집사에게 압박을 가하는 순간이었다.
한 집사는 침묵 속에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지안의 짓무르고 상처 가득한 손끝에 머물렀다. 돈을 바라고 접근한 첩자라면 결코 제 몸을 던져 광기 어린 재벌 후계자의 칼날을 막아서지 않았을 것이다. 한 집사는 조용히 랜턴 불빛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리고 무거운 한숨과 함께 서재 문을 등 뒤로 굳게 닫았다.
“……이 방에서 있었던 일은 최 비서에게 보고하지 않겠습니다.”
한 집사의 목소리는 낮고 낮았다.
“하지만 상무님의 자해 흔적과 이 피는 날이 밝기 전에 완벽히 지워야 합니다. 이지안 선생님, 상무님을 침실로 모시는 동안 바닥을 정리하십시오. 구급상자는 서재 책상 세 번째 서랍에 있습니다.”
지안은 안도감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집사가 지원을 부축해 휠체어에 태우는 사이, 지안은 절뚝거리는 다리로 방 구석 벽 틈새로 손을 뻗었다. 지원이 마지막 순간 가리켰던 소년 시절의 비망록. 지안은 절대 촉각을 가동해 먼지 쌓인 낡은 가죽 비망록을 끄집어내어 자신의 린넨 가방 안감 깊은 곳에 은밀히 숨겼다.
그녀는 바닥의 유리 파편을 신속히 수거하고 피 흔적을 소독약으로 지워냈다. 발목의 상처가 욱신거렸지만, 지금은 아픔을 느낄 시간조차 아까웠다. 모든 흔적을 완벽히 지운 뒤, 지안은 한 집사의 묵인 하에 야간 감시 카메라의 사각지대를 타고 자신의 대기실로 무사히 생환했다.
***
다음 날 오전 9시, 지안의 대기실.
지안은 문을 걸어 잠근 채, 가방 안감에서 수현이 보낸 세컨드폰을 꺼냈다. 저택 내부의 ‘외부 통신 장비 소지 금지’ 규칙 때문에 심장이 쪼여왔지만, 수현의 암호화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지안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했다.
[지안아, 분석 결과 나왔어. 주사기 공병에 남아 있던 성분, 단순한 영양제가 아니야. 미량의 ‘코니인(Coniine)’ 계열 성분이야. 미나리과 독초에서 추출한 맹독성 알칼로이드 물질인데, 이걸 매일 아주 미량씩 장기 투여하면 운동 신경 말단이 서서히 마비되면서 사지 경련, 호흡 곤란, 그리고 극심한 공황 발작을 유발해. 겉보기에는 완벽한 조현병이나 정신 분열 증세처럼 보이게 만드는 거지. 배후는 확실해. 은정학 부회장이야. 오만석 주치의를 매수해서 지원 씨를 천천히 죽여가고 있는 거야.]
보고서를 읽어 내려가는 지안의 눈동자가 분노로 붉게 물들었다.
‘자해 흉터 속 마비독의 진실’이 마침내 과학적으로 증명된 순간이었다. 지원이 오랜 세월 겪어온 자해와 발작은 정신적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친숙부인 은정학이 주입한 비정한 독약 사슬 때문이었다. 사지가 마비되어 숨이 막혀올 때마다, 지원은 살아있음을 느끼기 위해 메스로 제 살을 찢어 강제 통각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지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오른손바닥의 꿰맨 자상이 터져 나올 듯 아팠지만, 가슴을 채운 분노가 고통을 압도했다.
‘은정학…… 당신이 인간이야?’
지안은 눈물을 훔치며 비망록을 펼쳤다. 낡은 종이 냄새 사이로 소년 지원이 흘린 눈물의 흔적이 가득했다. 그리고 가죽 표지 안쪽 구석, 미세한 도자기 문양의 스탬프가 찍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한여진 이사장이 남긴 유품 청자의 무늬와 완벽히 일치했다. 모든 진실의 실마리가 하나로 얽히고 있었다.
지안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즉각 지하 아틀리에로 향했다. 오후의 미술 치료 수업 시간이 시작되었다.
***
지하 아틀리에의 문이 닫히고, 지안과 지원은 단둘이 마주 앉았다.
지원은 어제보다 훨씬 창백한 안색으로 휠체어에 기대어 있었다. 그의 오른손은 만성 마비독의 부작용으로 인해 눈에 띄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안은 조용히 물레를 돌리며 흙을 만지는 척하다가, 지원의 곁으로 바짝 다가섰다.
“상무님.”
지안은 최 비서의 도청망을 피해 지원의 귀에 대고 아주 낮게 속삭였다.
“상무님이 미친 게 아니에요.”
지원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지안은 그의 떨리는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며 말을 이어갔다.
“매일 아침 안 간호사가 놓는 영양제 주사, 거기에 미량의 신경 마비독인 ‘코니인’이 섞여 있었어요. 상무님의 발작과 마비는 그 독약 때문이에요. 은정학 부회장과 오만석 주치의가 상무님을 정신병자로 만들기 위해 꾸민 음모예요.”
지원의 호흡이 순간 거칠어졌다. 숨소리 공감각 청각을 지닌 그는 지안의 떨림 없는 진실한 목소리에서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감지했다. 그의 가슴속에서 수년간 자신을 괴롭혀온 ‘내가 진짜 미친 괴물인가’라는 자괴감이 씻겨 내려가며, 거대한 분노와 해방감이 동시에 피어올랐다.
“내가…… 미친 게 아니었다고……?”
“네, 그러니까 살아야 해요. 우리가 그들의 사슬을 끊어야 합니다.”
지안은 지원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단단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주치의 처방 약물 복용 규칙’을 속여야 합니다. 안 간호사가 약을 먹이려 할 때, 삼키는 척하며 혀 밑에 숨겼다가 뱉어내는 구강 보관 프로토콜을 연습해야 해요. 제가 뱉어낸 약을 수거할 수 있도록 아틀리에 구석에 특수 세라믹 용기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지원은 이빨을 악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안의 정직한 눈빛이 그의 마음에 단단한 신뢰의 닻을 내렸다.
“그리고, 이미 상무님의 몸속에 축적된 마비독을 배출시켜야 합니다. 오른손의 떨림을 멈추게 할 해독제를 조제할게요.”
지안은 아틀리에 테이블 위에 오동나무 킨츠기 도구 상자를 펼쳤다. 그녀는 경동시장 임태호 약초방에서 자신의 비상금과 가방을 담보로 극비리에 공수해 온 최상급 ‘천연 침향 가루’를 꺼냈다. 그리고 가문 대대로 내려온 전통 비법에 따라, 침향 가루와 정제된 야생 옻나무 수액(생칠)을 황금 비율로 배합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지안이 지닌 최고 난도의 약학적 기술인 ‘전통 한방 해독 조제(Advanced Detoxification)’ 단계였다.
지안은 아틀리에 지하의 소형 가마에 불을 지폈다. 온도가 서서히 올라가며 옹기 용기 속에서 침향과 옻 수액이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붉은 가마 불꽃이 지안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비추었다. 오른손 상처가 열기에 자극받아 찢어질 듯 아팠지만, 지안은 대나무 주걱을 저으며 농도를 미세하게 조절했다.
치익—.
약재가 농축되면서 아틀리에 가득 깊고 묵직하며 은은한 황금빛 향기가 퍼져나갔다. 훈증되는 침향의 연기가 지원의 코끝을 스치자, 그의 날카롭던 뇌 신경이 가라앉고 시야가 맑아졌다.
마침내 지안은 가마에서 투명한 황금빛을 띠는 해독 유액을 도자기 잔에 담아 지원에게 건넸다.
“드세요. 상무님의 척수 신경을 묶고 있는 독소를 분해해 줄 겁니다.”
지원은 주저 없이 잔을 받아들였다. 씁쓸하면서도 깊은 침향의 온기가 그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온몸의 혈관으로 퍼져나갔다. 따뜻한 열기가 그의 척수를 타고 내려가 차갑게 마비되어 있던 오른팔의 신경 마디마디를 두드렸다.
지원은 눈을 감았다. 몸속에서 얼어붙었던 얼음 장벽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적이 일어났다.
“……아.”
지원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가 영롱한 빛을 되찾았다.
언제나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잘게 떨리며 연필조차 잡지 못하게 만들었던 오른손끝이, 기적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사슬처럼 묶여 있던 미세한 떨림이 완벽하게 가라앉은 것이다.
지안은 미소를 지으며 오동나무 상자에서 만년필을 꺼내 그의 굳어있던 오른손가락 사이에 쥐여주었다.
지원은 침을 삼키며 만년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부드럽고 완벽하게 통제되었다. 그는 평생 처음으로, 자신의 의지만으로 펜을 움직여 하얀 종이 위에 서서히 잉크를 묻혔다.
사각, 사각.
하얀 종이 위에 은지원의 정갈하고 힘 있는 친필 서명이 한 올의 흐트러짐도 없이 선명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스스로 일어설 힘을 얻은 황태자의 첫 발걸음이었다. 지안은 그 찬란한 순간을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서 벅차오르는 온기를 느꼈다.
바로 그 순간, 아틀리에의 차단 철문 너머로 거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최 비서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어젖혔다.
“상무님, 은정학 부회장님이 내일 아침 불시 방문을 통보하셨습니다. 준비하시지요.”
최 비서의 서늘한 음성이 밀실의 평화를 깨뜨리며, 다가올 거대한 폭풍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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