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반출, 숨겨진 우군
아침 8시 30분, 성북동 대저택 지하 아틀리에의 공기는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고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안 간호사의 차가운 바늘이 은지원의 창백한 피부를 찌르는 순간, 이지안의 눈동자는 바닥에 놓인 쓰레기통 속으로 깊게 가라앉았다.
방금 전 안 간호사가 약액을 주입하고 무심히 던져버린 갈색 유리 앰플 공병. 그것이 바로 은지원이라는 한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서서히 좀먹고 있는 비정한 음모의 실체였다.
지원은 링거 바늘이 꽂히자마자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가뜩이나 창백한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질려갔고, 물레를 만지며 잠시 생기를 찾았던 그의 오른손가락 마디마디가 다시금 딱딱하게 굳어갔다. 주입된 독소가 그의 신경망을 마비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지안은 이를 악물었다. 분노로 인해 손바닥에 새겨진 메스 자상이 욱신거렸고, 밤새 정제한 천연 옻 때문에 벌갛게 짓무른 손가락 끝이 불에 타는 듯 쓰라렸지만, 그녀는 표정을 철저히 감추었다. 지금은 약한 모습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주사는 끝났습니다. 상무님은 안정이 필요하니 아틀리에 수업은 이만 종료해 주시죠.”
안 간호사가 기계적인 목소리로 말하며 주사기 가방을 챙겼다. 그녀의 눈빛에는 지안을 향한 경계심이 가득했다. 지안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상무님의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니 오늘은 이만 정돈하겠습니다.”
한 집사가 다가와 지원의 휠체어를 밀고 아틀리에를 빠져나갔다. 안 간호사 역시 지원의 뒤를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철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아틀리에에는 오직 지안 한 사람만이 남겨졌다.
지안은 심호흡을 하며 천장 구석에서 조용히 작동하고 있는 CCTV 카메라를 쳐다보았다. 저택의 모든 정보는 은정학 부회장의 충견인 최 비서의 컴퓨터로 실시간 전송되고 있을 터였다. 지안은 자연스럽게 린넨 앞치마를 벗어 아틀리에 테이블을 닦기 시작했다. 그리고 물레 옆에 흩어진 흙먼지를 치우는 척하며, 천천히 쓰레기통이 놓인 구석으로 몸을 움직였다.
CCTV의 사각지대는 물레 뒤편의 거대한 옹기 항아리 그림자뿐이었다. 지안은 등을 돌려 카메라의 렌즈를 몸으로 가로막았다. 그리고 극도로 단련된 손끝의 절대 촉각을 가동해, 쓰레기통 깊숙한 곳에 버려진 젖은 거즈와 일회용 비닐 더미 사이를 헤집었다.
스스슥.
마침내 손가락 끝에 서늘하고 매끄러운 유리 감각이 닿았다. 안 간호사가 버린 ‘의문의 영양제 주사기’ 공병이었다. 지안은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낚아채 앞치마 안쪽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이제 이 저택을 빠져나가는 것이 문제였다. 성북동 대저택의 정문에는 은성그룹 사설 경호팀의 수석이자 은정학의 명령에 철저히 움직이는 박 경호원이 버티고 있었다. 나갈 때마다 실시되는 삼엄한 소지품 검사와 금속 탐지기 수색을 우회하지 못하면, 이 약병은 반출되기도 전에 압수당하고 지안은 산업 스파이로 몰려 즉각 구금될 터였다.
지안은 아틀리에 구석에 놓인 자신의 오동나무 킨츠기 도구 상자를 열었다. 그리고 상자 안쪽 바닥의 얇은 펠트 천 안감을 미세한 조각칼로 뜯어냈다. 상처 입은 오른손으로 바늘을 쥐자 찌르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지만, 지안은 한 올 한 올 정교하게 실을 꿰매어 가방 안감의 이중 주머니 속에 주사기 공병을 단단히 고정시켰습니다. 금속 바늘 성분이 탐지기에 걸릴 위험이 컸기에, 그녀는 킨츠기용 순금 분말이 담긴 황동 용기 바로 뒤편에 약병을 배치했다. 황동의 두꺼운 질량으로 탐지기의 주파수를 일시 교란하려는 필사적인 계산이었다.
준비를 마친 지안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아틀리에의 차가운 방화문을 열었다. 복도는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지안은 침착하게 걸음을 옮겨 대저택의 중앙 로비를 지나 정문 보안 검색대로 향했다.
탁.
정문 앞에 서자, 다부진 체격의 박 경호원이 검은 양복 차림으로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귀에 꽂은 인이어가 미세하게 지직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지안 씨, 퇴근 수색이 있겠습니다. 가방을 이쪽으로 올려놓으십시오.”
박 경호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지안은 비굴할 정도로 어깨를 움츠리며 가방을 건넸다.
“아, 네. 도구들이 많아서 조심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다 비싼 전통 재료들이라……”
박 경호원은 대답 대신 지안의 오동나무 상자를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의 가죽 장갑 낀 손이 지안의 대나무 주걱과 사포, 천연 옻칠 붓들을 무자비하게 뒤흔들었다. 도구들이 부딪히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지안의 침이 바짝 말라갔다.
박 경호원은 도구 상자에서 혐의점을 찾지 못하자, 이내 지안의 린넨 가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휴대용 금속 탐지기를 가방 표면에 바짝 대고 쓸어내리기 시작했다.
위이잉—.
탐지기의 붉은 센서가 가방 아래쪽, 지안이 약병을 숨겨둔 안감 부근으로 다가갔다. 황동 용기 뒤에 숨겼음에도 불구하고, 미세한 금속 바늘의 존재가 탐지기의 주파수를 건드렸다.
삐익—!
날카로운 경보음이 정적을 찢었다. 박 경호원의 눈빛이 사냥개를 발견한 것처럼 순식간에 예리하게 빛났다.
“이게 뭡니까? 가방 안쪽에 금속 반응이 있습니다.”
“아, 그건…… 복원 작업할 때 쓰는 황동 고정 핀이랑 금박 용기일 거예요. 상자 안에 다 안 들어가서 가방 안쪽에 넣어둔 건데……”
지안은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당황한 기색을 연출했다. 돈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가난한 미술 교사 특유의 비굴함을 연기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박 경호원은 속지 않았다. 그는 가방 안쪽 지퍼를 열고 지안이 꿰매어 둔 이중 안감 쪽으로 가죽 장갑 낀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주사기 공병이 숨겨진 안감 표면을 짚기 직전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복도 저편에서 요란한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콰창—! 쨍그랑!
둔탁한 금속 마찰음과 함께 엄청난 양의 구정물이 대리석 바닥을 덮쳤다. 대저택의 젊은 메이드 정유미가 대걸레 양동이를 통째로 쓰러뜨리며 바닥에 넘어진 것이었다.
“아악! 죄송합니다! 제가 발을 헛디뎌서……!”
정유미는 울상을 지으며 쓰러진 양동이를 붙잡고 어쩔 줄 몰라 했다. 구정물이 박 경호원의 깨끗한 구두 코앞까지 흘러들었다. 정문 로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박 경호원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그쪽으로 쏠렸다.
“이봐!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 거야! 당장 치우지 못해!”
박 경호원이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지르며 가방에서 손을 뗐다. 지안의 시선이 바닥에 넘어진 정유미와 허공에서 마주쳤다. 정유미의 동그란 눈망울 속에 미세한 신호가 담겨 있었다. 지안의 따뜻한 마음에 감화되었던 그녀가, 지안이 위기에 처한 것을 보고 고의로 사고를 낸 것이 분명했다.
지안은 그 찰나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박 경호원이 고개를 돌려 정유미에게 호통을 치는 사이, 자연스럽게 가방을 낚아채 지퍼를 굳게 잠갔다.
“죄송해요, 경호원님. 제가 차 시간이 늦어서 이만 가볼게요. 수고하세요!”
지안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정문의 자동 회전문을 밀고 성북동 대저택의 삼엄한 담벼락 밖으로 걸어 나갔다. 등 뒤로 박 경호원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멀어져 갔다.
대문 밖 도로에는 최태준 변호사가 미리 수배해 둔 무기명 택시가 대기하고 있었다. 지안은 택시 뒷좌석에 몸을 싣자마자 가방을 품에 꼭 껴안았다.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짓무른 손가락 끝에서 참을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이 다시금 밀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손을 떨며 앞 안감을 뜯어내고 갈색 약병이 무사함을 확인했다.
“강남구 역삼동으로 가주세요. 최대한 빨리요.”
택시는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성북동 언덕길을 미끄러지듯 내려가, 혼잡한 도심의 소음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한 시간 후, 택시는 역삼동의 허름하고 낡은 상가 건물 앞에 멈춰 섰. 지안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3층으로 향하는 어두운 계단을 올랐. 빛바랜 아크릴 현판에 ‘수현 흥신소’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적혀 있었다.
철문을 세 번 두드리자, 문이 열리며 가죽 재킷을 입은 차수현이 모습을 드러냈다. 수현은 지안의 창백한 안색과 짓무른 손을 보고 혀를 찼다.
“지안아, 몰골이 그게 뭐야? 성북동 귀신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수현아, 시간 없어. 이거 분석해 줘.”
지안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가방 안감에서 뜯어낸 갈색 주사기 공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수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사설 탐정 특유의 날카로움으로 빛났다. 그녀는 핀셋을 꺼내 약병을 집어 들어 형광등 불빛에 비추어 보았다.
“이게 그 저택에서 매일 아침 주입한다는 영양제야?”
“어. 영양제가 아니야. 내 절대 촉각과 후각이 말해주고 있어. 미량의 독극물이 섞여 있어. 지원 씨의 전신 마비와 자해는 전부 이 약 때문에 일어나는 증상이야.”
수현은 약병 바닥에 묻은 미량의 투명한 잔여 액체를 응시하며 흥미로운 눈빛을 빛냈다.
“좋아. 내가 아는 사설 고미술품 보존 연구소의 강지수 연구원한테 즉시 보낼게. 병원 전산망을 거치지 않는 사설 기관이라 정보가 유출될 염려는 없어. 결과는 내일 중으로 나올 거야.”
수현은 약병을 특수 밀봉 지퍼백에 담아 금고에 넣은 뒤, 무거운 표정으로 지안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지안아, 약병 분석보다 더 급한 문제가 있어. 내가 그 대저택 주변을 미행 차량으로 감시하다가 아주 흥미로운 무선 주파수를 가로챘거든.”
“무선 주파수라니?”
지안의 미간이 좁혀졌다. 수현은 책상 위의 모니터를 돌려 지안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화면에는 성북동 저택의 내부 동선과 함께 특정 인물의 이메일 송수신 기록이 실시간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저택 내부에 은정학 부회장이 심어놓은 진짜 밀정이 있어. 네 일거수일투족과 지원의 발작 주기를 실시간으로 은정학에게 보고하는 놈 말이야.”
수현이 모니터 화면의 한 이메일 계정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 비정상적인 영양제를 직접 관리하고, 매일 저택 내부의 도청 장치를 확인하는 놈. 바로 은지원의 개인 수행 비서인 최 비서야.”
최 비서.
지안의 머릿속에 안경 너머로 차가운 눈빛을 빛내던 그 사내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지안의 심장이 쿵 내려앉는 순간이었다. 저택 내부의 가장 가까운 곳에 은정학의 눈과 귀가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그 순간, 지안의 주머니 속에서 휴대전화가 요란한 진동음을 울렸다.
지안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며 전화를 꺼냈다. 화면에는 여주 공방에 있는 남동생 이지호의 이름이 뜨겁게 깜빡이고 있었다. 지안이 통화 버튼을 누르기도 전에, 화면 위로 절박한 텍스트 메시지가 날아와 꽂혔.
[누나, 빨리 공방으로 와줘! 골든캐피탈 조상식 패거리들이 들이닥쳐서 가마터랑 도자기들을 다 부수고 있어! 아버지가 막아서다 쓰러지셨어! 빨리!]
지안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성북동 저택의 음모가 마침내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인 여주 은광요 공방까지 집어삼키기 위해 이빨을 드러낸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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