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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조각 난 신뢰, 24시간의 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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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 아틀리에를 가득 채웠던 붉은 비상등의 박동이 점차 느려졌다. 찢어질 듯 가쁜 숨을 몰아쉬던 은지원의 어깨가 마침내 차분히 가라앉았을 때, 방 안을 지배한 것은 귀가 먹먹할 정도의 정적이었다. 바닥에는 차갑게 식어버린 백토 가루와 흩어진 집기들, 그리고 두 사람의 피가 뒤섞여 검붉은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지원은 휠체어 위에서 멍하니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의 창백한 손가락 사이로 붉은 혈흔이 묻어 있었다. 그것은 그의 피가 아니었다. 지원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여 자신을 감싸 안고 있던 이지안의 오른손으로 향했다.


지안의 오른손바닥은 무참하게 갈라져 있었다. 날카로운 의료용 메스의 칼날에 베인 상처에서 여전히 붉은 피가 울컥울컥 배어나와 대리석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고통스러울 법도 하건만, 지안은 그저 묵묵히 지원의 호흡을 살피며 손가락 끝에 힘을 주고 있을 뿐이었다.


“당신…….”


지원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평생 사람들의 목소리에서 가식과 거짓만을 읽어내던 그의 예민한 청각이, 지금 지안의 가쁜 숨소리에서 오직 ‘살려야 한다’는 날것 그대로의 정직한 진심만을 포착하고 있었다. 그것은 지원이 평생토록 겪어보지 못한 거대한 인지 부조화였고, 동시에 심연을 뒤흔드는 충격이었다.


하지만 충격은 곧 지독한 수치심과 공포로 변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가장 추악한 바닥을 보였다는 것, 그리고 자신을 지키려다 타인이 피를 흘렸다는 사실이 그의 방어 기제를 난폭하게 자극했다.


“왜…… 왜 나를 막았어?”


지원의 눈동자가 다시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는 지안의 피 묻은 손을 뿌리치듯 뒤로 물러섰다.


“내가 죽든 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돈 때문이야? 내 몸값이 아까워서 그래? 은성그룹에서 주는 그 비열한 돈 때문에 나한테 동정이라도 베푼 거냐고!”


그의 목소리는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날카로웠다. 지원은 아틀리에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놓여 있던 다도 세트로 시선을 돌렸다. 그것은 지안이 수업을 위해 정성스레 준비해 온, 지원의 망모 한여진 이사장이 남긴 유일한 유품이자 고려청자 찻잔이었다. 은은한 비색을 띠며 단아하게 빛나던 그 찻잔을 보는 순간, 지원의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완전히 꺾여버렸다.


그는 자신을 향한 지안의 정직한 눈빛을 견딜 수 없었다. 그 눈빛이 마치 자신의 흉측한 상처를 샅샅이 들여다보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이 비참했다.


와장창—!


지원의 거친 손길이 테이블을 쓸어내렸다. 비색의 고려청자 찻잔이 허공을 그리며 대리석 바닥으로 추락했다. 귀를 찌르는 파열음과 함께, 1,000년의 세월을 버텨온 찬란한 비색이 순식간에 12개의 날카로운 조각으로 산산조각 나 사방으로 튀었다.


“다 필요 없어! 당장 내 눈앞에서 사라져! 당신도 결국 그들과 똑같은 위선자일 뿐이야!”


지원은 소리를 지르며 휠체어 바퀴를 거칠게 굴려 아틀리에 구석의 어둠 속으로 자신을 가두었다.


그때, 닫혀 있던 지하 아틀리에의 육중한 차단 철문이 기계음을 내며 위로 치솟았다. 문이 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차가운 발자국 소리가 붉은 조명 속으로 걸어 들어왔.


은성그룹 부회장 은정학의 밀정인 최 비서, 그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대저택의 수석 주치의 오만석 박사였다. 그들의 뒤에는 건장한 사설 경호원 두 명이 삼엄한 표정으로 대기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란입니까?”


오만석이 안경을 치켜올리며 아틀리에 바닥의 참상을 훑어보았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흥건한 피와 깨진 청자 조각들, 그리고 지안의 베인 손바닥에 머물렀다. 오만석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에게 이것은 지안을 합법적으로 축출할 완벽한 명분이었다.


“이지안 씨, 당신이 환자를 자극해 발작을 유도했군요. 게다가 이건 명백한 무면허 의료 행위이자 업무상 과실치상입니다. 환자의 신체에 위해를 가하고 상태를 극도로 악화시켰어요.”


오만석의 목소리는 법관처럼 준엄했으나, 그 밑바닥에는 지안을 향한 노골적인 적대감이 깔려 있었다. 그가 지원에게 매일 주입하는 미량의 신경독 처방이 지안이라는 돌발 변수로 인해 탄로 날까 봐 가해오는 선제공격이었다.


최 비서 역시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차가운 눈빛이 지안의 린넨 셔츠에 묻은 피를 응시했다.


“이지안 씨, 계약서 조항을 상기시켜 드려야겠군요. 환자의 신변에 위해를 가하거나 저택 내부의 평온을 깨뜨릴 경우, 고용 계약은 즉시 해지됩니다. 당장 짐을 싸서 나가십시오. 은성그룹 법무팀은 무단 침입 및 계약 위반으로 당신에게 거액의 손해배상을 청구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최 비서의 신호에 뒤에 서 있던 경호원들이 지안의 양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붙잡으려 했다. 지안의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여기서 쫓겨나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쓰러진 아버지의 병원비도, 가문의 목숨줄인 은광요 공방을 뒤덮은 3억 원의 사채 빚도 갚을 길이 영영 사라진다. 무엇보다 저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파괴해 가는 지원을 이 비정한 괴물들의 손에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었다.


“잠깐만요.”


지안이 오른손바닥의 통증을 꾹 참아내며 단단한 목소리로 외쳤. 그녀의 목소리에는 장인 특유의 꺾이지 않는 자존심과 기백이 서려 있었다. 경호원들이 주춤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환자를 자극했다고요? 오 박사님, 의사로서의 양심을 걸고 말씀해 보세요. 제가 막지 않았다면 은지원 상무님은 지금 자신의 동맥을 끊었을 겁니다. 방관한 것은 제가 아니라, 철문을 걸어 잠그고 모니터로 구경만 하던 당신들이 아닙니까?”


지안의 날카로운 지적에 오만석의 얼굴이 순간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무슨 무례한……! 경비원들, 당장 이 여자를 끌어내지 않고 뭐 합니까!”


“그리고 최 비서님.”


지안은 오만석을 무시한 채 최 비서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리고 바닥에 산산조각 난 비색 청자 조각들을 가리켰다.


“이 청자가 무엇인지 정말 모르십니까? 이건 단순한 그릇이 아닙니다. 지원 상무님의 어머니이신 고(故) 한여진 이사장님이 생전에 가장 아끼시던, 은성문화재단의 상징과도 같은 고려청자 다도 찻잔입니다. 이 유품이 산산조각 난 상태로 이사회나 외부 언론에 알려진다면, 저택 내부의 관리 소홀 책임은 누구에게 돌아갈까요?”


최 비서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한여진의 유품이 파손되었다는 사실은 은성그룹 내부의 원로 주주들에게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그때, 아틀리에 문가 그늘진 곳에 묵묵히 서 있던 인물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30년간 성북동 대저택을 지켜온 수석 집사, 한 집사였다. 그의 정갈하게 빗어 넘긴 백발 아래로 깊은 고뇌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평생 한여진 이사장에게 충성을 바쳤던 그에게, 그녀의 유품이 깨졌다는 사실은 가슴을 후벼파는 고통이었다.


지안은 한 집사의 눈빛에서 흔들리는 신뢰를 포착했다. 그녀는 주저 없이 한 집사를 향해 무릎을 꿇듯 허리를 숙였다.


“한 집사님, 제게 단 하루의 기회를 주십시오. 24시간의 유예를 주신다면, 제 가문 대대로 내려온 전통 도자기 복원 기법인 킨츠기(Kintsugi)를 통해 이 깨진 찻잔을 원형 그대로, 아니 이전보다 더 단단하고 아름답게 복원해 내겠습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깨진 고려청자를 하루 만에 복원하겠다고? 장난치는 겁니까!”


오만석이 코웃음을 치며 소리쳤지만, 지안은 한 집사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만약 제가 내일 이 시간까지 이 찻잔을 완벽하게 복원해 내지 못한다면, 스스로 계약을 파기하고 어떤 법적 처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하지만 복원에 성공한다면, 저의 고용 계약을 유지해 주시고 제 미술 치료 방식을 더 이상 방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아틀리에 내부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최 비서는 지안이 불가능한 도박을 제안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2조각으로 산산조각 난 청자를 하루 만에 완벽히 접합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최 비서가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한 집사의 눈치를 살폈다.


“한 집사님, 이 여자의 헛소리를 더 들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장 경찰에 고소하는 것이……”


그러나 한 집사는 최 비서의 말을 막아서며,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린 채 자신들의 대화를 듣고 있을 은지원의 방 향을 가만히 응시했다. 지원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의 거친 숨소리는 이미 잦아들어 있었다.


한 집사는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이지안 씨. 한여진 이사장님의 유품을 지킬 기회를 드리지요. 딱 24시간입니다. 내일 오후 4시 30분까지 이 아틀리에 테이블 위에 온전한 청자 찻잔을 올려놓지 못한다면, 법무팀의 절차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최 비서가 차가운 미소로 동의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어차피 실패할 수밖에 없는 덫이었다.


“그럼 내일 이 시간에 오도록 하죠. 이지안 씨, 당신의 그 오만한 손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기대하겠습니다.”


그들이 경호원들을 데리고 아틀리에를 빠져나가자, 철문이 다시 굳게 닫혔다.


정적 속에서 지안은 오른손바닥의 피를 대충 옷자락으로 훔쳐낸 뒤, 바닥으로 무릎을 꿇었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에 12개로 쪼개진 미세하고 날카로운 청자 파편들이 붉은 비상등 불빛 아래 쓸쓸하게 빛나고 있었다. 지안은 떨리는 왼손을 뻗어, 날카로운 파편들을 하나씩 조심스럽게 수거하기 시작했다.

HẾT CHƯƠ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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