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장고의 비밀, 어머니의 흔적
오만석의 손끝이 부풀어 오른 링거 튜브를 향해 뻗어 나갔다.
지안의 시야 속에서 오만석의 두꺼운 손가락이 튜브 표면의 팽팽한 실리콘 막에 닿기 직전이었다. 밸브가 완벽히 잠겨 수액이 전혀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안에 고농도의 마비독 코니인이 가득 고여 튜브가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는 물증이 발각되는 것은 찰나의 순간에 달려 있었다. 발각되는 순간, 지안은 무면허 의료 행위와 후계자 위해 혐의로 즉각 사설 경호원들에게 끌려가 저택에서 영구히 축출될 터였다. 가문의 공방 은광요를 지킬 마지막 끈이 끊어지는 비극이었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끝장이야. 더 큰 소란으로 적들의 시선을 완전히 돌려야 해!’
지안은 오른손바닥의 메스 자상 흉터에서 밀려오는 욱신거리는 통증과, 지난밤 베인 발목의 칼칼한 아픔을 정신력으로 억눌렀다. 그녀는 가난하고 겁에 질린, 오직 돈줄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약한 사기꾼 교사의 가면을 다시 한번 얼굴 위에 굳건히 썼다. 지안은 전신을 크게 떨며 비명을 질렀다.
“원장님! 제발 살려주세요!”
지안은 무릎을 꺾으며 침대 모퉁이에 서 있던 높다란 메탈 소재의 링거 거치대를 향해 고의로 온몸을 던지듯 비틀거렸다.
쾅—! 쨍그랑!
지안의 어깨가 링거 거치대를 강하게 들이받았고, 거치대는 중심을 잃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요란한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거치대 꼭대기에 매달려 있던 플라스틱 링거 백이 바닥에 부딪치며 찢어졌고, 팽팽하게 부풀어 올라 독약이 고여 있던 실리콘 튜브 라인이 툭 소리를 내며 완전히 뜯겨 나갔다. 투명한 독성 수액이 바닥에 흥건하게 쏟아지며 알코올 냄새와 섞여 사방으로 튀었다.
“이, 무슨 천박하고 덜렁거리는 짓입니까!”
오만석이 바지깃에 수액이 튀자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안 간호사 역시 쓰러진 거치대 파편을 피하며 비명을 질렀다. 침실 문 앞을 지키던 박 경호원의 시선도 순식간에 바닥의 난장판으로 쏠렸다.
지안은 바닥에 주저앉아 쏟아진 수액 더미 위에 손을 짚은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흐느꼈다.
“죄송합니다, 원장님…… 상무님이 갑자기 또 눈을 부릅뜨시는 것 같아서 너무 겁이 나서 그만…… 제발 부회장님께 제 해고만은 말아달라고 전해주세요. 저 정말 이 돈 없으면 길거리로 나앉아야 해요…….”
지안의 비참하고 비굴한 즉흥 연기에 오만석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다. 링거 호스가 왜 부풀어 올랐는지 추적하려던 그의 의학적 의구심은, 지안의 천박한 실수로 인해 증거물 자체가 바닥에 쏟아져 파손되면서 자연스럽게 흩어져 버렸다. 오만석은 지안을 벌레 보듯 노려보며 혀를 찼다.
“돈에 눈이 먼 천박한 사기꾼 기집애 같으니라고. 환자의 병실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당신의 그 얄팍한 밑바닥이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안 간호사, 더러운 약병들은 전부 수거해. 부회장님께 이 한심한 교사의 실수를 그대로 보고하겠네.”
그때, 굳게 다문 입술로 침묵을 지키던 한 집사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그의 노련한 눈빛은 바닥에 쏟아진 독액과, 밸브가 잠겨 있는 호스의 단면을 스치듯 관찰했다. 하지만 그는 한 올의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오만석의 앞을 가로막았다.
“원장님, 상무님의 침실 청소와 정리는 저택 고용인들이 처리하겠습니다. 더러운 수액이 원장님의 의복을 더럽히기 전에 서둘러 본관으로 이동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 집사의 철저하고 정중한 통제에 오만석은 흠칫하며 안경을 치켜올렸다.
“후우, 알겠네. 안 간호사, 가방 챙겨서 나가지.”
안 간호사는 서둘러 깨진 앰플 조각들과 주사기 공병들을 가방 속에 챙겨 넣었다. 지안은 안 간호사가 가방을 닫기 직전, 그녀의 시선이 바닥 청소 도구로 쏠린 찰나를 놓치지 않았다. 지안은 엎드려 바닥을 닦는 척하며, 안 간호사의 열려 있는 가방 측면 그물망 속에서 방금 사용했던 ‘의문의 영양제 주사기’ 공병을 손가락 끝으로 은밀하고 신속하게 낚아챘다. 0.1mm의 청자 빙열을 만지던 그녀의 절대 촉각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지안은 주사기 공병을 자신의 린넨 셔츠 소맷자락 깊숙이 밀어 넣었다.
오만석과 안 간호사가 경호원의 호위를 받으며 침실을 빠져나가자, 무겁고 서늘한 침묵이 다시 방 안을 채웠다.
철컥,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침대에 누워 마비된 척 연기하던 지원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오른팔 정맥 부근은 오만석이 피스톤을 억지로 밀어붙인 압력 때문에 혈관이 터져 붉고 푸른 피멍이 심하게 들어 있었다.
“지원 씨!”
지안이 급히 침대 맡으로 다가가 지원의 오른팔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지원은 신체적인 통증으로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지안의 상처 입은 손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의 ‘숨소리 공감각 청각’이 지안의 가파른 숨결 속에서 극도의 안도감을 읽어내고 있었다.
“나는 괜찮다, 지안아…… 네 손은 괜찮은 건가.”
“제 손이 문제가 아니에요. 팔 혈관이 터졌잖아요. 오만석 그 인간,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이에요. 조금만 늦었어도 이 독약이 지원 씨의 심장으로 들어갔을 거예요.”
지안은 소맷자락에서 빼돌린 주사기 공병을 꺼내 들었다. 투명한 유리관 안쪽에 미세하게 남아 있는 비릿한 향기의 잔여물. 오만석의 범죄를 입증할 유일한 의학적 물리 증거였다. 지안은 이것을 자신의 오동나무 킨츠기 도구 상자 이중 안감 틈새에 정교하게 숨겼다. 황동 금가루 용기 뒤편에 숨겨진 약병은 정문의 금속 탐지기 주파수를 완벽히 교란할 터였다.
그때, 주위를 살피던 한 집사가 묵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상무님, 이지안 선생님. 오만석 주치의의 의심은 임시로 넘겼으나 상황이 극도로 급박해졌습니다. 최 비서가 부회장실에 보고한 가짜 보고서의 약발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은정학 부회장은 이지안 선생님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리기 위해, 이미 새로운 카드를 준비했습니다.”
“새로운 카드라니요, 한 집사님?”
지안이 묻자, 한 집사는 품 안에서 태블릿을 꺼내 한 통의 인사 공문서를 보여주었다.
“해외 유학파 출신의 엘리트 미술 치료사, 민세희(Min Se-hee)입니다. 미국 명문대 박사 학위를 가졌고, 은정학 부회장의 장학 재단 출신인 그녀가 내일 아침 정식으로 이 저택에 입성할 예정입니다. 그녀의 임무는 단 하나, 상무님을 ‘영구 정신 분열 및 자해성 치매’로 확정 진단하여 정신병원에 강제 격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지안 선생님은 무자격 대용 치료사로 고발당해 저택에서 영구히 쫓겨나게 됩니다.”
지원의 검은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민세희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보다, 자신을 완벽하게 매장하려는 숙부의 노골적인 이빨이 그의 목덜미를 조여오는 듯한 압박감 때문이었다.
“시간이 없군.”
지원이 이빨을 악물며 침대 시트를 꽉 쥐었다. 그의 왼손바닥에는 지난밤 펜던트를 움켜쥐어 생긴 손톱 자상의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들이 나를 미치광이로 가두기 전에, 어머니의 유품을 찾아야 해. 스위스 은행의 신탁 자금과 진짜 유언장을 해제할 마스터 패스코드가 새겨진 그 청자 주전자…….”
지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은성미술관 지하 수장고 제7실. 그곳에 한여진 이사장님의 유품 청자들이 보관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관장인 유미란(Yu Mi-ran)은 은정학 부회장의 처남댁이에요. 정식 학술 조사 공문서로는 출입이 백 퍼센트 반려될 게 분명해요.”
“그렇다면 합법적인 통로를 기다릴 여유는 없다.”
지원의 단호한 어조에 지안은 자신의 가방을 고쳐 메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미술관 내부의 보존 처리실 큐레이터인 한예슬(Han Ye-seul) 씨가 제 대학 후배이자, 한여진 이사장님을 진심으로 존경했던 사람이에요. 그녀라면 야간에 수장고 문을 열어줄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되어줄 거예요.”
“위험하다, 지안아. 유미란 관장은 수장고 보안을 3중 디지털 잠금장치와 실시간 캡스 경보 시스템으로 묶어두었어. 조금만 실수해도 무단침입으로 현행범 체포야.”
지원의 만류에도 지안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부서진 도자기를 복원하려면 가마터의 불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할 때가 있어요. 지원 씨의 깨진 영혼을 복원하기 위해서라면, 저는 그 어떤 금지구역이라도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뜨겁게 맞물렸다. 지원은 지안의 단단한 결의에 마음 깊은 곳에서 울컥하는 전율을 느꼈다. 그는 지안의 손을 꽉 쥐며 속삭였다.
“조심해라. 최강식 경호원을 미술관 외곽에 대기시키겠어. 무슨 일이 생기면 즉각 신호를 보내.”
* * *
밤 11시 45분, 서울중앙지방법원 저편의 화려한 빌딩 숲 사이에 위치한 은성미술관은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지안은 질끈 묶은 머리칼 위로 검은색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오동나무 킨츠기 도구 상자가 담긴 배낭을 어깨에 멘 채 미술관 후문의 직원 전용 비상 통로 앞에 섰다.
차가운 밤바람이 그녀의 뺨을 스쳤고, 발목의 유리 자상 상처가 걸을 때마다 욱신거렸지만 지안은 숨을 죽였다.
틱.
정전식 도어락의 불빛이 꺼지며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문틈 사이로 세련된 단발머리에 안경을 쓴 베이지색 수트 차림의 여성이 고개를 내밀었다. 한여진 이사장의 은혜를 입어 미술관을 지키고 있던 보존 처리실 수석 큐레이터, 한예슬이었다.
“지안 선배…… 정말 괜찮겠어요? 유미란 관장님이 수장고 제7실의 야간 출입 대장을 매일 아침 직접 검사해요. 발각되면 저뿐만 아니라 선배도 무사하지 못해요.”
예슬의 목소리는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자리와 평판을 담보로 지안에게 마스터 보안 카드를 건네고 있었다. 지안은 예슬의 차가운 손을 따뜻하게 맞잡았다.
“고마워, 예슬아. 한여진 이사장님의 진짜 유지를 밝히기 위해서야. 절대 너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흔적을 남기지 않을게.”
지안은 예슬이 건넨 마스터 보안 카드를 쥐고, 어두운 미술관 지하 통로로 발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미술관 특유의 차갑고 정적인 공기가 피부를 옥죄어 왔다. 지하 2층, 은성미술관의 심장부이자 금지구역인 지하 수장고 구역이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 콘크리트 벽면을 따라 붉은색 감시 카메라 센서들이 좌우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지안은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송은아 해커가 미리 전송해 준 주파수 방해 우회 칩을 꺼냈다. 동전 크기의 작은 칩을 마스터 카드 리더기의 황동 접촉부에 미세하게 부착하자, 실시간으로 흐르던 전파 보안망에 일시적인 노이즈가 발생하며 붉은 경보등이 3초간 깜빡였다.
‘지금이야!’
지안은 몸을 날려 수장고 제7실의 육중한 철문 앞으로 전력 질주했다. 지문 인식기와 홍채 인식기가 장착된 3중 디지털 잠금장치 위에 예슬의 마스터 카드를 접촉하고 우회 칩의 전원을 켰다.
삑, 삑, 삐리릭—.
철컥하는 육중한 금속성 잠금 해제 소리와 함께, 두꺼운 방화문이 천천히 열렸다. 지안은 신속히 안으로 몸을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수장고 제7실 내부의 공기는 습도 50%, 온도 18도로 엄격하게 통제되어 있어 극도로 서늘했다. 줄지어 서 있는 철제 선반 위에는 수백억 가치의 고미술품 청자들이 어둠 속에서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지안은 랜턴의 빛을 최소한으로 줄인 채 선반 사이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선반 중앙, 한여진 이사장의 기증 대장에 적혀 있던 비색 청자 주전자가 보관된 위치에 다다랐을 때, 지안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이럴 수가…….”
지안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선반 정중앙에 놓인 고려청자 비색 주전자는, 영롱해야 할 푸른 빛깔 대신 정체불명의 검고 두꺼운 특수 라커 칠로 온통 뒤덮여 훼손되어 있었다. 유미란 관장과 은정학 일파가 주전자 내벽에 새겨진 비밀 각인을 그 누구도 읽지 못하도록, 아예 고의로 화학 도료를 부어 표면을 훼손해 은폐해 둔 것이 분명했다. 육안으로는 그 어떤 미세한 빙열도, 내벽의 각인도 식별할 수 없는 참혹한 상태였다.
지안이 충격에 빠진 채 검게 그을린 주전자의 손잡이를 만지려던 바로 그 순간.
철컥, 철컥.
수장고 철문 밖 복도에서 묵직한 구두 발자국 소리와 함께, 야간 경비원들의 무전기 교신 소리가 차가운 콘크리트 벽을 타고 흘러 들어왔.
- “지하 2층 제7실 구역에 일시적인 주파수 노이즈 감지. 즉각 현장 수색 바람.”
무거운 군화 소리와 함께, 복도 저편에서 수장고 문을 향해 다가오는 경비원들의 랜턴 불빛이 붉은 경보등 사이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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